▒ 새로운소식 ▒

여자 옷을 입는 남자들

천하한량 2007. 11. 5. 21:05

지난달 30일 밤 11시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G카페. 한껏 멋을 낸 손님 10여명이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짧은 흰색 치마에 회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20대 중반, 긴 생머리에 단아한 재킷과 치마를 입고 핸드백을 어깨에 멘 40대 등 다양한 연령층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반짝이가 들어간 아이섀도를 칠하거나 붉은 색이 도는 립스틱을 바르는 등 대부분 화장이 짙고 화려했다. 술잔이 몇 차례 돌고 분위기가 흥겨워지자 이들은 카페에 있는 노래방 기기로 자리를 옮겼다. 가수 왁스의 노래 ‘오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카페 안에는 느닷없이 굵직한 중저음이 울려퍼졌다. 짙은 화장에 여자 옷을 입은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화장이 잘 될 때 기쁜 남자들

여자 옷을 입는 남자들이 있다.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이하 CD)’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여자로 인식하는 게이와는 달리, 취미로 여자 옷을 입는 남자들이다.

이날 밤 12시쯤 이 카페에 들어선 20대 중반의 한 남자는 정장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전형적인 회사원처럼 보였다. 그는 카페 매니저인 한모(38)씨에게 다가가 “저 오늘 ‘업(up)’ 합니다”고 속삭이고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업(up)’이란 ‘dress-up’의 줄임말로 이들 사이에서 ‘여자 옷을 입는다’는 뜻의 은어다. 탈의실에는 미니스커트부터 반짝이가 달린 원피스까지 여자 옷만 100여 벌이 넘었다. 탈의실 옆 분장실에는 여자 가발과 화장품도 갖춰져 있었다.

▲ 지난달 30일 서울 영등포구 G카페 분장실에서 빨간 상의와 검정 스커트로 멋을 낸 정모(30)씨가 분첩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다. 신분 노출을 꺼려 얼굴을 돌리고 앉았지만, 치마 밑으로 드러난 근육질의 다리가 정씨는 남자임을 말해준다. /변희원 기자

카페 매니저 한씨에 따르면 이곳을 찾는 남자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직업도 학생과 직장인, 사업가 등 다양하다. 신모(25·대학생)씨는 “거울을 보다가 ‘화장하면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장을 시작했다”며 “화장이 잘 될 때, 옆 사람들이 ‘예쁘다’고 할 때 너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서울에는 G카페처럼 CD들이 모이는 전문 카페만 4개 가량 있다. 국내 CD들은 혼자서 은밀하게 여장을 해왔으나, 1999~2000년쯤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전문 카페에서 만나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직 오프라인에서는 은밀하게 만나지만, 온라인 활동은 활발하다. CD들의 인터넷 카페인 ‘러쉬’는 회원수가 2만명이 넘는다. 다음 사이트의 한 CD카페에도 4000여 명이 가입해 있다. 혼자서 은밀히 여장을 즐기는 사람까지 감안하면 국내에는 약 2만~3만명 가량의 CD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긴장 해소 위해 여장

CD는 우리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일본 도쿄 신주쿠 역 근처에서는 일요일 낮 화려한 차림의 CD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3월 한 30대 남성이 자신이 CD임을 밝히고 여자 속옷을 입은 채 유명 TV쇼인 ‘제리 스프링어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미국 CIA는 1993년 CD에 대한 보고서까지 냈다. CIA는 “CD는 대부분 이성애자(異性愛者)이나,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긴장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여자 옷을 즐겨 입는다”며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높은 사람이 많고 부부생활에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 CD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째 CD생활을 하고 있다는 김모(40·자영업)씨는 “어릴 때부터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감과 억압이 견디기 힘들었다”며 “여자 옷을 입을 때만큼은 그런 억압에서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이 셋을 둔 직장인인 제모(37)씨는 “2년 전 소주 3병을 마시고서야 이곳에 올 용기를 냈다”며 “그 전까지 내 정신이 이상한 줄 알았는데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 구분이 너무 분명한 것에 심리적으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여장을 통해 그런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과 교수는 “1990년대 이후 유니섹스(unisex·의상이나 머리 모양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없는 것)가 유행했다”며 “CD를 정신병자 취급하지 말고 남자가 색다른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로스드레서의 역사

남자가 여장을 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에는 주로 남자 성직자가 여장을 한 경우가 많았다. 남성성(性)과 여성성(性)을 모두 갖춘 사람이 ‘완전한 인격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경수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북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Navajo)족을 비롯해 여러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여장 남자를 무당으로 숭배했다.

개인적 취향이나 일탈을 위해 여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중세 때부터다. 당시에는 여자가 무대에 설 수가 없어서, 극 역할 때문에 여장을 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한국의 남사당패, 중국의 경극 등에서 그랬다. 스스로 CD임을 밝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최근 들어서다.

세계 최대 UCC사이트인 ‘유튜브’에는 CD 관련 동영상이 1만4000여 건 올라와 있다. 자신의 여장 모습이나 여장을 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는 CD 전용 옷과 액세서리, 화장도구를 파는 오프라인 매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