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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서원 [文獻書院]

천하한량 2006. 12. 17. 00:10

문헌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5호 (서천군)
명     칭 문헌서원(文獻書院)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동/2,152㎡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한산이씨종중
관 리 자 한산이씨종중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서천군 문화관광과 041-950-4225
설     명 가정 이곡(1298∼1351)과 목은 이색(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문화재명 문헌서원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분을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宣祖) 27년(1594)에 이곳에 건립되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불타버렸다. 그후 광해군(光海君) 2년에 한산(韓山) 고촌(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해(1611)에 문헌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앞의 두 분과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 음애(陰崖) 이자(李자),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 등 다섯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고종(高宗)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의 서원 정리 사업에 따라 일시 철폐되었다. 그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을 해오다가 1969년 현재 위치에 재건하고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種德)을 추향(追享)하여 여섯 분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1)문헌서원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麒山面) 영모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지정번호  충남문화재자료 제125호
지정연도  1984년 5월 17일
소장  한산이씨 종중
소재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서원(부동산)
 
 


본문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이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1594년(조선 선조 27)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610년(광해군 2) 한산(韓山) 고촌(枯村)으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1611년에는 "문헌(文獻)"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 후 이종학(李種學), 이자, 이개(李塏)를 추가하여 다섯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서원들이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자 문헌서원이 있던 자리에 단(壇)을 설치하고 분향하여왔다. 그 후 1969년에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복원하여 이종덕(李種德)을 추가로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堂), 3칸의 목은영당,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색·이곡과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진수당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사청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장소로, 수호사는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목은영당에는 이색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2)문헌서원


주소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10

소개: 문화재 자료 125호

문헌서원은 조선시대 선조 27년(1594년)에 창건된 서원으로 한산 이씨의

유패를 모시고 있다.

고려말의 대학자 이곡과 아들 이색 두 분을 배양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27년

(1594년) 건립되었고 1611년에 사액이 내려진 서원이다.

현재 목은 문집과 가정 문집이 보관되어 있고 영당에는 목은의 초상화가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 가정. 목은 문집 장판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7호) → 1988년건립

문집은 55권, 목판각은 975매 보관

- 이색신도비 (문화재 자료 제127호) → 세종 15년(1433년)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손실되었다가 현종7년(1666년) 후손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다.

비문에 "선생은 후에 득죄하고 폐출되었으나 천지만이 선생의 고결한

심사를 알리라" 라고 기록되었다.

문화재 자료 125호, 이색 신도비 문화재 자료 127호, 목은 영정 보물 1215호,

가정,목은 문집 장판각 77호가 소장되어 있는 문헌서원은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으며 고려말의 대학자인 이곡, 이색 두 분을 배양하기 위해 조선

선조 27년 건립되었고 1011년 사액이 내려진 서원으로 현재 이 서원에

모셔진 6인은 한산 이씨로 이곡, 이색, 이종덕, 이종학, 이개, 이자 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6인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1) 이 곡(1295-1351, 호는 가정)

고려시대 학자, 이자성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인이다. 도평의사사

로서 충숙왕 7년 문과 급제 원나라 제과에 제 2급으로 급제하여 원나라 한림

국사원 검열을 거쳐 취정원관구를 역임하였고 고려에서의 처녀징발을 중지

케 했다.

1344년 도첨의 찬성사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 증수

하고 실록편찬에도 참여 경학의 대가로도 꼽힌다. 시효는 문효이다.

2) 이색 (1328-1396, 호는 목은)

고려시대 문신으로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며 이곡의 아들로 원나라

가서 국자감의 생원으로 생리학을 연구 했다. 향시에서 1등, 회시 1등, 전시

2등으로 한림원에 등용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진흥, 불교의 억제등

정책의 시정개혁을 건의. 1357년 우왕의 요청으로 정당문학, 판상사 등 역임,

1385년 청령위 문제가 일어나자 주화론 주장.

1389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고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케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감국을 주청 이성계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성계가 세력을 잡자 장단으로 유배되고 이듬해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공양왕 3년(1391) 석방되어 한산부울군에 봉해졌으나 1392년 금주로 추방되

었다. 그는 고려말기의 석학으로 정몽주, 길재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리며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을 두고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장단의 임강 서울, 한산의 문헌서원 명해의 단산서원 등에 제향되어 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3) 이종덕(고려시대 문신, 호는 현암)

목은 이색의 아들로 문과에 장원급제, 우왕때 동지 밀직사사를 지냈으며

정조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이조에 입사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신조로 목은의 제자인 정도전과 남은의

사수(死守)에서 비참하게 죽은 선비의 한사람

4) 이종학(1361-1392 공민왕 10년에 태어난 고려시대 문신, 호는 인재)

목은 이색의 아들로 14세에 성균관 관시에 합격, 우왕 2년 문과에 급제

장흥고사가 되었다. 창왕 1년 동지공사를 겸하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아버지와 함께 탄핵받아 파직 되었다가 공양왕 2년 이초의 옥에 관련되어

부자가 투옥, 수재로 풀려 났으나 다시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태조1년 1392년에 그의 나이 32세 권세 있는 신하의 뜻에 내동 되어 목을

매어 죽었다.

5) 이 개 (조선시대 세종때 문신, 호는 백옥헌)

이색의 증손으로 세종 18년 등저 되었다

세종 29년 중시 합격되어 호당에 들었고 청절하며 이름이 높았다. 세조 2년

성삼문,박팽년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고문 끝에 피살 당했다.

6) 이 자 (조선 성종 1년 1480년 출생한 문신, 호는 음해.몽옹,계몽)

대산간 이예견의 아들로 연산군 7년1501년에 사마사를 거쳐 1504년에 식연

문과에 장원, 감찰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

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 난정으로 사직, 1506년 중조반정으로 다시 벼슬에

올라 교리를 지내고 중종 9년 사간으로서 사가독서를 했다. 그 후 부재학을

거쳐 중종 13년에 종계 변무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우참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파직되고 충북음성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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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서원(文獻書院)에 대한 기


 옛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적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왕업을 협찬하였는데, 백이(伯夷)는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고, 광무제(光武帝)가 천명을 받을 적에 경감(耿?)과 가복(賈復)은 공훈을 세웠는데, 자릉(子陵)은 창파(滄波)에서 낚시질만 하였다.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뜻만 지키거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거나 하여, 선비가 각각 뜻이 다른 것이니, 어찌 한 가지 관례로만 보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고죽(孤竹)의 청풍(淸風)은 십란(十亂)을 능가하기에 손색이 없고, 동강(桐江)의 기절(奇節)은 운대(雲臺)의 공신(功臣)을 능가하여 광채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 은자(隱者)가 도리어 드러나고, 달자(達者)가 도리어 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은현(隱顯)과 궁달(窮達)은 몸에만 관계될 뿐, 이름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그 모두가 하늘에 관계될 뿐이요 몸과 이름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늘의 뜻은 마치 주(周) 나라 조정에 풍절(風節)을 수립한 이는 반드시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이고, 지존(至尊)을 오시(傲視)하여 두려움이 없는 이는 반드시 미천하던 때의 친구인지라,그러므로 주(周)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누워서 성상(星象)을 움직이어, 그 의리를 수립하고 그 고상한 뜻을 성취함으로써 비록 전조(前朝)에 절의(節義)를 바쳤다고는 하나, 실상은 또한 신국(新國)에 교훈을 내린 것이라고 한 듯하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들의 풍도를 들은 이로서 마치 유장(劉?) 이로(二老)의 의리당고(黨錮) 제현(諸賢)의 절의와 같은 경우는 모두 소종래(所從來)가 있어,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의 빼칠 수 없는 공고한 기반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혹 은(隱)하거나 현(顯)하여 자취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덕(德)을 수립하여 후세에 전해서 똑같이 국가를 유익하게 한 것은 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경우야말로 의당 십륜(十倫)의 서열에서 두번째에 위치하고, 오사(五祀)에 짝하여 아름다움을 나란히 해야 할 터인데, 서학(西學)에 자리하여 영화를 누리고 보답을 받는 데에 대하여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성조(聖祖)께서 천명에 응하여 도록(圖?)을 장악함으로써 요(堯) 임금은 선위(禪位)하고 순(舜) 임금은 전해받았는데, 그 때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색))의 호) 이공(李公)이 있었으니, 그가 천승(千乘)의 군주에게 길이 읍(揖)하고 영원히 떠나 버린 것은 옛 친구가 왕의 배 위에 발을 얹은 것과 같은 고상함이요, 한 번 죽는 것을 마치 헌신짝 벗어 버리듯이 한 것은 상(商) 나라의 유로(遺老)가 굶어 죽은 것과 같은 의리인 것이다.
조선(朝鮮)은 열사(烈士)가 많다고 호칭하는바, 무릇 큰 위난(危難)이 있을 적에는 선비로서는 대부분 웅어(熊魚)를 취사(取舍)하는 분별을 알아서 매양 의리를 지키어 만사를 불고(不顧)했던 것이 바로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던가. 그렇다면 의당 그 덕을 수립하고 교훈을 내린 공으로 말할 때 고인(古人)에 견주어 누가 더 중(重)하고 경(輕)하겠는가?
지금 보록(譜錄)을 상고하건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 문효공(文孝公)이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을 낳았고, 목은 문정공이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의 호)을 낳았으며, 또 오대(五代)에 이르러 음애공(陰崖公 이자(李?)의 호)이 탄생하여, 대가 장덕(大家長德)이 보록에 끊이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한산(韓山)에는 군자가 많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로다.
목은의 묘(墓)가 한산군(韓山郡) 서쪽 기린산(麒麟山) 아래에 있는데, 상서(尙書) 이성중(李誠中)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을 때에 그 묘 밑에 사당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 난리통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현재 사대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후손들 가운데 각각 그 선덕(先德)을 잇고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한 이로서 즉 좌의정공(左議政公) 덕형(德馨)과 이부 우시랑공(吏部右侍郞公) 덕형(德泂(형))이 서로 이 폐해진 사당을 일으켜 중신(重新)시키기를 꾀하여 군의 서쪽에 있는 구택(舊宅)의 터에다 옮겨 세웠다.그리고 이에 가정공은 서열이 높고 목은공은 덕이 높은 관계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하여 각각 그 높은 것을 오로지 하였고, 인재공과 음애공은 또한 그 서업(緖業)을 계승한 관계로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부자(父子)와 후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더욱 드러나 덕행과 문장이 이에 절로 가전지물(家傳之物)이 되어서 열매를 이루고 꽃을 피웠으니, 누가 그 집안과 높낮이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원이 이미 건립되자, 이 시랑(李侍郞)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범 무자(范武子)는 세록(世祿)을 썩지 않는 업적이라고 말했다가 목숙(穆叔)에게 기롱을 받았으나, 지금 이와 같은 유는 참으로 썩지 않는 것이라 하겠네. 내가 또한 자네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지금 자네 두 사람은 능히 조묘(祖廟)를 일신시켰으니,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의리를 잘 알았다고 하겠네. 비록 그러하나 전대(前代)에 광영을 입혀서 조선(祖先)을 드러내는 일이 이것만으로 다 될 수 있겠는가. 후손으로서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 죽어서 이 당(堂)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를 명하여 조선을 욕되게 했다고 할 것이니, 나는 그것을 취하지 않노라.”
하니, 시랑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감히 해내지는 못할지라도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 바이다.


 

[주D-001]경감(耿?)과 가복(賈復) : 경감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고,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건위대장(建威大將)이 되고 호치후(好?侯)에 봉해졌다.가복은 역시 광무제를 따라서 여러 적들을 격파하여 도호장군(都護將軍)이 되고 교동후(膠東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十八, 卷十九》
[주D-002]자릉(子陵) : 후한 광무제와 젊었을 때의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인데,광무제가 등극(登極)한 뒤에는 엄광이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제수를 극력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면서 평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주D-003]고죽(孤竹) : 여기서는 은(殷)나라 말기에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던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주D-004]십란(十亂) : 주 무왕(周武王)을 보필하던 10인의 훌륭한 신하, 즉 주공 단(周公旦)ㆍ소공 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ㆍ문모(文母)를 말하는데, 문모는 읍강(邑姜 무왕의 후비임)의 잘못이라고 한다. 《書經 泰誓中》
[주D-005]동강(桐江) : 여기서는 후한 때 동강에서 낚시질하며 은거하였던 엄광(嚴光)을 가리킨다.
[주D-006]주(周)나라의 …… 않고 : 상(商)나라가 멸망하고 주 무왕(周武王)이 천자가 되었을 때, 백이(伯夷)가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7]누워서 …… 움직이어 : 후한 광무제가 등극한 후에 젊었을 때의 학우(學友)인 엄광(嚴光)을 가까스로 찾아서 맞이해다가 관사(館舍)를 정하여 접대할 적에, 하루는 광무제가 친히 그 관사로 엄광을 만나러 갔는데, 엄광은 누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므로, 광무제가 그의 뜻을 꺾지 못하여 그대로 돌아왔었다.그 후에는 또 광무제가 엄광을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여서 수일 동안 옛 이야기를 나누었던바, 이 때 함께 누웠던 엄광이 광무제의 배[腹] 위에 발을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태사(太史)가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매우 급박하게 범했다고 아뢰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짐(朕)의 친구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三》
[주D-008]유장(劉?) …… 의리 : 주(周)나라를 높인 의리를 이른다.유장은 주나라의 경사(卿士)인 유 문공(劉文公)과 주나라의 대부(大夫)로서 유 문공을 섬겼던 장홍(?弘)을 합칭한 말이다. 유 문공은 진(晉)나라의 범씨(范氏)와 친하여 대대로 혼인(婚姻)을 하였고, 장홍은 유 문공을 섬기었으므로 주(周)나라에서 범씨와 가까이 지냈는데, 진(晉)나라의 조앙(趙?)이 주나라와 범씨가 친하게 지낸 것을 책망하자, 이를 두려워한 주나라 사람이 마침내 장홍을 죽였었다. 《左傳 哀公三年》
[주D-009]당고(黨錮) 제현(諸賢) : 당고는 곧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금고(禁錮)를 당한 것을 이른다. 제현은 곧 후한(後漢)의 환제(桓帝)ㆍ영제(靈帝) 연간에 환관(宦官)들의 발호를 태학생(太學生)들을 거느리고 환관들을 공격했던 이응(李膺)ㆍ진번(陳蕃)ㆍ두무(竇武) 등 우국지사들을 가리키는데, 이 때에 이들은 환관들로부터 도리어 당인으로 지목되어 수많은 사람이 피살되었다.
[주D-010]십륜(十倫) : 제사를 지내어 나타내는 열 가지의 윤리를 말한 것으로, 즉 첫째는 귀신(鬼神) 섬기는 도리를 나타내는 것, 둘째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나타내는 것,셋째는 부자(父子)의 윤리를 나타내는 것, 넷재는 귀천(貴賤)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다섯재는 친소(親疎)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여섯째는 작상(爵賞)의 시행을 나타내는 것, 일곱째는 부부(夫婦)의 분별을 나타내는 것, 여덟째는 정사(政事)의 균평함을 나타내는 것, 아홉째는 장유(長幼)의 차서를 나타내는 것, 열째는 상하(上下)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禮記 祭統》
[주D-011]오사(五祀) : 옛날에 성왕(聖王)이 다섯 가지 훌륭한 신령(神靈)에게 제사 지냈던 것을 이른다. 즉 생전에 선정 양법(善政良法)을 인민(人民)에게 베푼 사람을 제사 지내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일에 힘쓴 사람을 제사 지내며, 노고로써 국가를 안정시킨 사람을 제사 지내고, 큰 재해(災害)를 예방하고 구출해 낸 사람을 제사 지내며, 큰 환난(患難)을 막아낸 사람을 제사 지낸다는 다섯 가지이다. 《禮記 祭法》
[주D-012]서학(西學) : 주(周)나라 시대의 소학(小學)을 이르는데, 《禮記》 제의(祭義)에 “서학에서 선현을 제사 지낸다[祀先賢於西學].” 하였다. 여기서는 바로 서원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3]웅어(熊漁) : 웅은 진미로 유명한 웅장(熊掌)을 이른다. 맹자가 이르기를 “물고기는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사는 것[生]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고, 의리[義]도 내가 좋아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古子上》
[주D-014]범 무자(范武子)는 …… 받았으나 : 목숙(穆叔)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의 시호이다. 일찍이 진(晉)나라 범 선자(范宣子)가 숙손표를 맞이하여 대화(對話)하는 가운데 자기 조상들의 세록(世祿)은 썩지 않는 귀중한 업적이라고 자랑했으나, 숙손표가 이를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그리고 여기서 말한 범 무자는 바로 범 선자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左傳 襄公二十四年》           
 
                                                                                                    - 백사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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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이 이미 창건되었는데, 모든 유생이 가(稼) 가정(稼亭) 이곡(李穀)ㆍ목(牧)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의 좌차(坐次)가 나란히 되는 것을 의심하여 서울에 있는 자손 이덕형(李德泂)에게 묻고 학식이 높은 여러 선비에게 물었더니 모두 결정하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물었더니, 항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오기량(吳紀亮)의 아들 즐(?) 부자가 함께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조회 때에는 늘 임금이 운모 병풍(雲母屛風)을 주어 사이에 치고 따로 앉았으니, 이제는 장자(樟子)를 사이에 치고 격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그 말을 따라 장자를 치고 앉게 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閒話)》
목은의 화상이 문헌서원에 있었는데, 권근(權近)이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쓰기를, “영락 갑오 9월 하한(下澣) 문인 권근 기(記)”라 하였다. 덕산(德山)에 있는 이씨의 옛집에 또 목은의 영당이 있었는데, 그 기문에 정덕(正德) 갑술이라 하였다. 화상이 처음에 두 벌 있었는데, 그 중 한 벌은 치관(?冠)을 쓰고 서대(犀帶)를 띠며,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수염이 반백인 것은 지금서원의 소장본이 그것이다. 영당본은 그것으로부터 전해온 것이며, 한 벌은 야인(野人)의 복색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본은 임진병란에 잃어 버렸는데, 뒤에 일본으로 사신 갔던 자가 얻어 왔다. 일본의 노인이 주면서, “이것은 옛날의 귀인 도화(貴人圖?)”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자손에게 주었는데, 타국으로 돌아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깁[生?]이 찢어져서 그 아래 절반이 없어졌다. 자손이 두 벌을 모사(模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의 집에 봉안하고, 한 벌은 구본과 아울러 문헌 사당에 봉안하였다. 《미수기언(眉?記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