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면
모두 10행이 있으며 각 행마다 41자가 새겨져있습니다.
제 9행과 10행의 윗부분은 당초부터 자연풍화로 인한 손상이 있어서
당초 이 부분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고
이 결과 제 9행에는 34자,
제 10행에는 25자의 글자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총 글자수는 387자..
2-1, 2면 1행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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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면 2행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림성, ***, ***,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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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면 3행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증*성, **노성, 구천성, ****,를 공취하고, 나라의 국성을 *하였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영락 6년 병진년에)백제가 의로써 복종을 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전투를 할려고 하니,
왕이 위엄을 갖추고 노여움으로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阿利水는 한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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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면 4행
歸穴 就便圍城 而**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 以後 永爲奴客
(백제의 군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성을 포위하니 백제의 왕이 곤경에 빠져
남녀 일천명과, 가는베 천필을 바치며, 무릅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길
이제부터 따르겠습니다 하니 영원히 노객으로 간주하였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而殘主을 百殘王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奴客는 귀족 신분으로 신하가 왕에게 자신을 일컬을 때 쓴 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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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면 5행
太王恩赦始(=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이에) 대왕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미혹하여 저지른 허물을 용서하고
후에 그가 공손한 성의를 다 할것인지를 지켜보겠다고 하셨다.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그리하여) 58개성과 700촌을 얻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 명과 함께 서울로 돌아 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이런 행동에 백제의 아신왕은 위기감을 크게 느껴
해상으로 연결되어있던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남침을 견재할 생각을 하고
영락7년(397년) 5월에 태자 전지(典支)를 왜로 보내 군사를 빌려오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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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면 6행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영락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토곡에 보내 관찰 순시하도록 하였다.
그 기회에 막*라성과 가태라성에서 남녀 3백여명을 잡아왔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조공하고 국사를 의논하였다
[무술년은 398년
偏師는 전체 군대 중의 일부분을 말하며
일본학자 武田辛男은 帛자를 肅자로 보았고
이후 나오는 일을 숙신(말갈)과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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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면 7행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기해년 9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시하였다.
이에 신라가 사신 백왕을 보내어 왕에게 말하길,
"왜인이 나라 도처에 널려 성과 못이 못쓰게되니,
노객(신라왕=내물왕)은 (왕의)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부디 왕께서 돌아와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와 그 충성스런 정성을 불쌍히 여기어,
사신을 파견하여 **로써 돌아올 것을 알렸다
[己亥년은 399년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복수하려고 전국에서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니
백성들이 이 고역에 못이겨 신라로 많이 달았났다고 합니다.
이에 백제는 호구가 크게 감소할 지경에 이르자
왜로 하여금 신라를 먼저 침공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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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면 8행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영락10년 경자년에 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물러갔다
[경자년 10년은 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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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면 9행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이에 )왜의 배후를 추격하여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이 곧 복속하였고 이에 돌아왔다
[이때 요서지방에서는 모용氏의 후연정권이 급격히 약화되어 있어서
광개토대왕은 남벌을 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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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면 10행
十九盡拒隨倭 安羅人戍兵*********************
왜구가 크게 괘멸되자 성안사람 열에 아홉은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신라인으로 성을 지키게 하였다
[일본학자들은 安羅를 아라가라의 다른 명칭으로 임나일본부의 용병이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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