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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판독 1면~11행

천하한량 2007. 8. 3. 03:20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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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에는 11행에 걸쳐서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각행마다 41자의 글씨가 있습니다
6행 마지막 부분에 2글자자 원래 없어서 전체 글씨는 449자 입니다...

이중 25자 정도가 판독이 어렵습니다..

 

1-1, 1면 1행

惟昔始祖 鄒牟王之 創基也出 自北夫餘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주몽(朱蒙)의 이름은 추모(鄒牟)라고 했고, 또한 중해(衆解)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왕호(王號)로는 동명성왕(東明聖王) , 추모왕(鄒牟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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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昔始祖鄒牟'....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의 일면 일행의 첫 문귀입니다......

 

天帝之子 母河伯女 郞剖卵降 世(=出)生而(=子)有聖*(=德)** **命駕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성스러운 *****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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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에는 '而'자 보다는 분명 '子'자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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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면 2행

巡車(=幸)南下 路由夫餘 奄利大水 王臨津言曰

(추모왕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염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왕께서 나룻터에 이르러서 말하시길..

[고려때 발행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과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이 염리수가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딸이 어머니인 추모왕이다

爲我連浮龜 應聲卽爲 連浮霞龜然後造渡,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띄워 (다리를 만들어)라.....

(왕의 말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라

이에 강을 건너갈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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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면 3행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그리하여 (왕은) 비류곡 홀본지방 서쪽의 산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웠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그러나 추모왕은) 인간세상의 왕이라는 직책을 별 달가워하지 않아

(뒤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시니 하늘에서는)

황룡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王於忽本東罔黃(=履)龍頁(=首,負)昇天.

왕께서는 홀본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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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도 黃 ...頁으로 보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명성왕 19년(서기전 19년),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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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면 4행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유훈(遺訓)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치국지도(治國之道)로써 나라를 다스려 일으키셨다

[우리가 유리왕이라고 부르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을 말합니다]

大朱留王紹承基業

대주류왕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계속 발전시키었다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어 (주몽의) 17세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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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면 5행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治于皇天 武威被四海

(대왕께서는) 18세에 즉위하여 존호(尊號)를 영락대왕이라 하였고

그 은혜로움과 혜택은 하늘에까지 이르렀고

대왕의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떨쳤다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대왕께서는) * *을 제거하여 여러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케 하였으며

나라는 부유해졌고 백성은 넉넉해 졌으며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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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자 량희(榮희)는 **을 구이(九夷)족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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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면 6행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그러나 하늘이 (대왕을) 돌보지않아 3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편

 광개토대왕 22년(412)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갑인년 9월29일 을유일에 산릉에 옮겨 모시고

이에 비석을 세워 (대왕의) 훈공과 업적을 새겨 놓음으로써 후세에 보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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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면 7행

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 *人 躬率往討

영락5년 을미년에 대왕께서는 비려가 *사람을 *하지않자

대왕께서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토벌하였다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은 * *을 不歸로 보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이 문장을 다시 해석해보면

 "대왕께서는 비려인들이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려(稗麗)는 거란의 한 분파 민족으로 태자하 상류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 1년(391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의 최초 정복사업은 거란의 정복이었습니다.]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丘)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부산을 지나 산을 등지고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과

6,7백영(營)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부산(富山)은 당시 현도군과 고구려 중간에 위치했던 산으로써

 지금의 우무려산이라고 합니다

 부산(負山)은 지금의 노노루산이라고 합니다.

 이 2산에 대한 명칭은 고구려군이 이들 산을 보고 붙인거라고 하는군요.

 즉, 富山은 숲이 울창한 산이고, 負山은 富山 근처에 있는 헐벗은 산이었다고 합니다.

 염수(鹽水)가 어디였나를 두고 아직도 학설이 분분하나

 시라무렌강 중,상류쯤에 있던 초원지대라고 보는 것이 요즘 통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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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자와 丘자가 획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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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면 8행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이에 수레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에 이르렀다

[양평(襄平)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

 역성은 요동군에 있었던 성입니다.

 북풍은 지금의 통화일대...

 즉, 이때 광개토대왕이 거란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 루트는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 루트로써 당시 이 국경선 서쪽에는 후연이 있었는데

 이 루트로 개선한 이유는 다분히 후연을 의식한 행위였다고 합니다]

王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왕이 *을 준비 시키고, 경치를 즐기며, 사냥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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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면 9행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써 조공을 하여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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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 *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을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혹은
왜가 백제(의 꼬드김으로) 인해 도래하자 (고구려는)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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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은 광개토대왕 원년인 391년입니다

 

 위당 정인보선생은“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목적어에 해당하는 왜(倭)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나라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가 되게 되는거죠

 김병기 교수는 ‘渡海破’가  ‘入貢于’의 조작 변조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해석은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신라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야합니다.

 김교수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 글자체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획이 거의 직선으로 된 것인데,

‘渡’자 마지막 두획은 오늘날 흔히 쓰는 해서체에서처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는 모양이고

‘海’자의 경우도  ‘母’ 부분의 세로 획이 모두 왼쪽 방향으로 기울져 있으며

‘破’자도 ‘石’의 두 번째 획이

 직선 획을 사용하는 광개토대왕비 서체에 어긋나는 해서체이고,

‘石’자와 ‘皮’자의 높이가 비문의 다른 ‘破’자와 다르다고 합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육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백제를 쳤다

[광개토대왕 6년 병신년이면 396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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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1면 10행

軍**首 攻取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군이 * *하여, 영팔성, 구모노성, 각모노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노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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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면 11행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

* *城 *而耶羅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막야라성, 혈**,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

 

 

 

 

 

중국의 고구려史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70여 년 전에 찍은 광개토대왕비 사진이 발굴됐다. 「韓國古書會(한국고서회)」 金時漢(김시한·74) 회장이 공개한 이 사진은 1931년 일본 平凡社에서 발간한 「書道全集」 제6권에 실려 있다. 「書道全集」은 한국·중국·일본의 옛 碑文과 서예 작품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2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건립했다. 높이 6.39m, 너비 1.5m, 두께 1.53m의 四面石碑(사면석비)이다. 일명 「好太王碑(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필체는 隸書體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글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字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字이다. 『辛卯年에 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攻破하여 臣民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辛卯年 기사는 韓日 간 쟁점이 되어 왔다.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경 중국 길림성 集安에서 발견되었으며, 1927년경 2층으로 碑閣이 만들어졌다. 사진 속의 광개토대왕비는 192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비각은 1980년대에 새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