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염
1907년,강소성 서주에서 태어난 이가염은 이른 나이에 서법(書法)과 산수화를 배웠다 이때 이가염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문인화는 물론 청대 초기의 산수화를 임모(臨摸,그림의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리는 행위)
하며 배웠다고 한다 이가염은 이후 16세 때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접하게 된다 재학 중에 이가염은 청말의 대유(大儒)인 강유위(康有爲)의 강연을 듣고 중서융합(中西融合) 등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는다. 1929년 22살의 이가염은 서호국립예술원에 입학한다. 당시 교장인 임봉면(林鳳眠)은 서비홍(徐悲鴻)과 더불어
새로운 서양화법의 중심인물이었다.
이곳에서 이가염은 프랑스 화가 앙드레 클로드(Andre Claudot)의 지도를 받게 된다. 이가염이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었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물론 독일 표현주의와 마티스 등의 모더니즘도
이 당시에 알게 되었으며 렘브란트 등의 화집 등에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가염은 이 무렵부터 전통 사의화(寫意畵)를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중일 전쟁으로 인하여 항일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1939년 그의 나이 32세에 중경에서 항전미술선전 활동에 참여한다. 1946년 서비홍의 추천을 받아 북평국립예전의 강사로 부임하고 이듬해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제백석과 황빈홍(1864-1955), 두 거장을 만나 뵙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이가염은 '以最大的功力打進去, 以最大的勇氣打出來' 최대의 힘으로 깨쳐 들어가 큰 용기로써 깨쳐 나오자라는 구호를
벽에 붙여놓고 범관,이당,황공망,왕몽,석계.석도,팔대산인,공현 등
여덟 명의 화가를 선별하여 탐구하고 있었다. 전통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과거의 대가들이 이룩한 그림들을 철저하게 숙지하는 것을 최초의 과제로 삼은 셈이었다 이러는 와중에 나온 이가염의 초기 작품들을 보자
'倣八大山人'(방팔대산인,1944년 作)은 팔대산인의 산수화를 모방하여 그린 것이다. 전통문인화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松下觀瀑圖'(송하관폭도,1943년 作)는 전형적인 화제(畵題)에 의한
정형화된 동양 산수화이다.
이어지는 '放鶴圖'(방학도,1945년 作)도 문인화 풍의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 담겨있는 이가염의 필법은 전통화의 모든 기법에 거의 숙달하였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전통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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