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NOTES...
-
-
-
- :::: Long Long Time ::::
-
- 그룹 스톤 포니즈(Stone Poneys)를 결성하여 3장의 앨범을 출반하며 활동하다가 그룹이 해산되고 1968년 솔로로 독립한 론스태트(Linda Ronstadt)가 1970년 솔로 데뷔앨범으로 발표한 「Silk Purse」에 삽입된 <Long Long Time>은 싱글 커트되어 25위까지 올라 그녀의 최초 솔로 히트곡이 된 곡이며 이 곡이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1970년 그래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다. 이 노래 단 한곡으로 린다는 스타덤에 올랐던 것이다.
-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가사의 슬픔이 그대로 베어나오는 듯한 린다의 호소력있는 목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반주가 한데 어우러진 컨트리 발라드 풍의 이 곡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취향과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며, 우울할 때 이 노래를 들으면 노래에 푹빠져 정말 눈물이 날 정도의 노래이다.
- <Long Long Time>의 작곡자는 'Gary White' 로 그는 앨범의 다른 노래에서 린다와 함께 듀엣으로 나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 그녀의 히트곡들로는 이밖에도 <You're only Lonely>, <Just on Look>, <It's So Easy>, <Somewhere Out There>등이 있다.
-
-
- :::: The Story of Linda Ronstadt ::::
-
- [Part-I]
- 1946년 7월 15일에 미국 아리조나주 턱슨 시티에서 태어난 린다 론스태트(Linda Ronstadt)는, 1964년에 가수에의 꿈을 안고 로스엔젤레스로 진출했다. 여기서 친구 밥 킴멜(Bob Kimmel)과 로스엔젤레스의 뮤지션 킨 에드워즈(Ken Edwards)와 함께 스톤 포니스(Stone Poneys)라는 자신의 그룹을 결성하고, 1966년에 캐피탈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데뷰 앨범 「Stone Pones」와 「Evergree」,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별 성과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세번째 앨범 「Stoney Ends」를 발표하고, 싱글 <Different Drum>이 크게 히트되면서 대중들에게 린다 론스태트를 성공의 길로 인도한 이 <Different Drum>은 그룹 몽키스(Monkess)의 마이크 네스미스가 작곡한 곡으로,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했던 곡이다. 세장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린다 론스태트는 스톤 포니스를 떠나 솔로로 전향해, 1969년에 그녀의 첫 솔로 앨범 「Hard Slown Home Grown」을 발표하였으며, 1970년에는 「Silk Purse」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 삽입된 <Long Long Time>은 그해 그래미 후보에 오를 정도로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그 뒤 세번째 솔로 앨범인 「Linda Ronstadt」를 레코딩할 때는 글렌 후레이와 돈 헨리와 함께 새로운 백 밴드를 결성해 녹음에 들어갔다. 이 백 밴드는 후에 미국을 대표하는 컨츄리 록 밴드로 각광을 받던 "Eagles"가 되었다.
1973년에 린다 론스태트는 캐피탈 레코드사에서 아사일럼 레코드 회사로 이적하고,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피터 애셔(Peter Asher)의 도움으로 앨범 「Don't Cry Now」를 발표했으며, 1974년에는 다시 캐피탈 레코드사에서 「Heart Like A Wheel」을 발매해, 이 앨범에 <You're No Good>이 히트하여 미국 챠트 넘버 원에 올랐으며, 앨범은 플래티늄을 기록했다. 또한 이 앨범에 수록된 싱글 <I Can't Help It, If I Still In Love With You>로 다음 해인 1975년에 그래미상 컨츄리 부문 최고 여성 보컬리스트로 뽑히기도 했다. 1976년에 발표했던 앨범 「Hasten Down The Wind」와 1975년에 발매한 앨범 「Prisoner In Disquise」는 모두 플래티늄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Hasten Down The Wind」는 다시 한번 그래미상 팝 부문 최고 여성 보컬리스트상을 수상하게 했다. 아버지가 컨츄리 계통의 기타리스트로, 어린 시절부터 컨츄리나 포크뮤직을 들으면서 자란 린다 론스태트는 어느 한군데 치우치지 않은 방대한 음악 실력을 쌓을 수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록 보컬 리스트로 부각된 린다 론스태트는 1977년에 발표한 앨범 「Simple Dreams」에서는 <Bule Bayou>, <It's So Easy>, <Poor Poor Pitiful Me>, <Tumbling Dice>, <I Never Will Marry> 등 한 앨범에서 다섯 곡의 히트 싱글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앨범 중에서 최고의 앨범이 되었다. 1976년에 발표한 앨범 「Living In The U. S. A」를 출반했는데, 이때부터 린다 론스태트는 순수 컨츄리 음악 뿐만 아니라, 변화된 음악을 들려 주기 시작했는데, 1980년에 발표한 「Mad Love」에서는 뉴 웨이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의 곡을 세 곡이나 포함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는 종전과 다른 스타일의 로큰롤과 전자 사운드를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해 내고 있는데, 가끔 복잡한 사생활로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70년대를 이어 8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가장 미국적인 여성 록 보컬리스트로 발돋움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1982년 7월부터는 렉스 스미스와 함께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작품인 『팬젼스의 해적들』이란 타이틀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 [ From Samhomusic.com ]
-
- [Part-II]
- 팝계는 흥분과 격동의 60년대를 마감하고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린다 론스태드라는 뛰어난 여가수의 출현을 알린다. 70년대 초반 팝 음악은 불과 몇 해 전의 파워풀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른 '차분한' 기조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린다 론스태드는 이러한 소프트록과 '70년대식'포크의 상징이었다. 그의 인기는 70년대 중반부터 폭발해 이후부터 여가수 가운데 최고, 남자가수를 합쳐도 톱클래스라는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슈퍼스타의 지위는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린다의 이름은 70, 80년대를 걸쳐 인지도가 가히 최고급으로 불멸의 애청곡 '아주 오랫동안(Long, Long Time)' 하나만으로 기억하기 충분하고 '사랑에 빠지긴 너무 쉬워(It's So Easy)'. '당신은 나빠요(You're No Good)'등도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다. 이십대 팝 팬들은 90년대를 강타한 수작 '많이는 몰라요(Don't Know Much)'로 린다의 존재를 숙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린다에게서 우선 발견되는 유별난 특성은 가히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이다. 1967년에 팝계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활동 경력이 어느덧 사반세기를 넘겼다. 이처럼 롱런하는 동안 눈에 띄는 슬럼프를 경험함이 없이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인기만 유지한 것이 아니라 여가수 중 드물게 가창력은 물론 앨범으로서 음악성을 인정받아 '실력을 갖춘 여가수'라는 희소가치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말이 사반세기이지 그 기간 동안 팝 음악의 유행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랴. 너무나도 쉽게 변해버리는 팝음악의 조류를 쫓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린다는 이것을 거뜬히 해냈으며 바로 이 점이 그를 무수한 팝가수 가운데 우뚝 서게 해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영원한 인기를 보장해준 밑거름은 출생부터 딸려나온, 거의 천재적인 '유행의 포착능력'이었다. 그는 유행을 미리 내다볼 줄 알았다. 록 음악의 시대에는 남자 못지않게 록을 소화했고 유행이 컨츄리 음악 쪽이겠다 싶으면 지체없이 컨츄리를 노래했으며, 펑크가 거세질 때는 펑크를 음반에 담았다. 옛날 고리짝 시절의 스탠다드 팝을 선보여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맞추어 나갔고 멕시코 가요 음반을 내놓기도 했고 블루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미국의 팝 음악이 역사에 걸쳐 생성시킨 그 무수한 장르 가운데 린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장르는 없다! 90년대 그는 AP통신의 앤 피터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난 노래 스타일이 어찌됐든 단지 노래를 계속 해야 한다”며 “현재의 캐리어에 그냥 머물러 앉는 것은 양에 차지 않는다”고 밝혔다.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능력이 닿는다면, 시대가 그 스타일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시도하겠다는 얘기다. 장하다고 칭찬해 줄 만한 바로 이 점이 정반대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가 데뷔이래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을 쭉 분석하면 그것은 영락없는 '카멜레온'의 음악행각이다. 하나의 고정 장르를 오랜 기간 고집스럽게 밀고나간 족적이 없다. 변덕스럽기 작이 없다. 스타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다른 시점에서 보면 그 만큼 대중의 감각에 철저히 '영합'했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유행의 흐름을 파도라 한다면 그는 실로 '파도타기의 명수'였다. 60년대말 록의 '저항'물결이 쇠락하면서 70년대가 소프트 록의 시대가 될 것을 간파한 그는 즉각 '보수적 신념'을 내비쳤다. 에벌리 브라더즈 또는 버디 할리의 컨츄리풍 록넘버를 리메이크해 '복고'의 기치를 드높였고, 60년대 록 스타들이 미국정부에 대해 도전한 것과 같은 공격성에 넌더리를 치며 “이 나라에 실질적인 애국심의 부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0년대 초 린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위한 선거 캠페인을 끝낸 뒤 이렇게 말했다. “난 사실 그때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누구든 알겠는가. 만약 누군가 그것을 결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면 기업 '스탠다드 오일'은 대통령이 안될 게 뭐 있는가. 기업이 사실 득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스탠다드 오일에 만약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다국적 대기업이 국가를 통치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당신들은 말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기업을 필요로 하고 그 기업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기업으로부터 직장을 얻고 있다. 그 기업이 이 나라와 나머지 전세계 국가의 경제상황에 무엇이 유리한가를 결정하는, 더 바람직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체제에 회의를 품지 말고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미국체제의 근간인 경제적 과두제, 대기업에 의한 경제운용, 그리고 기업이익 추구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 시점부터 린다는 '미국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 비판을 하나의 기조로 하는 록 뮤직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스타들과는 달리 의미있는 노랫말과는 결별했다. <뉴스위크>지는 77년 2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린다는 상승추세의 록 무대 활동기간 중 록성좌들의 '붉은 거성'과 '블랙 홀'을 피했다”며 그를 운좋고 조심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했다. 저항적 색채 또는 정치색에 물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보수성은 간혹 이중적 자세를 엿보이게 했다. 린다는 70년대말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 사회저항적인 펑크 록의 움직임이 확산될 무렵 보수적 색깔을 드러내 “펑크는 변비가 심해 '치질'의 록이라 불러야 한다”며 욕설조로 펑크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런데 펑크의 기세가 거대한 물결을 야기시키며 팝과 록의 여러 장르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듯 펑크의 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78년 펑크의 거목 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 '앨리슨(Alison)'을 부른 것을 필두로 80년도 음반 <광기의 사랑(Mad Love)>에는 펑크적 분위기를 적극 살려 스파이크 헤어스타일을 한 린다가 자켓에 등장했으며 코스텔로의 노래를 '파티여자(Party Girl)', '여자들의 말(Girl's Talk)' 등 두 곡이나 수록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처크 베리, 엘비스 프레슬리, 스모키 로빈슨 등 옛곡을 재해석하는 '복고적 성향'을 잊지는 않았다. 외적으로는 최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구식'을 고수하는 이 자세야말로 린다의 전형적인 대중접근 수법이자 그의 진정한 색깔이기도 하다(70년대 린다의 히트곡 대다수가 옛노래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점은 특기할 사항이다). 80년대 들어서도 린다는 시대적 특성을 정확히 읽었다. 때는 바야흐로 레이건의 보수 시대였다. 그는 지금껏 줄기차게 구사해왔던 록 뮤직을 걷어치워버리고 83년 스탠다드 넘버로 채색한 음반 <무엇이 새로운가(What's New)>를 발표했다. 스탠다드 넘버란 40년대 이전까지 유행한 상류계층의 노래로 향수어린 이지 리스닝을 연상하면 되는데, 린다의 음반 가운데에선 가장 보수적인 색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넬슨 리들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제작한 이 앨범은 <타임>지 선정 그 해 팝음반 베스트 10의 하나였다. 이 작품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자 린다는 84년 다시 한번 넬슨 리들과 손잡고 <돌진하는 삶(Rush Life)>을 내놓았고, 이후 87년에는 멕시코 전통가요로 꾸민 <아버지의 노래(Canciones de Mi Padre)>를, 88년에는 컨츄리 스타인 돌리 파튼, 에밀루 해리스와 노래한 <트리오(Trio)>를 각각 출반했다. 이런 유형의 작품들은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린다의 시도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여하튼 그는 레이건 통치 8년간 단 한 번도 록 뮤직 또는 파워풀한 음악과 재회함 없이 부드러운 노래로 일관했다. 린다의 보수성은 가정환경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1964년 미국 애리조나주 턱슨에서 태어난 그의 가정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린다에게는 어렸을 적에 벌써 조랑말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과학 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을 소유한 인텔리였고, 아버지는 턱슨에서 대규모 하드웨어사업을 경영했다. '자본과 기술'이 제휴된 부르조아 부모 덕분에 린다는 전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다. 대다수 록스타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린다의 소녀시절과 사춘기는 여느 록스타들처럼 도발적 끼가 넘쳐흘렀다. 여고시절에 그가 펼친 상상 가운데 하나는 '목사를 유혹하는 것'이었고, 아리조나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를 수료한 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결혼하거나 수녀가 되는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하겠다는 제 3의 길을 택할 만큼 대담했다. 그는 스스로 그 시절의 자기를 '사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남성 지배의 록 세계로 뛰어든 것 자체가 용기였고 공연을 다니면서 남자의 세계에 깊이 동화될 정도로 순종적 자세를 거부했다(“난 공연을 다니면서 남성적 태도를 배웠다. 록큰롤의 실질적 자세를 말이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내 말버릇은 마치 트럭 운전사와 같았다”). 그는 나이 50세가 되어가는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간 제이 디 사우더, 돈 헨리, 믹 재거, 그리고 캘리포니아 시장 제리 브라운과 열애하거나 동거하기도 했지만 관계를 오래 끌지 않았다. 77년에는 '난 결혼하지 않으리(I Never Will Marry)'라는 곡을 내놓아 독신을 공식선언한 바도 있다. 부잣집 딸이, 게다가 용모까지 아름다운 여자가 사서 고생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린다가 반항적 기질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성년기의 린다는 상층사회의 흐름에 거역치 않는 타협적, 보수적 자세로 일관해오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음악에 임하는 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무질서로부터 질서의 확립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을 창조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린다가 노래하는 것은 다름아닌 질서와 안정이다. 그는 무질서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현실과 사회에 대한 도전적 자세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 [ From Izm.co.kr ]
-
- ~~~~~~~~~~~~~~~~~~~~~~~~~~~~~~~~~~~~~~~~~~~~~~~~~~~~
-
- *abide : (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체재하다 ( at, in … ) ; (남의 집에) 머물러 있다.
- (古文) (…에) 거주하다 ( at, in… ). (일정한 상태관계를) 지속하다 ( in, with… )
- - Abide with me. 우리집에 묵어요.
- the event that abides in her memory 그녀의 기억에 생생한 그 사건.
- *take … in ( ones ) stride : …을 수월하게 [냉철하게] 해내다.
- *all the while : 그 동안 내내, 시종; (접속사적) … 하는 동안 줄곧.
- *flaws : (성격 등의) 결점, 결함, 흠 ☞ DEFECT 동의어.
- a character flaw 성격상의 결점. - a flaw in ones record 이력상의 결점. - a flaw in an otherwise perfect character
- 그것만 없다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인격상의 흠, 옥의 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