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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서원은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천하한량 2007. 6. 21. 14:38

1.비인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22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183

시 대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이 강했던 고려시대의 탑으로,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하였는데, 특히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목조건축의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을 세워 막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을 기단에서처럼 기둥과 벽을 따로 마련하여 세워 놓았는데,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몸돌 위로는 지붕돌을 얹기 전에 지붕받침을 2단 올려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1층 몸돌의 각 기둥들이 아래로는 기단을 누르고, 위로는 지붕받침을 이고 있어, 마치 신을 신고 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느린 경사를 이룬다. 경사면의 아래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위를 받치듯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 형태의 크고 작은 돌이 겹쳐 얹혀져 있고, 그 위로 네모난 돌이 놓여있다.

 

전체적인 세부양식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따르려 힘을 기울인 흔적은 보이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지붕돌, 1층에 비해 갑자기 줄어든 2층 이상의몸돌 등에 의해 균형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2.건지산성

 

종 목 사적 제6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시 대 삼국시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으로, 내성은 흙으로 쌓았고 외성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쌓았다. 이러한 2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말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는 2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는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부속성으로 방어를 위한 보루로 볼 수 있다. 이 구조 역시 백제식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의 북쪽은 험준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삼았고, 나머지 부분은 흙으로 쌓았으나 심하게 붕괴된 상태이다. 문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성안에 봉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봉서사 서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에서 불탄쌀과 백제의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금강 하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 고려시대 산성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3.봉선리유적

 

종 목 사적 제473호

명 칭 서천봉선리유적(舒川鳳仙里遺蹟)

지 정 일 2006.11.06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581외

시 대 삼국시대

 

서천 봉선리 유적은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마한 · 백제 ·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성격을 가진 유구들이 조사된 유적으로서 금강하류 지역에 위치한 서천지역에서 마한 · 백제시대의 주거지 및 분묘유적이 대규모로 조사된 것은 처음으로 당시 사회문화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사적으로 지정하여 유적의 훼손을 방지하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 · 활용하고자 한다.

 

 

4.이하복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97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

시 대 조선시대

 

명당지에 남서향으로 자리잡은 초가로, 19세기 후반에 안채를 짓고 20세기 초에 사랑채·아래채·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늘려 지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안채와 그 앞쪽으로 一자형의 사랑채, 안채의 왼쪽에 광채가 있어 튼 ㅁ자형 배치를 하였다. 또한 사랑채의 오른쪽에는 2칸 정도 떨어져서 一자형의 아래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된 3칸집이었으나, 후대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 대청과 방·부엌 겸 헛간으로 사용하는 헛청을 덧달았다.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을 내고, 부엌과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아래채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독립적인 공간으로, 부엌과 방 2개, 광으로 구성되어 살림을 따로 하게 되어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로, 전통기법에 따라 안채의 앞쪽지붕이 뒷쪽보다 길게 처리된 것이 흥미롭고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준 점이 특이하다.

 

5.이상재선생 생가지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84호

지 정 일 1990.12.31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외 4필

시 대 일제강점기

 

조선 후기 사회 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이상재는 종교가·정치가로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6.비인향교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129호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16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비인향교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향교가 설치되었던 조선 전기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짓고 수리한 것으로 짐작하지만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건물은 정문인 외삼문,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 내삼문,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순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7.서천향교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130호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서천면 군사리 315

시 대 조선시대

 

서천향교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전국적으로 많은 향교를 세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고종(재위 1863∼1906) 때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 형태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강당인 명륜당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외의 건물로는 홍살문,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8.서천남산성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96호

지 정 일 1995.03.06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외 4필

시 대 백제

 

충청남도 서천군 남산 정상부를 둘러 쌓은 산성으로, 가로·세로 30∼40㎝ 크기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둘레 620m의 성은 폭 2.6m의 남문터와 폭 2.5m의 서문터가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6∼9m의 통로가 성벽을 따라 돌아가고 있다. 현재 성벽은 남쪽과 북쪽에 남아있고, 벽이 붕괴된 지점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에도 이미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가 1,545척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1개있었으며, 세종 때 지세가 좋지 못하여 읍성을 옮겼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적어도 이곳이 세종 때까지는 산성이나 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주위를 조망할 수 있고 서해의 움직임과 금강 입구를 감시할 수 있어, 백제 때부터 변방을 지키는 요충지역였을 것으로 보인다.

 

9.서천장암진성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97호

지 정 일 1995.03.06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산1-1외 20필

시 대 고려시대

 

충청남도 서천군의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으며 산성이라기 보다는 평지에 있는 평지성에 가깝다.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에서 5∼7m 정도 떨어진 곳에 폭 4m, 깊이 1.2m 정도로 주변에 도랑을 돌린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시대 때 거의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장암진성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읍성, 서천포진성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중종 9년(1514)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10.한산향교

 

종 목 충청남도기념물 제131호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389

시 대 조선시대  

 

한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재위 1274∼1298) 때 동산리 유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조선 현종 10년(1669)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고 철종 1년(1850)부터 이듬해까지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 형태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 옆면에 바람막이 풍판을 설치했다. 이외의 건물로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이던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보통 명륜당의 좌우에 세우지만 이곳은 지대가 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 동재는 명륜당 오른쪽에, 서재는 담장 밖에 자리잡고 있다.

 

11.문헌서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5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시 대 조선시대

 

가정 이곡(1298∼1351)과 목은 이색(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12.지현리 삼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8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2-1

시 대 고려시대

 

지방 관아의 뜰에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하는 3층 석탑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 새긴 기록에는 고려 성종 10년(991) 한산지방의 호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13.서천읍성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2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산3-1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으로 쌓아 만든 서천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이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 100명이 성을 쌓고 장사 1명이 홍여다리를 짓는 내기를 하였는데, 여자들이 성을 다 쌓고 즐거운 함성을 지를 때 장사가 급히 마지막 돌을 끼워서 똑같이 끝나 무승부가 되었다고 한다.

 

성벽의 길이는 1,068m, 높이는 3m로, 현재는 동문터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고, 현재의 성은 조선 영조 27년(1751)에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왜구들로부터 양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14.비인읍성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3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331

시 대 고려시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에 있는 비인읍성은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 3년(1421)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고려 중기에 흙으로 쌓은 성을 돌로 다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높이는 2m, 길이는 3,000m 정도이며, 지금은 성의 형태만 남아있고 대부분 훼손되었다.

 

 

15.한산읍성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4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10

시 대 고려시대

 

한산읍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돌로 쌓은 성이며, 성의 둘레가 4,070척(1,233m), 높이가 11척(3m)이고, 성 안에 도랑 1개와 우물 4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의 둘레는 1,820m이며, 평면형은 서벽이 동벽보다 긴 사다리꼴 형태이다.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돌로 쌓았고, 남벽은 흙으로 쌓았으며, 동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남쪽 벽의 중간에 서천-한산간 지방도로가 통과하고 있어서 성벽이 잘린 것을 빼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성벽이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 왜구가 강을 끼고 자주 침범해오자, 고을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성을 쌓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6.수암리 삼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129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231

시 대 조선시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탑 전체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치켜올라갔고,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과 연꽃무늬를 두른 복발(엎어 놓은 그릇모양)을 올려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후기 이 지방을 관할하던 한 좌수가 매년 풍년을 기원하고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17.봉남리 삼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0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 58-1

시 대 고려시대

 

봉남리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에는 문모양과 문고리를 조각해 두었다.

 

고려시대에 만든 탑으로 짐작되며, 전해오는 말에는 탑의 뒷편에 사찰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귀금속은 일제 시대 때 일본군이 훔쳐가 남아있지 않다.

 

18.율리사

 

종 목 문화재자료 제303호

지 정 일 1988.08.30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비인면 율리 193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장군 신숭겸을 중심으로 평산 신씨 7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원래는 문중사당으로 세덕사라 불리웠다.

 

신숭겸(?∼927)은 몸집이 크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포위당해 태조 왕건이 위급해지자 대신 왕건의 옷을 입고 싸워 전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조선 철종 1년(1850)에 세덕사를 지어 모셨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18년에는 율리사로 바꿔 다시 지었다.

 

율리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안에는 신숭겸 등 7인의 위패와 신숭겸 영정을 모시고 있다. 그 외에 내삼문, 강당, 율리세덕사유허비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