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사발 그릇이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강원도 산골 정선의 할머니들이 부른, 소위 ‘38선 아리랑’의 가사다. 아마도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시작된 시기부터 불려온 사설일 것이다. 어떤 시인이 있어 이토록 소박한 논리로, 나직한 목소리로 통일의 당위성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아리랑’은 이렇게 외세가 그어 놓은 38선을 일찍부터 깨뜨려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렇지 못할 때 더 큰 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한 것이 아리랑의 숙명이었다. 아리랑의 그 숙명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된 6·25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전장에서는 군가나 의식음악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휴식을 돕고 향수를 달래기 위해 진중가요와 함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민요도 긴요하게 쓰인다. 이들 노래는 때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 의욕을 상실케 하는 심리전의 도구로 돌변하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7,000만 민족이 즐겨 부르는 민요 아리랑이 그랬다.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심리전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6·25 당시 전선의 소식을 전하는 한 신문(조선일보, 1951년 1월12일자)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
-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중부전선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본시 아리랑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해 강원도 정선에 은거하던 절의신(絶義臣)들과 그 영수였던 목은 이색(李穡) 등이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고 한시로 애소(哀訴)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듯 아리랑은 ‘절의와 저항의 노래’로 태어나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의 주제가로 쓰이면서 ‘항일,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한다. 이런 역사성과 위상을 지닌 아리랑이 동족 간에 전혀 다른 목적과 기능으로 쓰였으니, 전쟁은 고유한 민족 정서의 노래까지 무기화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품도 ‘아리랑’ 악보
그런데 이 아리랑은 6·25 때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6·25 때 미군과 국군은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도박으로 평가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기회를 마련했다. 그 결과 서울을 수복한 것은 물론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할 수 있었으니, 남측으로서는 인천상륙작전이 6·25 최대의 전승 기록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주력 부대인 미 7사단 사단장에게 치하와 함께 기념품을 전달했다.
그런데 그 승전 기념 선물이 疫謗〉?아리랑이었다. 이부란(프란체스카) 여사가 전통 자수(刺繡) 방식으로 수놓은 아리랑 악보와 가사였던 것이다. 이후 1956년 다시 김흥산(金興山)이 행진곡풍으로 편곡한 악보가 W. 켈러웨이 사단장에게 전달돼 미 7사단의 정식 군가로 채택되고, 이는 다시 사단가인 ‘대검가’(大劍歌)를 아리랑 곡조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는 아리랑을 참으로 특별한 의미의 노래로 변신시킨 것이다.
6·25 당시 이 같은 아리랑의 쓰임새가 최고의 빛을 발한 것은 휴전회담과 포로 교환 때였다.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이에 따른 단계적 결실 중 하나였던 포로 교환이 있을 때 양측 가운데 한 곳에서는 반드시 아리랑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회담 조인식에서 벌어졌다.
휴전회담 조인 직후 울려퍼진 ‘아리랑’
알려진 바대로 남측은 이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못했다. 2년 간의 휴전 줄다리기와 3년1개월의 전쟁을 중지하는 역사적 회담 조인식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 대표만이 전쟁 당사국으로서 서명한 것이다. 웃음은커녕 악수나 박수도 없이 한글로 된 정본과 영어·중국어본 협정서에 서명하고, 양측 대표들이 동서 양쪽 문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조인식은 끝났다. 아무리 전쟁의 뒤끝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쓸쓸하고 씁쓸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양측 대표가 각자 문을 나서는 순간 이런 분위기를 일시에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도열해 있던 양측 군악대가 대표들의 사열을 받으면서 동시에 주악을 연주했는데, 연주곡이 남북 똑같이 아리랑이었다. 서로 약속한 바도 없었는데 그 중요하고 엄숙한 순간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이 민족 전체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비록 휴전회담의 형식은 반쪽이었지만, 그 최종 의식(儀式)에서 아리랑을 통해 ‘민족적 통일’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6·25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실로 6·25전쟁 덕에 세계에서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국가에 전파된 우리의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쟁은 말 그대로 교류의 장일 수밖에 없다. 이 땅의 6·25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16개국이 참전해 남한을 도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북한 역시 러시아의 배후 지원을 받았고, 중국은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직접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니 6·25는 20여 국에 달하는 사상 유례없는 인종과 문화가 대규모로 교류한 전쟁이었다.
당시 참전 유엔군을 위문하기 위해 세계적인 연예인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했다. 특히 유엔군의 주력이 미군들이어서인지 웬만한 미국의 연예인들은 대부분 한 번 이상 방한했다. 배우 마릴린 먼로,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 코미디언 밥 호프 등 300여 명의 미국 연예인이 한국을 찾았던 것으로 한국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뮤지션들도 끼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을 팝(pop)음악의 세계적 시장으로 변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대신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이들에 의해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다. 또한 참전한 20여 국 군인들을 통해 그들 나라에도 아리랑은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전쟁과 고아의 나라’의 상징처럼 부정적으로 인식된 경우도 있었지만, 의외로 음악성을 인정받는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해 세계적 수준의 노래로 전파된 예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 예가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의 ‘아 디 동 블루스’(AH DEE DONG BLUES)다. 오스카 페티포트는 당시 재즈계의 신화적 인물로, 1951년 위문공연차 인천에 잠시 기착했다. 그때 우연히 아리랑을 접하고 직접 편곡, 연주해 재즈 전문 레이블인 ‘로열 루츠(ROYAL ROOST)사를 통해 1952년 SP 음반으로 발매함으로써 탄생한 재즈 버전의 새로운 아리랑이 ‘아 디 동 블루스’였던 것이다.
6·25 통해 아리랑 세계에 전파
이 작품은 무엇보다 아리랑을 세계화한 첫 재즈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음반 작업에는 첼로의 페티포드, 베이스의 찰스 밍거스, 드럼의 스미스, 피아노의 테일러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일류 연주가들이 참여해 지금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고전적 재즈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평가는 우선 페티포드 사후 발매된 그의 앨범에 연습곡(TAKE1~3) 3편을 모두 수록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앨범은 1946년 이후 페티포드의 베스트만 선정해 수록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도 비교되는 점이다. 특히 원래 베이스 담당이었던 페티포드는 아리랑의 구성진 선율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베이스가 아닌 첼로를 직접 연주했다고 磯? 그만큼 페티포트가 ‘아 디 동 블루스’ 연주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또 다른 증거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페티포드의 재즈계에서의 명성과, 전쟁으로 주목받는 나라 한국의 민요라는 점에서 널리 연주되었다고 한다. 이후 불행하게도 페티포드가 연주여행중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음반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이 앨범은 음반사가 짧은 기간 존재했고, 재즈 전문 음반이라는 특징이 겹쳐 음반 컬렉터 세계에서는 고가로 거래되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아 디 동 블루스’의 앨범에는 ‘코리아’(Korea)나 ‘아리랑’(Arirang) 등 우리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표기가 없어 그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와 얽힌 사연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음반이 다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사연을 살펴보면 ‘아리랑’의 높은 음악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페티포드와 같은 재즈팀에서 활동했던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찰스 밍거스는 1970년대 들어 자신의 앨범 ‘더 영 레벨’(the young Rebel)에 ‘아 디 동 블루스’를 재수록했다. 그리고 그가 국제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와 교류했던 일본 오사카의 재즈 뮤지션 사브(베이스 연주자)가 이 음악의 존재를 발견한다. 이 사실이 다시 재즈 뮤지션으로 오사카에서 활동하던 재일교포 2세 김병수 씨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30여 년이 지나서야 ‘아 디 동 블루스’로 편곡된 아리랑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페티포드에 의해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의외의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야말로 6·25와 같은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편곡자인 페티포드는 1951년 10월 초 일본 미군기지 위문 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공연차 와 있던 다른 연예인들과 합류해 귀국하기 위해 잠시 인천에 기착하게 되었다. 당시 페티포드가 인천에서 체류한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이때 페티포드는 한국 통역병의 안내를 받아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그런데 바로 이때 화장실 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된다. 페티포드는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르는 아리랑 곡조에 순간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 듣는 새로운 멜로디에 호기심이 발동했을 정도라면 그는 분명 직감으로 아리랑의 매력을 포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페티포드는 화장실 문을 열고 그 노래에 대해 물었고, 통역병은 그저 “아무 때나 부르는 우리 민요 아리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페티포드는 그 통역병이 ‘아·리·랑’이라고 한 것을 ‘아· 디· 동’으로 잘못 듣고, 음가 그대로 기록했다. 귀국 후 페티포트는 그 기억을 되살려 재즈로 편곡했다. 그리고 1952년 음반으로 취입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아 디 동 블루스’인 것이다.
이후 ‘아 디 동 부르스’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54년 페티포드가 비행기 사고로 작고한 직후 샤보이(savoy)사가 발매한 그의 베스트셀러 LP 음반인 ‘디스커버리’(discovery)에 연습곡까지 모두 수록됐다. 그만큼 페티포드는 ‘아 디 동 블루스’에 큰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反戰음악으로 재탄생한 ‘ARIRANG’
이렇듯 6·25를 통해 세계 각국에 널리 전파된 아리랑은 나중에 반전(反戰)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뉴욕 출신 피터 시거(Peter Seeger)가 1964년에 부른 ‘아리랑’(ARIRANG)이 그것이다. 이 노래를 부른 시거는 1960년대 월남전이 한창일 때 반전 노래로 유명했던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의 ‘꽃들은 어디로 갔는가?’(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의 작사 작곡자다. 이런 성향 때문에 시거는 미국 정부의 많은 제재를 받기도 했다.
시거는 싱어 송 라이터여서인지 ‘아리랑’을 그답게 해석했다. 그는 벤조(Banjo) 반주로 노래를 부르기 전에 아리랑과 관련한 자기 나름의 코멘트를 음반에 수록했다. 그 코멘트에는 그다운 주목할 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이다.
“한국인이 부르는 노래에 ‘아리랑’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러왔다고 하는데,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시기에는 부르지 못하게 탄압받은 사실도 있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고 나뉘어 살고 있지만, 두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전쟁을 치렀고, 그래서 분단국으로 서로 등지고 살지만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나라라는 주장이다. 동질감이 없다면 결코 하나의 노래를 같은 정서로 부를 수 없다는 음악사회학적인 분석이다. 더불어 아리랑의 통일성까지 주목한 것甄? 너무나 적확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능이 있었기에 아리랑은 참전 용사들에게 그렇게 강렬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아리랑이 그저 어쩌다 외국인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역사적 계기에 전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특별한 자료인 것이다.
이는 가수라는 직업의식에서 감지된 것이겠지만, 아리랑의 음악성이나 전쟁중에도 불리는 아리랑의 연대정신과 공시(公示)성을 파악한 결과다. 그야말로 아리랑의 남북 ‘통일노래’ 가능성을 들어 세계적 반전음악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1964년 라이브 음반 ‘피터 시거’(PETER SEEGER) 외 두 앨범에 동시에 수록함으로써, 이 역시 세계적으로 보급됐다.
아리랑은 비록 한때 동족상잔의 치욕과 함께했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 그 역사성과 세계성으로 하여 통일의 노래로, 평화의 노래로 불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2003년 10월 독일에 모였던 유럽 작곡가들은 투표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아리랑을 선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리랑은 ‘과거의 노래’이고 ‘현재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노래’로도 불릴 것이다.
출처 : 월간중앙 200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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