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동안거사 이공 문집 서(動安居士李公文集序)
맹자(孟子)가 옛 사람을 벗삼는 예를 논하기를,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세대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문장을 논하여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다.” 하였다. 문장은 사람 말의 정수이다. 그러나 말이란 반드시 모두 그 마음과 같으며 실제의 행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ㆍ양자운(揚子雲)과 당 나라 유종원(柳宗元)과 송 나라 왕안석(王安石)같은 무리들이 그 말이 글월에 널려 있는 것은 이의를 달 것이 조금도 없지만, 서서히 그 행동의 실적을 상고해 보면 능히 우리의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예불(禮佛)하는 도한(屠漢)이나 예를 배운 창부(倡婦)가 밖에서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근본을 따진다면 도한이요 창부인 것과 같다. 그것을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이렇기 때문에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고 더욱이 그 세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다.
이색(李穡)은 배우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옛 사람을 논하며 어찌 감히 천하의 선비를 논하리오. 그러나 한갓 문장만으로써 사람을 허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히 숨겨두지 못한다. 전 밀직사사 겸 감찰대부 이공이 그 선친 동안거사(動安居士) 문집을 판각하려 하는데 그 질서(姪?) 병부 시랑 안군으로 인하여 내 글을 빌려서 서문을 하고자 하였다. 나는 일찍이 거사의 높은 풍도(風度)를 사모하여 그 시절에 나서 채찍을 쥐고 뒤를 따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는데, 편 머리에 이름을 실린다면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는데 어찌 사양하랴.
삼가 살피건대 거사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갖은 고생으로 스스로 이루었다. 경오년 환도(還都)하던 때에 거사가 아직도 천한 몸이었는데, 언사(言事)로써 충경왕(忠敬王)의 지우(知遇)를 얻게 되어 순안공(順安公)을 따라서 원조(元朝)에 들어가서, 매양 황제의 은사가 있으면 표를 올려 진사(陳謝)하여 그 문장이 문득 사람을 경동하게 되자 이름이 드디어 크게 떨쳤다. 충렬왕을 섬기어 정언(正言) 사간이 되매 더욱 언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쓰이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떠나서 두타산(頭?山)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몸을 마치려는 듯이 하였다. 충선왕이 직위하자 제일 먼저 거사를 불러들여 대우가 극히 융숭하였으나 거사는 끝내 즐거워하지 않고 돌아가기를 청하여 더욱 간곡하므로 이에 밀직부사 사림학사(詞林學士)로써 치사하게 하였다.
가훈이 법도가 있어 여러 아들들이 모두 유명하며 그 막내 아들이 역시 곧은 절개와 위대한 인격으로 당시의 중신(重臣) 대부가 되었다. 아, 재주가 아니고서 영탈(穎脫)이 이와 같겠는가. 어질지 않고서 벼슬자리를 벗어던지겠는가. 도가 몸에 축적되지 않고서 이들이 능히 세 조정의 청문(聽聞)을 움직였겠는가. 교화가 가정에 시행되지 않고서 능히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였겠는가. 여러 가지 행사의 실적에 나타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비록 전집을 보지 아니하여도 그 마음에 뿌리박힌 것이 문사에 나타났음을 따라서 알 수 있다. 아,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언(言)이 있다는 말을 나는 여기서 더욱 믿는다. 지정(至正) 19년 동지(冬至) 후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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