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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증 김 판사 시 후서(贈金判事詩後序)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21. 19:33

서(序)
 
 
증 김 판사 시 후서(贈金判事詩後序)
 

상(喪)에 대한 제도가 폐지된 지가 오래이다. 지난날 내가 중원에 있을 때에, 사대부가 상복을 입고 수질(首?)을 띤 채 술ㆍ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매우 해괴하게 여겼는데, 아침저녁으로 곡하는 것이 3년을 마치도록 게으르지 아니하여 비록 악독한 무리라도 그 소리를 듣고 가슴속에 흐느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음을 보고서야, 드디어 중국의 강상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려는 주(周) 나라가 은태사(殷太師) 기자를 봉한 후로부터 대개 문명으로 변하여 상기(喪期)도 일찍이 3년으로 정하였으나 백 일만에 길사(吉事)에 나아가며, 풋마늘을 먹지 않는 것은 좋게 알면서 쌀밥을 먹는 것은 여전하며, 장지를 가리는 것과 죽은 이를 보내는 절차는 대략 중국과 동일하나 우제ㆍ졸곡은 없으며, 소ㆍ대상ㆍ담제는 그 예가 엄연히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곡하지는 아니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가 아직도 복중에 있는 줄을 모르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지금 천하의 상제(喪制)를 거론할 때 득실이 대개 상반된다. 본국의 복제도(服制圖)를 살펴보니, “3년상에 있어서는 백 일 동안 휴가를 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차례대로 내려간다.” 하였다. 과연 백 일로써 3년을 당한다면 소ㆍ대상ㆍ담제도 백 일 안에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 돌이 소상이요, 두 돐이 대상이요, 그후 3개월 되는 달 중순이 담제로 되어 다 휴가가 있으니, 그렇다면 27개월로 된 것이 분명하며, 또 휴가란 것은 관직에 있는 자를 두고 말한 것이다. 휴가가 끝나면 당연히 공사를 봐야 하는데, 길(吉)과 흉(凶)은 그릇을 같이 사용하지 못하므로 복을 벗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사람이야 무엇 때문에 스스로 복을 벗겠는가? 복을 비록 벗었더라도 술도 마시지 아니하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내방 거처도 하지 아니하며, 3년을 심상(心喪)하는 것이 옳거늘, 이에 이르기를, “나는 휴가가 이미 끝났다. 나는 복을 이미 벗었다.” 하며, 못하는 짓이 없다면 대개 또한 생각을 잘못한 탓일 따름이다.
그 폐단을 미루어보면 관직에 있는 자의 휴가에 있다. 기복(起復)의 명령이 미치어 무직자가 그 본을 뜨고, 서민도 또한 그 본을 떠서 구차하고 간편한 것을 인습하여 드디어 그 잘못을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러므로 능히 3년을 마치기는 오직 시묘(侍墓)하는 자만이 그렇게 한다. 무릇 묘라는 것은 체백이 들어 있는 곳이요, 혼기는 본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므로, 삼우(三虞)를 제사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가묘(家廟)가 이미 폐하게 되면 정신이 주류(周流)하여 어디를 가도 자손에게 의탁하지 않음이 없으니, 자손이 있는 곳이 신이 의지한 곳이다. 그렇다면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또 제사하는 것을 집에서 아니하고 들녘에서 한들 또한 무엇이 해로우랴. 비록 성인(聖人)의 법제로 따진다면 조금 유감 되는 점이 있으나 지금 예법이 탕진해 없어지는 때에 능히 자식 된 지정(至情)을 극진히 하여 3년만에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 그 은혜를 갚는 것은 그 길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의 사는 마을을 정표하고 남들이 효자라 칭하게 되는 것이니, 비록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역시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낙안(樂安) 김씨는 삼한의 대성이다. 형제가 어머니를 섬기어 효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신축년 겨울에 도적이 서울을 침범하게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는데 형씨 제학(提學)은 불행히 도중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어머니가 무척 슬퍼하여 미구에 또 죽었다. 아우 판사(判事) 공이 그 상(喪)을 태산의 별장에 초빈하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짚방석을 떠나지 아니한 지가 수개월이었다. 이미 장사하고 그 곁에 살며 복제를 마치니, 대개 내가 이른바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바꾸지 않는다는 그것이다.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효에 극진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사대부가 시를 지어서 아름답게 여겼다. 나같은 자는 바로 이른바 휴가가 끝났으므로 공사를 보는데 이 권을 읽으니, 능히 슬픔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상제에 대한 득실과 그 폐단의 소유와 시묘를 하는 것이 정에서 나온 뜻을 얻었다는 것을 써서 후서(後序)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