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문충공 양촌권선생 신도지비(贈諡文忠公 陽村權先生 神道之碑)
유명조선국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 길창군 증시문충공 양촌선생 권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議政府贊成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 世子貳師 吉昌君 贈諡文忠公 陽村先生權公 神道碑銘) 서문을 병기하다.
선교랑 집현전부수찬 지제교 경연사경(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신(臣) 이개(李塏) 이개 (1417~1456년) :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청보(淸甫), 백고(伯高)이며,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뒤에 충간(忠諫)으로 시호를 고쳤다. 세종 18년(143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1년에 저작랑(著作郞)으로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1447년에 문과중시에 합격한 뒤 사가독사하고 세조 2년(1456년)에 직제학이 되고 이 해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가 교지를 받들어 찬술하였고,
외손(外孫)인 선무랑집현전 부수찬 지제교 경연사경(宣務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經筵司經) 신(臣) 서거정(徐居正) 서거정(1420~1488년) :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강중(剛中)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4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문종 1년(1451년)에 사가독서를 하고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서 세조 2년(145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1457년에 있었던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였고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45년 동안 여섯 왕을 섬겼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향약집성방』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등 여러 분야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으로는 『사가집』이 있으며 『동인시화』, 『동문선』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휘지(徽旨)를 받들어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썼다.
본관이 영가(永嘉) 안동의 옛 이름.
인 권문충공(權文忠公)이 영락(永樂) 기축년(태종 9, 1409년)에 졸(卒)하였다. 그 해 윤4월에 광주(廣州)의 읍치(邑治) 남쪽에 장사 지냈는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계해년(세종 25, 1443년)에 둘째 아들 찬성공(贊成公)이 영의정(領議政) 하륜(河崙) 하륜(1347~1416년) :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대림(大臨)이고, 호는 호정(浩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공민왕14년(136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며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1398년 충청도 관찰사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태종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1412년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문집에 호정집이 있다.
이 지은 묘지(墓誌)를 돌에 새겨서 장차 세우려 하니, 무덤에 물 기운이 있었으므로 다시 충주(忠州)의 읍치 서쪽인 미법곡(彌法谷) 미법곡 : 오늘날의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이다.
의 언덕을 정하여 갑자년(세종 26, 1444년) 3월 초10일 경신(庚申)에 이장(移葬)하였다. 상(上)께서 역부(役夫)를 관에서 제공하도록 명하시고 일을 끝마친 뒤에는 또한 신 이개(李塏)에게 명하여 비문을 고쳐 찬술하라고 하시었으므로 신(臣)이 명을 받들고는 삼가 두려워서 감히 이를 사양치 못하였다.
삼가 권씨(權氏)의 세계(世系)를 살펴보건대, 먼 조상인 김행(金幸)은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고창(古昌)의 수령이었다. 이곳에서 고려 시조가 견훤(甄萱)과 싸우게 되었을 때 행(幸)이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이야기 하되, “훤(萱)은 도가 없는 도적으로 군부(君父)를 시해(弑害)하였다. 의리로 따지면 함께 하늘을 일 수 없는 원수이나 우리가 병력이 적어서 보복할 수가 없었으니 어찌 왕공(王公)에게 투신하여 저 역적 훤(萱)을 섬멸함으로써 우리의 분통함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고려군을 맞아들여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기뻐하여 이르기를, “행은 기미(幾微)에 밝아 귀순할 수가 있었으니 권도(權道)가 있다고 할 만하다”고 하여 권(權)을 성(姓)으로 내렸다.
그 이후 대대로 관직에 현달하였으니 증조(曾祖) 부(溥)는 총재(冢宰)의 지위를 차지하고 문병(文柄)을 잡았으며 큰 덕망이 무성히 빛이 났고, 관면(冠冕)이 당대를 덮었다. 그는 다섯 아들과 세 명의 사위와 함께 모두 군(君)에 봉해 지니, 당시 한 집안에서 ‘구봉군(九封君)’의 영예를 이루었으니, 시호는 문정(文正)이요 호는 국재(菊齋)였다. 그는 정신공(貞愼公) 문화(文化) 류승(柳陞)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고(皐)를 낳았다.
권고는 영가군(永嘉君)을 습봉(襲封)받고 지위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요 호는 성재(誠齋)이며 찬성사(贊成事) 합천(陜川) 이씨(李氏) 설(偰)의 딸을 아내로 맞아 희(僖)를 낳았으니, 공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그는 검교의정부좌정승(檢校議政府左政丞)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공은 우리 태조를 잠저(潛邸) 때부터 섬기다가 세상이 뒤바뀌는 때를 만나 문호(門戶)를 더욱 창성케 하였다. 비(妣)는 한씨(韓氏)이니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시호 문절공(文節公) 종유(宗愈)의 딸인데 창순택주(彰順宅主)로 봉해졌다가 뒤에 공의 공(功)으로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휘가 근(近)이고 자(字)가 가원(可遠)이었다가 뒤에 사숙(思叔)으로 고쳤으며 자호(自號)는 양촌(陽村)이다. 지정(至正) 임진년(공민왕 1, 1352년) 11월 을해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고 조금 성장하여서는 배움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홍무(洪武) 기유년(공민왕 18, 1369년)에 공민왕(恭愍王)이 과거를 개설하니, 초은(樵隱)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과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이색(1328~1396년) :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영숙(潁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이며, 이제현의 문하생이다. 이색의 아버지는 이곡(李穀)이고, 어머니는 함창 김씨 김택(金澤)의 딸이다. 이곡은 36세 때 원나라 회시와 전시에 합격하여 원나라에서 벼슬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이색은 6세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19세 때 안동 권씨 권중달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21세때 원나라 국자감에 가서 생도가 되어 3년간 공부하였다. 1352년에 당면하는 정책에 대해 공민왕에게 건의하였고 1354년에는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에 장원, 전시에 차석을 차지하였다. 1377년 우왕의 사부가 된 적도 있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유배되었다.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였다. 저서에 목은시고, 목은문고 등이 있다.
이 공거(貢擧)를 함께 하였는데, 당시 공은 나이가 18세로 병과(丙科) 제2인에 발탁되었다. 공이 응방(應榜)을 하자, 왕은 “저렇게 나이가 어린 자도 등제(登第)하였단 말인가”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이에 문정공이 “그의 기국이 장차 크게 쓸만할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왕이 화를 풀었다.
그 해 가을에 춘추관(春秋館) 검열(檢閱)의 직책을 맡았고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서 밀직사(密直司)의 당후관(堂後官)이 되니, 재상(宰相)들이 모두 탄복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학식이 남들보다 뛰어나니 필시 소성(小成)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년)에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옮겼다가 곧 이어 왕부(王府)의 필도치(必闍赤) 필도치 : 고려시대 최씨 무신 정권의 정방(政房)에 속하였던 문신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문사라는 뜻인 몽고어 biteshi의 한자 음차어이다. 고종 12년(1225년)에 최이가 자기 사저에 정방을 설치하고 문사를 뽑아 들여 임원을 삼아 인사를 처리하였는데 여기서 연유하여 문서를 관장한 사람을 말한다.
가 되었다. 그때 마침 왕이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려 하였는데, 그 인문(印文)의 뜻에 잘못이 있었으므로 공이 이를 깨닫고 즉시 고치니, 왕이 매우 칭찬하였다. 계축년(공민왕 22, 1373년)에 군부좌(軍簿佐)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갑인년(공민왕 23, 1374년)에는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과 예문관 응교(藝文館 應敎)를 제수 받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는데 9월에 왕이 훙서(薨逝)하였다.
을묘년(우왕 1, 1375년)에 이전 원나라의 유민 중에 북방에서 황제를 칭하는 자가 있어서, 그는 사면(赦免)을 반포하는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국경에 이르렀을 때, 당시의 재상이 영접코자 하였다. 공(公)은 문신(文臣) 수십 명과 더불어 의정부에 글을 올려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했는데 그 말이 심히 절실하고 올곧았으므로 마침내 왕은 그의 의론에 따랐다.
경신년(우왕 6, 1380년)에는 성균관(成均館) 제주(祭酒)로서 성균관시(成均館試)를 관장하여 홍상빈(洪尙賓) 등 110명을 취하였다. 임술년(우왕 8, 1382년)에는 좌사의대부에 제수되었는데 위주(僞主) 우(禑)가 광폭하고 음란하였으므로 공이 상소를 올려 극간(極諫)하자 이에 우(禑)가 받아들이고는 그가 간한 글을 필사하여 병장(屛障)으로 제작하라고 명하였다.
갑자년(우왕 10, 1384년) 겨울에 정방(政房)에서 공을 좌대언(左代言)으로 보임하였다. 그런데 왕의 인비(印批)를 받을 때에 우(禑)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간관(諫官)이었을 적에 나로 하여금 유희를 못하게 한 사람인데 어찌 근시(近侍)하는 신하가 될 수 있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며 곧 꺼리어 물리쳤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이름이었다.
병인년(우왕 12, 1386년)에 성균관시를 관장하여 윤봉(尹逢) 등 63명을 취하고 정묘년(우왕 13, 1387년)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옮겼다. 무진년(우왕 14, 1388년)에는 자문(咨文)이 조정에 이르러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였다. 국가가 공으로 하여금 표문을 지어 그만둘 것을 청하게 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그 해 여름에는 좌대언(左代言)을 제수 받고 곧 지신사(知信事)로 옮겼으며 겨울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이은(李垠) 등 33명을 취하였다.
기사년(창왕 1, 1389년) 여름에는 첨서(簽書)로 옮겨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으며, 가을에는 예부(禮部)로부터 성이 다른 이를 왕으로 삼았다고 문책하는 자문(咨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10월에는 대간(臺諫)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이숭인(李崇仁)을 탄핵하니 공이 글을 올려 이를 변호하였지만 그는 마침내 우봉(牛峰)으로 폄출되었다. 11월에는 모든 대신이 예부(禮部)의 자문에 의거하여 위주(僞主)를 폐하고 창군(昌君)을 세웠다. 대간에서는 공이 그 자문을 사사로이 열어서 먼저 위주(僞主)의 당여(黨與)에게 보였다고 탄핵함에 따라 영해(寧海)로 이폄(移貶)되었다.
경오년(공양왕 2, 1390년) 봄에 대간(臺諫)이 다시 그를 탄핵하여 사지(死地)로 몰아넣고자 하였으나 왕이 오히려 늦추어 장(杖)을 가해 흥해(興海)에 안치하였다가 김해(金海)로 옮겼다. 5월에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서 청주에 붙잡혀 있었다가 수재(水災)의 이변으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7월에 또 익주(益州)로 폄치(貶置)되어서는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다. 신미년(공양왕 3, 1391년)에는 죄를 용서받아서 충주(忠州)의 양촌(陽村)에 있는 별서(別墅)로 돌아왔다.
우리 문정공께서는 일찍이 예경(禮經)은 한(漢)나라 학자들이 진나라가 분서한 나머지를 거두어 모은 것이므로 문사가 착란된 것이 많다고 하여 공에게 이를 이정(釐整)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그 절차를 고정하였고, 역(易)과 시(詩), 서(書), 춘추(春秋)의 주(註)와 전(傳)에 있어 해석이 어려운 것들을 모두 변론하고 귀취를 밝혀 총목으로 묶어 ‘천견록(淺見錄)’이라고 하였다.
임신년(공양왕 4, 1392년) 가을 7월에 우리 태조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개국(開國)하시고, 계유년(태조 2, 1393년) 봄에 계룡산에 행차하여서는 공을 불렀다. 공이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니, 태조는 정릉(定陵)의 비문(碑文)을 지을 것을 명하셨다. 이에 드디어 공은 어가(御駕)를 좇아 서울로 돌아왔다. 갑술년 (태조 3, 1394년)에 다시 첨서겸성균대사성(簽書兼成均大司成)에 제수되었고, 을해년(태조 4, 1395년)에는 예문관(藝文館) 학사로 옮겼다.
병자년(태조 5, 1396년) 여름에 고황제(高皇帝)가 표문(表文)에 희롱하고 모욕하는 글자가 있다고 화를 내어 표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불러들였으나 정도전은 질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공이 가기를 자청하며, “신은 전조(前朝)에서 어리석고 광패하여 화를 취하였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심에 이르러 거두어 쓰일 수 있었으니 성은이 하늘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돌아보건대 지금까지 조금도 도움된 것이 없었고, 하물며 표문을 지은 일에 신도 참여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께서는 “경에게는 노부모가 있기도 하고 불러들이라는 황명도 없었으니 반드시 갈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공이 굳이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압록강을 건널 즈음 사신(使臣) 송패라(宋孛羅)가 여러 재상들과 입대할 때에 할 말들을 두루 물었으나 공에게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공이 가로되 “대인께서는 어찌 유독 나하고는 의논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패라는 낯빛을 고쳐 말하기를 “우리 황상께서는 사람의 충직함을 보시면 비록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풀어 주십니다. 지금 그대가 불러들이라는 명령이 없었는데도 스스로 가니, 충신이므로 황제께서도 결코 물으심이 없을 것인즉 그대가 또한 어찌 대답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경사(京師)에 이르니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이들 몇 유자(儒者)들이 감히 희롱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지어 두 나라 사이의 틈을 만들고 백성의 재앙을 일으킨단 말인가?” 라고 하고 억류시키고자, 불러들여 그 자문에 대한 회답의 초안을 보이게 하였다. 공이 고두(叩頭)하고 아뢰기를,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기려면 표전(表箋)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신 등은 저 바다 귀퉁이에서 성장하여 배운 것이 바르게 통달치 못한지라, 우리 왕의 충성을 황제에게 각별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 등의 죄이지, 우리 왕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황제가 그 말이 그렇다고 여기고 넉넉한 예로 대접하였다.
칙명(勅命)으로 문연각(文淵閣)에 출사케 하여 광록사에게는 음식을 내리라 하고 내부(內府)에게는 의복을 하사토록 했는데 제목을 주고 부시(賦詩)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곧이어 유사에게 명하여 주찬(酒饌)과 기악(妓樂)을 모두 다 하사하고는 3일 동안 유가(遊街)하게 하였다. 다시 명하여 제목을 주고 부시를 지어 올리라 하고 황제도 3편의 시를 친히 지어 내렸다. 이에 공은 조정의 대유(大儒)인 유삼오(劉三吾)와 허관(許觀), 경청(景淸), 장신(張信), 대덕이(戴德彛)와 더불어 항상 서로 주선하며, 매양 우리 태조께서 회군한 의리와 사대의 정성을 일컬어 말하니 황제가 듣고서 가상히 여기며 거듭 노숙하고 빈틈없는 수재(秀才)라고 칭찬하였다.
정축년(태조 6, 1397년)에 장차 돌아가려고 할 적에, 마침 왕비의 부음이 이른지라, 위로하는 칙명을 받들고 왔다. 공을 꺼리는 자가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정총(鄭摠) 등이 모두 억류 되었는데 공만이 홀로 상을 받고 귀환되는 특은을 입은 것에 대하여 탄핵케 하고 그 사유를 문초할 것을 청했다. 이에 태조께서 “천자가 진노하였을 때에 몸을 던져 가기를 청하여 황제의 위협을 걷히게 하였으니 그 공이 실로 적지 아니한데, 도리어 죄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이윽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는 내우(內憂)를 당했다. 공정대왕(恭靖大王)이 즉위함에, 공을 일으켜 화산군(花山君) 수문전 학사(修文殿 學士)로 삼았다. 두 번 전(箋)을 올려 복제를 마치게 할 것을 빌었으나 불윤되었다. 기묘년(정종 1, 1399년)에 다시 첨서(簽書)가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나갔다. 경진년(경종 2, 1400년)에는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여서는 사병(私兵)을 혁파할 것을 청했다. 그 해 가을 7월에는 참찬문하부 지의정부사(參贊門下府 知議政府事)를 제수 받고 정헌대부로 가자되었다. 겨울 11월에 태종이 즉위하자 명년에 또 추충익대좌명(推忠翊戴佐命)의 공신호를 받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하여졌으며 성균 대사성(成均 大司成)을 겸직하였다.
임오년(태종 2, 1402년)에 공은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 33명을 취하였다. 공은 일찍이 중국의 사신으로서 오는 자에게 이름이 나 있어서 상접하면 반드시 예모로써 하고 또한 시문을 구해 가지고 돌아갔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즉위하신 초에 어사 유사길(兪士吉)과 내사 온불화(溫不花)가 조칙을 받들고 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공의 기거(起居)를 물었다. 국도(國都)에 이르러 주상께서 연회로써 위로할 때에 여러 재상이 차례로 술을 권하는데 공의 순서에 이르니 유사길 등이 모두 다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상께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묻자, 사길(士吉)은 “어찌 감히 사문(斯文)의 노성하신 군자께 오만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고, 부화(不花)도 “고황제(高皇帝)께서 예경(禮敬)으로 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계미년(태종 3 , 1403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로서 교명을 받들어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하였고, 갑신년(태종 4, 1404년)에는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 되었지만 상서(上書)를 올려 사직(辭職)하여 여유 있게 예경(禮經)을 편차하는 일을 끝마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였으되 직임에서 떠난 바가 없었다.”라고 하였고 이에 삼관(三館)의 학사 두 사람에게 명하여 날마다 그 집에 가서 편차하는 일을 도와주라고 하셨다. 책이 완성이 되어 선사(繕寫)하여 올리니, 주상께서 이를 인행(印行)하여 이를 경연(經筵)에 사용하도록 할 것을 명하고 그리고 나서 반행(頒行)을 허락하였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봄에 공은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자품과 관직이 더해졌고 공신호(功臣號)는 전과 같았다. 겨울에 질환으로 사직하니 길창군에 봉해졌다. 그 해 12월에 외우(外憂)를 당했고, 병술년(태종 6, 1406년)에 다시 일어나 대제학(大提學)으로 나가서 곧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해지고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더해지니 재차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칠 것을 빌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다. 가을에 상(上)이 장차 선례(禪禮)를 행하려 하실 적에 백료(百僚)들이 누차 간쟁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지만 공이 수백 마디의 긴 상서를 올리자 마침내 윤허하였다.
정해년(태종 7, 1407년) 여름에 문사(文士)를 친시(親試)함에 공(公)과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을 독권관(讀券官)으로 명하니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선취하였다. 무자년(태종 8, 1408년) 겨울에 고문(告聞)을 드린 일로 상께서 노하여 대간(臺諫)으로서 일을 말함에 중정을 잃은 자에 대하여 죄를 주려 하였을 때, 공은 상소하여 이르길, “순(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여 중정(中正)을 썼던 일을 진수하였다.”고 하였다. 공이 이를 반복함이 간절하고 지극히 하자 상이 그들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그런 뒤에 상께서 또한 대간(臺諫)을 문책하여 중전(重典)으로 다스리려 하면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길창군이 언관(言官)을 죄주지 말 것을 청하므로 내가 그 말을 중히 여겨서 글로 써 좌우명으로 삼아서 잊지 말 것을 바랐는데 지금 또 부득이 이같이 되었도다.”라고 하고는 신(臣)의 조부 종선(種善)을 불러서는 공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셨다. 그때 공은 즉시 수레를 몰아 대궐로 나가서는 다시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상께서는 힘써 노고를 위로하시더니 드디어 그 죄를 너그러이 다스리셨다.
그 이듬해 2월에 공은 질환이 점점 위독하여 14일에 집에서 졸(卒)하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약을 내리고 문병함에 거의 하루도 빠뜨린 날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서는 놀라 애도하며 3일 동안 조회를 그만두고 부제(賻祭)를 하사하며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장(禮葬)을 명하였고 세자(世子)로 하여금 친히 나아가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다. 성균관의 학관이 삼관(三館)의 학사를 인솔하여 소뢰(小牢)로써 제사를 드리니 학생들도 소뢰로써 제사를 지냈고 국인(國人)들은 귀천이나 나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히 여겼다.
공은 모두 두 차례 아내를 얻으셨다. 한 분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밀직부사(密直副使) 문경공(文景公) 강(岡)의 딸로서 일찍 죽어서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으로 추증되었고, 또 한 분은 계림 이씨(鷄林 李氏)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 증판삼사사(贈判三司事) 존오(存吾)의 딸로서 숙경택주(淑敬宅主)로 봉작되었다.
변한국부인은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천(踐)은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고, 큰 딸은 나의 할아버지인 중추원사(中樞院事) 종선(種善)에게 시집가서 후실이 되었고 둘째 딸은 안주목사(安州牧使) 서미성(徐彌性)에게 시집갔다.
숙경택주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도(蹈)는 후에 제(踶) 권제 : 권근의 아들로 집현전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세종 17년(1435년)에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동국세년가를 저술하였고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고 지중추부사를 겸임하였다. 그는 정인지와 더불어 고려사 편수에 참여하였고 세종 27년(1455년)에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어 치평요람,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뒤에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고 길창부원군에 봉해졌다.
로 개명하였는데 갑오년(태종14년, 1414년) 친시(親試)에서 제1인으로 급제하여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이 되었다. 차남인 규(跬)는 태종의 딸인 경안궁주(慶安宮主)에게 장가들어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3남인 준(蹲)은 오늘날 한성부 소윤(漢城府 少尹)이다. 딸은 판종부사사 최주(崔宙)에게 시집갔다.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천(踐)은 4남 2녀를 생육하였다. 장남 첩(睫)은 호군(護軍)이 되었고 둘째 아들 첨(瞻)은 영춘현감(永春縣監)이며, 셋째 아들 미(眉)는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고, 넷째 아들 육(睦)은 사직(司直)이 되었다. 큰 딸은 청주목사(淸州牧使) 박효성(朴孝誠)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광흥창부사(廣興倉副使) 정형(鄭衡)에게 시집갔다.
중추원사(中樞院事) 종선(種善)은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인 계린(季疄)은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 都觀察使)요, 둘째아들인 계전(季甸)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이며 셋째 아들은 계정(季町)이다. 큰 딸은 양주목사(楊州牧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을 갔으며, 둘째 딸은 전구부승(典廐副丞) 김숭노(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안주목사(安州牧使) 서미성(徐彌性)은 2남 5녀를 생육하였다. 장남 거광(居廣)은 훈련원 녹사(訓練院 錄事)이며, 차남 거정(居正)은 집현전 수찬(集賢殿 修撰)이 되었다. 장녀는 사섬시 직장(司贍寺 直長) 이정기(李正己)에게 시집을 갔으며 둘째 딸은 내섬시 직장(內贍寺 直長) 이배륜(李培倫)에게 시집을 갔고, 셋째 딸은 사용(司勇) 이소생(李紹生)에게 시집을 갔으며 넷째 딸은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理) 최항(崔恒)에게 시집갔고, 다섯째 딸은 김관안(金寬安)에게 시집갔다.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 도는 6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지(摯)는 호군(護軍)이고 둘째 아들은 람(擥)이며, 셋째 아들은 이고, 넷째 아들은 미(攠)이고 다섯째 아들은 설(挈)이며, 여섯째 아들은 경(擎)이다. 첫째 딸은 사복시 주부 박대손(朴大孫)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용궁현감 김모(金模)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한명진(韓明溍)에게 시집갔다.
길창군은 아들 둘을 생육하니, 큰 아들 담(聃)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이고 둘째 아들 총(聰)은 동부지돈녕부사(同同副知敦寧府事)이다. 소윤은 2남 3녀를 생육하였다. 큰 아들은 혜(惠)요 둘째 아들은 염(念)이고, 큰 딸은 내직 허삼(許蔘)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별시위 최한노(崔漢老)에게 시집을 갔으며 셋째 딸은 아직 어리다. 호군은 아들 2명을 생육하였다. 첫째 아들은 환(懽)은 사직이고 둘째 아들 오(悞)는 사정이다. 영춘현감은 2남을 생육하였으니 언(躽)과 체(軆)이다. 용궁현감은 3남을 생육하였으니 부(愽)와 척(惕)과 변(忭)이다. 사직은 2남을 생육하니, 열(悅)과 곤(悃)이다. 호군은 3남을 생육하니 간(僩)과 정(侹)과 필(佖)이다. 부사정은 1남을 생육하니 신(伸)이다. 동지돈녕부사는 3남을 생육하니 은(訔)과 ▨과 譼이다. 동부지돈녕부사는 1남을 생육하니 집(輯)이다. 공의 내외증손은 남녀 합하여 모두 90여 인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높고 밝았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다. 그 의론을 펴고 일을 행하는 데 보이는 것이 또한 지극히 명철하고 바르고 위대하였다. 비록 여러 차례의 환난을 겪었으나 충연히 자득하였다. 평소에도 순순히 예를 좇아 말을 급히 하거나 낯빛을 급히 하지 않았다.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곳간이 자주 비었지만 태연하였다.
정간공(靖簡公)은 성품이 엄숙하였는데 공이 기를 낮추고 기쁜 안색으로써 그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형제간에는 우애를 다하고 후생을 진취케 하는데 힘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므로 학도가 좌우에 모여들었다. 질문이 어려워도 순순히 가르쳤으며 싫증을 느끼지 않아 침식을 폐하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태종께서 공을 믿고 의지하심이 막중하였으므로 매양 큰 일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찾아가 자문하였다. 공이 경사를 들어 참작하여 대답하면 모두가 탄연이 행할만한 것이었다. 경세(經世)의 예문(禮文)과 사대(事大)의 사명(辭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문장이 되어 필서한 것들은 도도하고 평담하며 혼후하되 사리가 맞았다.
문집은 40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었으며,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은 지극히 정미할 뿐 아니라, 예경을 고정한 것이 더욱 큰 업적이 되었다. 공은 일찍이 그 아들 제(踶)를 훈교하여 이르기를, “학문을 하려면 마땅히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이니 뜻이 서지 않으면 만권의 책을 읽은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대학을 읽음에 읽기를 오래하고서야 그 뜻에 의문이 없어졌었는데 다시 읽기를 오래하니 구절 구절 마다 의문이 생기더니 또 읽기를 오래하니 조금씩 탁 트여 관통되더라.”라고 하셨다.
공이 이단(異端)을 논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대함을 먼저 말하고 다음에 그 망령됨을 말하니, 듣는 자가 그 시비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공은 임종을 앞둔 저녁에 아들과 사위들을 앞에 놓고 명하기를, “내 평생에 불교를 좋아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불사를 일지 말라”고 하니 아들과 사위들이 그가 남긴 유언을 준수하여 상례를 치루는 것을 한결 같이 주문공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였다.
아아! 비상한 사람은 늘 나오는 것이 아니며,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때를 얻어 뜻을 행하는 자는 백세에 겨우 한 명 있을 뿐인데 어찌하여 하늘은 공에게 수명을 더 주지 아니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그러나 그 자손이 많고도 현명하니 흐르는 복의 원대한 흐름이 더욱 비칠 것이니 하늘의 도를 어찌 또 알 것인가? 명(銘)은 이렇다.
탁월한 저 선각(先覺)이시요, 대동(大東)의 사표가 되셨도다.
도덕의 창고요, 문장의 종장이었네.
말씀하신 바는 전할 만한 것이고 행하신 것은 본받을 만 하다네
밝은 별과 경사스러운 구름 서리니 태산이며 화악과 같도다.
진퇴와 영욕은 도의 더럽힘과 융성함에 따랐고
밝음을 얻고 나서는 그 업적이 더욱 높아졌도다
위엄을 무릅쓴 전대에 황제가 총광을 내리니
공의 영광일 뿐 아니라 나라와 가문의 경사였다네
낭묘에 출입하면서는 크고 작은 일 나라를 위함이요
선후의 주군이 의지하니 법식과 주관으로 삼았네
그 베풀음 다하지 않았는데 하늘은 어찌 서둘렀는가
오직 충과 효로써 자손에게 끼쳤기 때문에
뫼 언덕 우뚝한 구조에 이 명을 밝혀 새기나니
공의 장구 스러지지 않고 영세토록 아름다운 이름 이어가리라.
정통(正統) 12년(세종 29, 1447년) 6월 일에 계남(季男) 봉정대부(奉正大夫) 행음죽현감 겸권농병마단연판관(行陰竹縣監 兼勤農兵馬團練判官) 준(蹲)이 비석을 세우다.
조선국좌명공신 의정부찬성사(朝鮮國佐命功臣議政府贊成事) 시문충공((謚文忠公) 양촌권선생(陽村權先生)의 묘
유명(有明) 정통(正統) 9년(세종 26, 1444년) 갑자(甲子)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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