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가 소점한 목은 이색선생 선영을 찾아서....한산으로 아리랑의 참뜻을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로지 우리 민족의 한이요. 애환으로만 알고 있다. 왜냐면 우리 민족은 슬플때나 기쁠때나, 널리 불리운 것이 아리랑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최초 문헌기록은, 목은 이색선생의 문집에 수록 되어 있는데 “아리랑 아니랑 아니니요, 아니랑 령국계 유령다”.로 기록 되어 있으며, 고려을 사직하고 개성의 광덕산 두문동 72현인들이 들어가 운둔생활을 하다, 나라 잃은 슬픈 가슴으로,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으로, 참뜻을 쉽게 말하면 “아느냐”는 것이다. “아리랑 아느냐 아라리오, 알동 말동하다 알 듯 모를 듯 하다”.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72현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나물을 캐서 먹고, 나무 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우며, 뱃속 역시 쓰렸을 것이다. 그래서 “쓰리랑”이란 말이 생겼고, “스리랑 아느냐 쓰라리요”.쓰린 것 같기도 하고, 쓰라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망국의 한을 그린 것이 아리랑이라고 하겠다. 정선아리랑의 유래도 72현인중에, 전오륜등 6인이 두문동에서 불으던 것을, 강원도 정선에서 산속 깊숙이 생활하면서, 부른 노래가 정선 아리랑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애국가도 처음에 불을 때에는 은률이 거의 아리랑과 비슷하고, 만주에서 부른 독립운동가 노래 “희망가” 또한 그러하지 않나 본다. 조선 풍수의 대가 무학대사가 소점한, 목은 이색선생묘를 관산하기로 하고, 배낭과 카메라를 챙기고, 충남 서천에 있는 한산이씨 조상묘를 찾아보기 위해 한산으로 출발했다,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 금북정맥인 봉수산(삼도봉) 364, 차령고개를 넘어, 1km 정도 23번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좌측에 김옥균 생가터가 보인다. 백제큰 다리를 건너 곰나루터 651번 지방도를 타고, 백마강 금강뚝으로 향해 가다보니, 2004년 10월 말 용인에서 탄천으로 이장해준 “심공” 집안 산소를 써준일이 있었는데, 금강뚝에서 산소를 보니, 우뚝보이는 붉은 황색이 참좋게 보인다. 이날도 새벽 일찍 천안에서 3시에 출발하여. 장비차와 인부들을 대리고 용인에 4시에 도착하여, 컴컴한 새벽 라이트 불을켜고 작업을 하여, 탄천에 도착, 목염에 꽉찬 부위를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닦은 다음 , 창호지에 쌓서, 좋은자리를 잡아서, 석회로 내광을 짜고, 군대군대 혈토가 나왔으니, 좋은 자리임은 틀림없다. 편히 쉬도록 잘 안장해준 기역이 난다. 어느덧 부여시내 백제 대교를 지나 29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동요 촬영오픈 세트장을 지나, 한산에 도착 한산이씨 시조묘를 보고 “ 한산팔경”중 하나인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목은 이색선생묘를 찾았다. 곧은 마음 곧은 충신 목은 이색선생을 한산이씨 중시조로 본다. “붓만 잡으면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 조금도 거침이 없이 말과 행동이 정밀하고, 품격이 고고하여 넓고 깊은 것이, 강물이 바다에 모여드는 듯 하다.” 이색의 목은집에 “나물 죽도 오래먹으니 맛이 없는데,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우어 주어 늙은 몸이 양생하기 더 없이 좋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두부유래에 대한 최초의 문헌으로 고려말 원나라로부터 전래 된 것으로 볼수 있다. 한산면에서 29번도로 1.3km 정도 직진 하면, 우측에 문헌서원 이정표가 있으나, 안내판은 미흡하다. 그곳에 1km정도 포장된 농로길로 들어서면, 구릉진 산들과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논밭의 농토가 넓고 길은 경사를 이루면서, 골 깊숙이 꼬리를 감춘다. 입구는 낮고 올라 갈수록 조금씩 높은 곳을 볼때, 전형적인 배산임수가 잘되어 있는 고을인 것을 알수 있다 . 영모리에 들어서면, 기린봉이 보이는데, 산의 형태는 구릉지며, 전형적인 마을이다. 주차장에서 촤측능선은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한산이씨 선영 여러기의 묘들이 있고, 서원마당 뜰에는 신도비가 세종15년에 세웠다. 임진왜란때 소실 됐다가 1666년 현종때 방형기단에 팔각지붕을 세웠다. 경내는 사우, 누각, 강당, 진수당, 목은영당, 재실, 전사청, 수호사, 내상문, 외상문, 이종덕 효행비각이 있다. 사우에는 이색. 이곡을,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영당에는 이색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운 백옥 옥돌석상으로 깍은 목은 이색동상이 눈에 띤다. 목은선생 서원으로는 한산의 문헌서원, 청주의신항서원, 장단의임강서원, 영해의단산서원등 각지에 배양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우측을 보면 2기의 묘가 있는데, 맨위에 있는 묘는 조부묘이고, 아래에 있는 묘는 목은이색의 부인 안동권씨묘이다. 목은 이색의묘는 기린봉 자락 서원 좌측 뒤쪽에 자리을 하고 있으며,지금은 돌로 길을 내기위해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맨 위에 있는 묘가 목은 이색묘이고, 아래 있는 묘가 아들 종선묘이다. 이색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무덤 앞에는 망부석,문인상,마상이 각각2개씩 양쪽에있고,오른쪽은 비석이 서있다. 비는 효화스럼과 달리 검소한 비로 ‘목은선생 이색지묘’라고 세겨 있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그의부인 무덤은 문헌서원에서 나와, 한산면과 경계를 이룬 고개, 한산 면사무소 못미쳐 촤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역시 무학대사가 소점 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강물따라 구름따라 마지막으로 지켜본 여강(여주) 남한강 이색의 부친 이곡의 시에 여강은 “만일 이 경치를 붓 끝에 넣으려 한다면 글은 소동파 황곡산이어야 하고 글씨는 안진경 이어야 하겠네.”,,,이색의 시에 여강은 “여강의 형승은 천하에 드문데,사시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구나. 내가 처음 놀때는 마침 여름철 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기에 백척 높은 군루에 두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리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태조가 내린 벼슬을 거절하고, 이색은 초야에 살고 있었다. 이성계가 건국한지 5년이 되는해, 5월 조선건국을 주도 했던, 이색의 제자 정도전. 조준이 꾸민 계획이 였다는 설과, 이성계가 보낸 술이였는지, 여강에 배 한척이 떠있었는데, 그 배에는 목은 이색을 따르는 젊은 선비들과,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이색은 술한병을 꺼내어 술을 마셨다. “나는 죽고 사는 원리를 알아서, 의심이 없다”.란 말씀을 남기고, 그 술을 마신후 이색은 배 위에서, 그의 나이 69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죽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식사를 거두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사신을 파견하고 조문하여, 제사를 지내며 부의를 보내고, 시호를 문정공이라 하였다. 여강에 신륵사란 절이 있는데, 보통 절은 산속에 있는 반면, 신륵사는 유일나게 강변에 있으니 특히 하고, 나옹선사(공민왕때 왕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색 문집에 보면, 이날(우왕2년 1376) 진시에 나옹선사가 세상을 떠나,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봉미산 산기슭에(신륵사) 산마루을 덮었다. 화장하고, 유골을 씼고 있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비가 내렸다. 사리는 155과를 얻었으며, 신령스럽고 광채가 8일이나 나더니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여강은 아는지 지금도 세월속에 묻쳐,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기린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형국 풍수가들이 보는 취향이 다르듯, 그때그때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생각 되는데, 병자년 공의나이 69세때 5월 여강으로 피서가서 병나 아들 종선을 경성에서 불러 왔는데 초7일에 병이 위독 하여 하신말이 "死生之里 吾無疑矣" 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0월에 자손들이 영구를 만들고 한주로 돌아가서 11월갑인일에 가지언덕에 장사 지냈다. 무학대사는 어떠한 생각을 갖고, 이곳에다 소점을 했을까. 한참 생각하게 된다. 무학대사가 소점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양주의 이성계와 맡바꾼 신후지기 남재묘, 내포지방의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에 있는 쌍유혈 청송당묘,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황골 치악산 자락의 봉유혈 원천석묘 ,양주군 남면 상수리에 있는 사패지기 남양홍지묘, 전북 완주군에 있는 전주최씨 대호군묘의 자라혈은 그 당시에 산 중턱에 자리잡은 것이 500년후 도포자락이 물에 적실때 후손이 발복한다더니 1985년 농지개량으로 대아댐을 만들어 도포자락이 언저리를 적시고 있으니 말이다. 한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산맥이 긴 장맥을 타고, 속리산에서 멈춤한다. 백두대간에서 한남 금북정맥으로, 칠현산에서 기봉하여 금북정맥을 타고 고려산(목천) 거쳐, 보령(백월산) 성태산(623.7),만수산(498.7)에서 기복하여, 아미산 (581.4)서 과협으로와 월명산(276.0)서 변화을 주어 기린봉 건지산에서 멈춰 한산이씨 시조묘에서 대혈을 맺는다. 이는 형세가 금 닭이 알을 품고있는 모양이라하여,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묘앞에는 이를 상징하는 3개의 알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색 선생묘는 기린봉에서 내려온 내룡은 산의 형태로 보아, 청룡, 백호의 주산을 보고, 선로하는 풍수가 있듯이, 영모리 또한 그러한 것 같이 여겨진다. 산의 형기를 보고 길지를 찾듯, 보국을 보지 않았나 생각된다. 형기에서는 나무랄때 없는 빼이난 명당이다. 명당은 글자 그대로 맑고 환한땅,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땅 그런 땅을 찾지 않았을까 본다. 풍수의 단계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범안’ 산수의 형태를 보고, 이해하는 단계이고, 둘째가 ‘법안’으로 풍수 이론에 밝은 경지요,다음은 ‘도안’‘계안’으로 정법에 의존한 것이다. 사두득파의 일복요연하게 드러나는 경지이다. 산은 높지도 낮지도 안고, 형세 또한 기린봉 자락에서 내려온 주산은 보는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내려와 혈장에 멈춘다. 주위가 산만하지 안고 고귀한 기린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형국처럼, 고요하고 땅의 대접을 받는 산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좌 청룡은 길게 뻗어 힘차게 내려와 감쌓면서 바람막이를 하여 주고면서, 이색부인묘,종선 어머니묘가 감쌓주고 있다. 우 백호는 선대묘을 쓴 산줄기로 저녁해가 질때까지 포근함을 주며,묘는 비가오면 배수가 잘되도록 자연상태 그대로 산소를 잘렸는데 일조량 또한 많아 따뜻하다. 목은 이색선생의 탄생지 괴시리마을 영해회고시에 “선생이 나시매 사람의 상서가 되시니, 이로부터 단양의 초목이 말랐다.”, 란 구절이 있다. 이는 풍수지리에서는 대인이 태어난다는 뜻이라 하겠다. 목은이 태어난 위치는, 중막골의 산끝자락에 위치한 산중턱으로, 현재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안고, 골 깊숙한 곳에 생가터만 남아 있다.강원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촌 호지마을 괴시리 마을 유래는, 고려말엽 목은이색이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자기 고향인 호지촌의 지형이, 중국을 괴시와 비슷하여, 괴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괴시리 호지촌 마을은 13세기 말엽 함창김씨가 세거했는데, 그 후로 수안김씨, 영해신씨가 입주하였고, 후에 영양남씨가 입주한 고을이다.16세기에는 안동권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볼때, 신흥사대부들이 세거하면서 혼인을 맺은 것을 것을 알수 있다. 영해 지형을 볼 것 같으면 고구려때 우시국 였다가,신라 경덕왕때에는 유린으로 고치고, 권근의 “서문유기”에 보면 해안 중심 역할로 동해안 3대평야중 하나가 영해평야이다. 영해의 옛이름은 예주요. 고려 숙종때 단양. 현재 괴시리는 1,2,3리로 영해군 영해면으로 편입되어 있다. . 영해문에서 동북쪽으로 800m지점에 200여년전 고가옥들이 30여 동이나 있는 전통마을로 주봉이 망월봉에서 뻗어 내려와 팔자 형국을 이루고 있다. 목은 아버지 이곡 서해에서 동해로 이동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한산줄신으로, 한산이씨 5세조인 찬성공의 3째아들 중 막내로 1298년 에 태어났다. 13세때 아버지 찬성공을 여위고, 고향을 떠나 반대쪽인 동해 영해에 도착, 함창김씨 김택의 서랑이 된다. 이곳에서 1320년 9월 7일 23떄 문과에 급제하고, 김택의 사위가 되어, 아들인 이색을 1328년 어머니 함창 부원군인 김씨가 무진 5월 1328년 신미에 공을 낳는다.한편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1332년 35세떄 원나라 정동행성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36살에 제과전시에 차석으로 급제, 450여년전 신라때 최치원 이후 과거급제 상등한 것은 한반도의 자존심을 세운 경사다. 그 이후에 아들인 이색도 나중에 원나라 전시에 급제하여, 부자가 그대로 고려와 중국 양국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이곡은 공민왕때 문화시중을 지냈으고, 당대 대문장가로 성리학에 주류역활을 했으며, 문화인으로는 변계량,권근 등을 배출했다. 고려판 정신대 “공녀” 제도폐지 시킨 가정이곡의 항소문 ㅡ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ㅡ 이 노래는 고려 여인들이 “공녀”란 이름으로, 원나라에 끌려가면서, 비통함을 노래한 가사로 “찔레쫓”이다. 먹을것이 없어 찔레 나무을 꺾어 먹으면서, 조국을 뒤돌아 보며, 간절한 애환깊은 가사의 일부분이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 전쟁중에 1231ㅡ1257년까지, 26년동안 20만명이 끌려같고, 전쟁이 끝나고도 원나라의 지배을 받아, 고려 충렬왕(1275)ㅡ공민왕4년(1355) 80년 동안, 50차례나 원나라에 2000여명이나, “공녀”란 이름으로 끌려가 노리개감이 되었다.그 뿐인가,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자식들까지 계산하면, 수 없이 많다. 공녀로 선발되어 기자오의 딸 같이, 원의 황제 순제의 황후가 된일도 있으나, 원나라의 부녀자 부족으로, 황실의 궁녀로 조달되기도 하고, 군인의 처나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한사람이 더많다. 1년에 2차례 관청에서, 금혼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발동, 40ㅡ50명씩 선발하여, 소녀들을 붙잡아 조기 묶듯이 엮어서 끌고 같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파기하면, 이웃 마을까지 화가 미쳐, 지위를 막론하고 가야 했다. 이는 조선시대 전기 태조ㅡ 세종까지도, 7차례114명, 후기에도 2차례27명이, 공녀로 끌려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말 대학자 이곡“이색의 부친”은, 1335년(충숙왕4)공녀 폐지 요청을, 원에 항소문을 올렸다. “여자들은 모아 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이쁜여자도 있고 미운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내물을 주어 욕심이 채워지면, 미인이라도 놓아주고 다른데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여자를 얻으려면 수십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기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두기도 하고, 이웃마을에 숨겨 놓기도 합니다. 그럼 친족들을 묶어 놓고 매질하여 주리를 트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읍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 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 짚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메어 죽는 사람이 있읍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있고, 대들보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이런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고려 여성 헌납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곡의 상소문에 따르면, 고려여인의 수난은 계속 되다가, 1356(공민왕5)에 중단 된다. 가정공은 고려와 원나라와 성리학의 종장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는 그의 명성과 외교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이러한 애절한상소문을 받아들여진 것이다. 훗날 백성들은 그의 공덕을 기리 감사 드렸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 역사속으로 사라지나, 몽고정부에 배상을 요구해야 하나 역사속에 사라진다. 문장공 목은 이색(1328ㅡ1396) 옛날에 결혼을 할때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그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첫아이를 낳고, 아이가 어느정도 성장할때 까지, 장인집에서 2년에서 10년정도 생활을 했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데리고 강원도 땅을 떠나 시집인 한양으로 왔고, 연암 박지원 선생도 장가 갈때에는 처삼촌이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 많은 책을 가르친바, 많은 기록이 .있다. 이한 이곡또한 마찬가지로, 괴시리에서 이색을 낳아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오게되는 것이 이색나이 2살때이다. 1382년(충혜왕2)14살에 진사 성균시 수석급제, 16세에 벼슬로 시작이곡.이색부자가 고려시대 최상층 명문가로 등장한다.이색의 나이 19세때 장가를 들려고 하자, 당시 명문 집안이 서로 사위를 삼기 위해 많았다. 결국 공은 당대 제일 명문가인 안동권씨에게 장가를 든다. 장인은 권중달.처조부는 우정승 일재한공. 증조부는 첨의 편리책사. 그 외조부는 윤길손이다. 26세(공민왕2)1353년 문과 장원급제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 장원급제 한다. 신축년 11월에 홍건적이 침략하자, 임금이 피난하니 신료들은 모두 흩어 졌으나, 공은 임금 곁을 떠나지 않고 호위하고 참모하여, 많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큰 공을세워 1등훈에 책봉되고, 전지 1백 결과 노비20명을 하사 이로부터 20여년간 정사에 참여하여 하였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왕건교체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킨 충신이다. 고려말 성리학 발전에 종장으로, 유학사상에 기틀을 마련하여 성균관을 신축 관리하고, 과거시험을 6차례를 맡아 권근.이숭인. 김종직. 변계량. 정도전. 맹사성등 고려말 명신학자 132명을 배출 했으며, 한산 부원군을 3차례를 지냈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고려말 3은중한사람으로 이색을 최고 으뜸으로 공을 뽑는다. 고려와 원나라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로 본다. 1374년9월 공민왕이 시해 되고, 1388년5월22일 위하도 회군시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창왕을 즉위 이듬해 창왕을 폐휘하고. 공양왕이 즉위한다. 정도전.정몽주.조준이 동조하는데, 우왕이 신돈 반야의 여종사이에 태어난 가짜로, 공양왕을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반대한 이색은, 결국 파면 된다. 1389년 우왕은 강화도로 쫗겨나고, 창왕을 옹립 파문 하사부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가 창왕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을 주청하여, 이성계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윤이”와(파평군)“이초”가(중랑장) 명나라 황제(주원장)을 찾아가 공양왕은 왕씨가 아닌 이성계의 친척이고, 이성계는 장차 군마를 조련하여, 요동을 침략 할거라고 무고한다. “이초의”을 명나라에 파견했다는 모함을 입어, 이색은 청주옥에 갇히고,혁명에 가담한 제자 정도전.심효생.등이 스승인 이색에 대한 단죄를 요구 이성계 일파에 혁명가로서 냉혹한 일면을 볼수 있다. 청주옥에 있을때에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마땅히 의리가 운명에 순응 할뿐이다”라고하여 태연하였다.공양왕2년(1392)에 목은이색.도은이숭인.양촌권근.인재이종학등 충신들이 죄도 없이 청주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니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대낮이 되기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솟구쳐 성문을 부수며, 넘쳐 들어와서 집들이 침몰하고, 문사관도 물에 빠져 떠내려가니, 입각수란 나무를 붙잡아 겨우 목숨을 면하였다.그 이 이후로 이 고을은 수제가 없었으니, 모두 공이 충성에 감동하여 그랬다고 전한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이색이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니, 석방하라는 일화가 있다. 입각수는 고려때부터 청주목 객사 문에 수십구루 중에서, 남은 한 그루가 청주공원에 있는 은행나무(압각수)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의 전해오는 이야기 “조선의 풍수”의 책에 보면, 충남 서천군 한산에 한산이씨의 조묘가 있는데, 이묘는 군의 사환이었던 사람이, 조상의 뼈를 길지에 묻었기 때문에, 그 자손이 번영해서, 많은 고관이 배출 되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 어느 때인지 확실치 않으나, 한산 군청의 사환을 하면서, 근근이 그날그날 생계를 꾸며 나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군 청사의 중앙에 깔아둔 널빤지가, 해마다 썪어서 못쓰게 되어, 매년 한번씩 새나무로 바꾸어 깔아야 하는 것이었다. 딴 사람들은 이것을 연중 행사처럼 여기고,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사환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노인이나 유식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어 보았다. 드디어 이 군청사터가 길지이며, 생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군의 지기로 정해진 것이고, 그 널빤지가 썩은 그곳이, 바로 지중의 생기가 넘쳐 흘러서, 새어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지기가 왕성한 곳에, 자기 조상을 매장 한다면, 반드시 자기 일가는 사환으로 끝나지 않고, 소응할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야음을 틈타 관가 마루바닦 깊이평분 하였다. 그 이후로 발복하여, 이곡이 나왔고 이색이 나왔다. 이곡은1337년(충숙왕6)한산에 가정을 건립하여 은거의 기반을 삼았을때, 1350년(충정왕2)한산군수 박시용의 부탁으로, 관부의 객사을 중건하기로 한다. 이곡은 한산군 청사의 중앙 청마루 밑을 파보니, 전해오는 데로 조상의 유골을 찾게 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이무럽 관가의 마루 바닦 밑에 조상유골을 암장한 사실이 탄로가 났다. 관가는 금장지로 되어 있어 처벌을 받을 형편이었다.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곡은 ,이 명당의 발복으로 이색 같은 고려충신이 나왔는데, 무덤을 옮기는 것이, 고려 상신을 위해서라도 더 좋은 일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이 뜻을 받들어, 관가을 현재의 면사무소로 이전 자리를 옮겼다. 현재 이 묘소의 묘비에는 고려 호장 이공지묘라고 씌어져 있다. 한산의 발자취와 한산이씨 계보 서천군 한산면은 마한시대 때에는 치리지국 이었다가, 백제때는 마산현.통일신라때는 가림군.고려때는 한산으로 불리다가, 1175년 한주로 승격.조선시대 이르러 한산군으로 여러지역의 주변 중심지역으로 역할을 해왔다. 1910년 서천군 병합이후 한산면이 되었다. 건지산의 당샘물로 빚어낸 한산 소곡주가 유명하며, 한산이씨 가문이 수백년 이어오는 문화유산이 숨을 쉬고 있는 고장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호적 출신으로, 마을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성품이 청렴하여 한산가문의 시조묘가, 성황묘로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한산이씨는 향리가문에서 호장공계(이윤경)와 권지공계(이윤우)로 나누어 지는데, 현제 호장공계의 시조 이윤경에서 시작된다. 한산지방의 호적 후예로, 고려때 향직인 권리호장직을 지냈고, 2세 휘 인간은 정조 호장 벼슬을, 3세 휘 효진은 진사벼슬 봉헌대부 비서랑 벼슬을, 4세 휘 창세는 봉익대부 판도관서에 추증, 5세 휘 자성는 찬성공 진사 정읍감무벼슬을, 5대까지 계승하면서 한산에서 세거하여 삼한갑족의 위상을 세운다. 6,7대 이곡(1298ㅡ1351)과 이색으로 이어지면서 사대부 가문으로 등장한다. 8대 종선대까지 본거지 한산에서 세거하며, 분묘 또한 한산 일원에 분포한다. 자성이후 이곡 형제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일면을 볼수 있는데,(첫째 배.둘째 축.막네 곡.) 곡식이나 가축을 제배하고, 아들 이색7대에서 결실을 거두고, 손자8대 종덕.종학.종선으로 덕과학문.선으로 실천하는 뜻에서인지 3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한다. 첫째 종덕은 1350년 장손으로 목은이 23세때 태어나, 할아버지(이곡)의 생존때 유일한 손자로, 1388년 공의 나이 39세때 이성계가 강화도 회군후 정권을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는데, 아버지 목은이 창왕을 세운 것이 죄가 되어, 극형에 국문 곤장100대 형벌을 받고, 장형으로 즉메에 맞아 죽는다. 이날은 목은이 하루전날이 환갑이었다. 1390년 12월 1일 목은공과 인재공도 역모로 몰려 관직을 박탈하고, 4월에 귀양 간다. 이성계일파는 목은부자을 제1의 걸림돌로 지명하고 제거하려고하였으나, 고구려와 원나라 관계로, 당대 최고였기에 함부로 행하지 못했다. 둘째 인재공도 1392년 32살에 목이 졸려 서거한다. 막내 양경공(이종선)도 한때 유배 생활을한다. 공은 고려와 조선왕조 교체시기에 두형을 비명에 잃고 아버지 이곡을 한산에 장사지내고 집안의 장남 엮활을 다하였다. 아버지 상당하매 3년상의 여보살이와 효성이 지극하여, 그뒤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다.공은 강원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색의 손자대에서 13개파로 나누어진다. 이곡이래로( 이색.종선.계전.이우).5대까지 연속 문과에 급제한 것을 알 수 있고, 이곡의 손자 (종덕.종학.종선.)3명이 문과에 급제한 것과 같이, 8대종선(1368ㅡ1438)의 손자 즉 9대 계주(이개은 사육신중 한사람). 계전(이봉.이파.이우.)3형제가 문과에 급제, 한산이씨는 이색의 3아들 문과급제로 4부자가, 또한 9대 계전(대제학)의 3아들 문과급제로 4부자가 전성기를 이룬 것을 알수 있다. 이계전은 대제학을 엮임 했고 김시습같은 석학을 배출했으며, 당시집권 세력들은 단종과 수양대군을 놓고, 정치적 기로에 섰고, 김종서.황보인이 제거 되자 ,사육신(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단종 복귀 실패로, 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 세조을 도운 250명 공신 한명회가 수장이고 그중에 이계전도 그중 한사람 이었다. 1453년 1등 공신이 된다. 한명회 한테는 못미쳤으나 많은 특권은 가졌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조카 이개가 대엮죄인이 되고 맏형 이계주 집안은 멸문 당한다. 같은 사건속에서 한사람은 엮적 한사람은 공신으로 그심정은 편치 못했을 겄이다. 이렇게 해서 이계전은 사패주지가 주어지고 사육신으로부터 제산몰수한 것을 추가로 하사받는다. 그리하여 권력과 부를 최고의 훈신 관료가 된다. 정변으로 었은 땅이 전국에 있었고, 묏자리로 변하는데, 그는 여주 땅 명당에다 유택을 마련 한다.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의묘가 세종대왕 영능으로 그는 예종이 세종릉의 천장지비로 선장 대면서 찬하명당을 내어주고, 이계전의 묘는 사곡으로 이장하게 된다. 주변의 사신사 (좌청룡 우백호 주작 현무)안에 있던 무덤은모두 쫓겨나고 전답 또한 몰수당 했다. 사신사 안에 있던 영의정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를 조정으로 불러 이인손의 묘택을 달라고 하니 거절할수 없었다, 옛날에 왕능을 천장할때는 중심10리 주변에 일반묘는 이장해야 했다. 6대 이곡의 1332년부터 10대이우 1467년까지, 135년간 문벌의 아성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것을 알수 있다. 그 이후 11대 장윤(1455ㅡ1528)은 현감, 12대 이치(1477ㅡ1530)는 판관에 그쳤는데, 50년정도 한풀 꺾인다. 그이유는 9대 이계전(1404ㅡ1459)의 아들3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나, 차자 이파(1434ㅡ1486) 1482년에 연산군 생모의 폐비 윤씨 사사에 찬성한데 대하여, 전모를 알게된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하여 연산군이 등급 복수를 단행, 이파가 죽은지 20년이 지났어도, 재산을 몰수 형제까지 참사에 명한다. 이에 이봉.이우도 가세가 약화된다.그래서 이장윤도 하급직에 머물고, 이치 또한 마찬가지로 서울을 떠나 보령으로 이주한다. 이치는 보령으로 이주하여, 광주김씨 김맹권의 딸과 혼인하여, 1530년 54세로 생을 마감하여 한산 선영에 안장한다. 이치의 아들 13대 지번.토정 지암.형제로 이어진다. 지번과 지암형제는 어머니 광주김씨가 사망하자 한산 선영에 안장한 부친 이치를 선대 분묘가 습한 것을 안타깝게여겨 부모 산소를 쓰기 위해 호서지방 일대 전부를찾기 시작하던중 보령 고만산에 명당을 점지하고 안장한다. 일명 와우형이다. 그후 지번은 산해를 낳고, 14대 산해는 영의정에 등급 동인의 영수가 된다. 15대 이경전(1586ㅡ1609) 16대 이구(1567ㅡ1644) 3대가 문과에 합격, 아계 이산해의 전통을 계승한다. 이곡, 이색의 두 부자에서 고려말 조선조까지 많은 관리를 배출하여 한 시대를 이끌어온 중추적인 명실상부한 명문 가문으로 자리잡는데 상신4, 대제학3. 청백리6. 공신12. 문과급제195명에 이르고, 500여명 넘는 진사와 생원을 배출 하였다. 현제까지 가문의 얼과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밝혀 주고 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선생 .대전 계룡건설등을 들수있다. 한산이씨의 얼은 청빈함이 현제에 이르기까지 빛을 밝혀주는 것이다. |
'▒ 목은자료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륵사와 목은 이색 (0) | 2007.03.25 |
---|---|
목은 이색 묘(기린형국) (0) | 2007.03.25 |
서(書) 상 도당 서(上都堂書) -정도전- (0) | 2007.03.24 |
주의(奏議) 논 이색 소(論李穡疏) -오사충(吳思忠) - (0) | 2007.03.24 |
명(銘) 한산백 청심당 명(韓山伯淸心堂銘) -이첨(李詹)- (0) | 2007.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