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英祖 87卷 32年 4月 14日 (辛亥) 001 /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천하한량 2007. 3. 23. 03:22

英祖 87卷 32年 4月 14日 (辛亥) 001 /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辛亥/玉果縣監宋明欽上書, 略曰:

臣前秋登對, 直由側席敦迫, 逈出常規。 臣旣入脩門, 逃遁不得, 黽勉趨承, 進退郞當, 寂寥陳說, 又不足以對揚下問, 至今思之, 惶愧欲死。 以邸下聰明濬哲, 於臣長短虛實, 豈有遺照, 而禮遇過隆, 奬諭有加, 旣許以銘心服膺, 又於前執義臣宋能相書批, 追繹臣言, 示以眷眷之意, 噫! 從古踈逖之臣, 得此於上者, 其有幾人? 臣旣感且懼, 不自知其何以致此。 或謂邸下方銳意學問, 急於求助, 適因賤臣之自至, 遂用始之故事, 思以風動四方, 以來賢俊。 信斯言也, 臣一爲死馬骨, 而以基邸下作聖之功, 以開東方太平之治, 則雖滅死無恨。 故臣之懸誠想望, 有倍前日。 側聽半載, 書筵之罕開如舊, 宮僚之罕接如舊, 施諸事爲, 發於辭令, 無可以徵立志、誠意之實效, 則竊想邸下深居宴安所, 用心不過暬御、玩戲之間。 而卽此措辭別諭, 不過爲循例應文之具, 如臣鄙卑固無足言, 而欲如是而感回草菜之遐心, 其亦難矣。 此臣之愕然失圖, 赧然自愧, 不知所以自解也。 伏惟邸下以天縱之姿, 春秋鼎盛, 爲聖爲賢, 只在立志之如何。 又況元孫岐嶷, 已衣若干尺矣, 萬方輔導莫如身敎。 古人云, ‘欲爲惡, 看子不爲。’ 所謂惡者, 不必大叚過惡, 一念懈怠, 便是爲惡。 伏願邸下深究默察, 奮發自强, 搜羅巖穴, 勿拘爵祿, 盡誠招延, 專委輔導, 則盛德大業, 當日月將就。 如臣滓穢, 顧何足有無於其間耶? 臣卽一小吏, 不宜剌口論事。 至於民間疾苦、稼穡艱難、關係七事者, 本欲爲邸下一陳以效執藝之諫。 而自有道臣, 隨事申聞, 靡有遺策, 臣不敢越俎疊床, 謹依門監鄭俠圖上饑民故事, 略擧耳目所及, 以裨邸下仁術之一端焉。 臣伏見今年失稔, 不至辛、壬, 而民生困窮反有甚焉。 蓋數歲間百穀不登, 至若木綿, 乃農民所以上應貢賦下資百需。 而七年被災白徵田稅, 饑寒切身救死不給, 而催糴徵番急於豐年, 桎梏桁楊如待盜賊, 宛轉叫呼, 無復人形。 壯散弱轉, 餓莩塞路, 如非歲末哀痛之敎、停捧之令, 則黎民幾無孑遺矣。 惟其停糴之不早, 以致賑事之過時, 死者不可復生, 流者不可復追, 枯爲鬼魅者, 不可復蘇, 强爲盜賊者, 不可復安。 加以疫癘幷熾, 饑者先病, 散糧饋粥, 相枕而死, 蘇軾所謂 ‘救之之遲, 費多而無益’ 者, 不幸近之。 目今霈澤旁流, 萬物含春, 而哀此惸獨, 獨無生意。 草根木皮不足充饑, 農月已盡, 東作無望, 而春稅催科, 從以鞭督。 最是大同作布, 尤似龜背刮毛, 民情洶懼, 甚於冬間, 其勢又將襁負四散矣。 臣歷考國家傾覆之禍, 無不由盜賊, 盜賊竊發之患, 無不由饑寒, 張角葛榮李特自成之類無非流民也。 近者凄風霜雹, 兩麥皆病, 不幸又有方數百里之旱, 則雖有志者不及爲之謀矣。 思之及此, 澟然寒心。 謹按《周禮》荒政十二, 一曰散利, 二曰薄征。 解之者曰, ‘散利是發公財之已藏者, 薄征是減民租之未輸者,’ 此兩者, 荒政之大綱也。 臣愚死罪, 欲望邸下, 亟詢廟堂, 姑停今春貢賦未輸之類, 使各自爲生。 特罷諸道羨餘別備之法, 使專意脤貸, 則所謂薄征、散利之要, 無踰於此。 又宜崇儉節用, 以廣儲畜, 勞來補助, 以勸耕種, 修器械廣緝捕, 以禦寇竊, 此又鞏固邦本, 消弭亂萌之急務。 伏望留神裁察焉。 臣竊觀湖南一路, 土地廣饒, 歲入租稅, 當經費之半, 若中國之有江淮也。 當壬辰板蕩之際, 七路蕩析, 三京丘墟, 其外應天兵, 內供行在, 調兵給餉, 以基中興之業者, 專藉此路。 當是時祖宗培養之力甚厚, 群賢敎育之功方新, 故人村輩出, 人心向上, 其敵愾死事, 如子弟之衛父兄, 終能挫折凶鋒, 以集大勳。 今紀綱日頹, 風俗日壞。 戊申以後, 人心詿誤, 義理晦塞, 倫常斁絶, 亂賊接踵, 變怪相仍。 蓋其俗尙鬪訟喜夸詐, 賤名檢貴功利, 專以義氣相馳逐, 不肯讀書、守靜, 故難治而易亂。 失今不治, 將不待百年而戎矣。 臣聞移風易俗, 莫先於敎化, 立敎敦化, 莫先於學校, 建學立師, 莫先於尊賢象德。 是以自三代盛時, 以至我朝列聖, 率由是道。 而朱子之於治郡, 首先訪求遺(蹟)〔賢〕, 雖一節之士, 必爲之褒揚建祠, 此實衰世之意也。 臣莅任未久, 姑未暇修興學校。 而臣之縣治, 有所謂詠歸書院者, 卽先正臣金麟厚俎豆之所, 而節死臣柳彭老執義臣李興浡配焉。 建祠已久, 尙未賜額, 廟宇頹毁, 衿紳淒涼。 間有志學而未能者, 問其由, 則 ‘遐荒儉陋, 絶不蓄書, 雖大州校、院, 不藏經籍, 由是貿貿墻面, 壞了許多美質’, 誠可歎惜。 臣伏念麟厚以高資正學, 際遇孝陵, 明良相契, 實吾東千一之會。 而天不欲治, 遽爾賓天, 麟厚痛冤含恤, 如不欲生。 每於諱辰, 獨入深山, 終日痛哭, 屢有除召而不應命。 先正臣宋時烈撰其墓碑, 有曰, ‘以一心而涵三才造化之(竗)〔妙〕, 以一身而任萬世綱常之重。’ 又曰, ‘明知達識, 超乎事物紛紏之表, 深造厚積, 進乎精密正大之域。 至其淸風大節, 聳動震耀, 使之頑廉而懦立, 則雖謂之百世之師可也,’ 卽此數句, 可以想像其造詣樹立之大致矣。 顯廟壬寅, 賜額于長城筆巖書院, 命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 賜諡曰文請彭老卽本縣人, 壬辰之亂, 以成均學諭, 扈駕西行, 有執政宰臣, 奪騎馳去, 彭老徒步還鄕, 與隣邑義士安瑛梁大樸等, 共擧義旅, 推前參議臣高敬命爲帥, 與文烈公趙憲, 同死於錦山, 宣廟聞而愍之, 贈左承旨, 旌其閭, 賜額于光州褒忠祠興浡文靖公李穡之後, 讀書守志, 廢科昏朝, 擧癸亥進士, 丙寅冬, 與同志數十人, 上疏請斬虜使, 辭氣澟烈。 丙子之亂, 以玉果縣監, 聞南漢下城, 痛哭棄官而歸, 隱於巖穴, 累除憲職及大邑, 終不起。 其治縣大有儒化, 士民爲立興學碑, 至今頌慕不衰。 嗚呼! 右三臣俱以微官遠臣, 遇變自靖, 忠節卓然, 居家孝友, 化及隣里, 其德行義烈, 允合祀典。 流風遺愛, 終不可泯, 而無人表章, 將鞠爲茂草, 有識之竊歎久矣。 伏望仰稟大朝, 宣賜恩額, 仍命有司, 考出白鹿書院、國朝文會書院故事, 頒賜經籍, 驛遞以送, 以示褒忠尙賢右文崇化之意, 則本縣士民之懽忻鼓舞, 歌詠聖澤, 固無暇言, 而南方學者, 必多聳動振作。 藏修講習於其中者, 迎致宿儒, 使任訓迪, 修其孝悌禮義, 敎以親上死長, 拔其俊髦, 賓興于朝, 則未及十年, 將見家絃戶誦。 士習丕變, 義理旣判, 志氣日强, 隱然作一長城矣。 豈不愈於養兵十萬乎? 議者或當謂麟厚彭老, 旣各有祠院, 不宜疊設。 然南土僻遠, 文敎未敷, 書院鄕社絶無, 而僅有不比內地諸邑之爭相廣設, 反爲文弊。 況且本院已建於禁令之前, 特以士氣卑弱, 未敢請額, 今若仍其舊屋, 揭以恩額, 則不礙格例, 而收功則大, 此亦興起斯文, 挽回世道之一好機也。 伏乞睿慈, 特垂諒採, 勿以人而廢言。

王世子優批以答: “所陳民事, 令廟堂稟處, 仰稟大朝事, 亦令登對以稟。”

 

영조 87권 32년 4월 14일 (신해) 001 /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명흠(宋明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 가을에 등대(登對)했던 것은 바로 옆 자리를 비워 재촉하심이 보통 규례를 훨씬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미 수문(脩門)에 들어가 도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추승(趨承)하기는 했지만, 진퇴가 법도에 맞지 않고 진달한 말이 적막하기만 하여 또 하문(下問)하심에 대양(對揚)하는 것이 부족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건대,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움으로써 신의 장단과 허실에 대해 어찌 살피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예우가 지나치게 융숭하고 장유(奬諭)를 가하여 이미 가슴에 새겨 복응(服膺)하심으로써 허여(許與)하고, 또 전 집의 송능상(宋能相)의 상서(上書)에 대한 비답에서 신의 말을 추역(追繹)하여 잊지 못해 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아! 옛부터 소원한 신하로서 윗사람에게 이런 대우를 받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신은 이미 감격하고 또 두려운 나머지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혹 저하께서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날카로이 두시어 도움을 구하는 데 급하신 나머지 때마침 신이 스스로 온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곽외(郭隗)로부터 시작하라.’는 고사를 쓰심으로써 사방을 감동시켜 어질고 빼어난 사람을 오게 하리라고 생각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신은 한번 죽은 말 뼈다귀가 되어 저하께서 성인이 되시는 공에 기반이 되고 동방의 태평한 다스림을 열 것이니, 비록 죽어 없어지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의 정성을 드림과 생각하며 바라는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반년 동안 들어보았지만, 서연(書筵)을 드물게 여심은 예전과 같고, 궁료(宮僚)를 드물게 인접(引接)하심이 예전과 같으며, 사령(辭令)에 드러나는 시조(施措)와 사업 중에 입지(立志)·성의(誠意)의 실효(實效)를 징험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깊은 곳에 편안히 거처하시면서 마음쓰는 바가 설어(暬御)·완희(玩戱)에 불과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말을 꾸며 따로 하유한 것도 전례를 좇아 형식적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니, 신처럼 비루하고 천한 사람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겠지만, 이와 같이 하면서도 초야의 멀어진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고자 한다면, 그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놀라 도모할 바를 잃어버리고 얼굴이 붉어져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자처(自處)할 길을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자질에다 춘추가 또 한창이시니,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것은 단지 입지(立志)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또 더욱이 원손(元孫)이 부쩍 자라 이미 약간척(若干尺)의 옷을 입게 되었으니, 온갖 방도로 보도(輔導)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악한 일을 하고자 하다가도 아들을 보고는 하지 못한다.’ 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악’이란 반드시 대단한 허물이 아니요, 하나의 생각이 해이해지고 나태해지면 곧 악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깊이 궁구하시고 조용히 살피시어 분발하고 스스로 힘쓰시며, 초야(草野)에 숨은 선비를 널리 구하여 작록(爵祿)에 구애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초빙(招聘)하여 전적으로 보도(輔導)를 맡기신다면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마땅히 일취 월장할 것입니다. 신처럼 하찮은 사람이야 돌아보건대 그 사이에 있고 없는 것이 어찌 족히 영향(影響)이 있겠습니까? 신은 곧 일개 소리(小吏)이니, 입을 놀려 논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간의 질고(疾苦)와 농사의 어려움과 칠사(七事)에 관계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저하를 위하여 한번 진달하여 집예(執藝)의 간하는 것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본디 도신(道臣)이 있어 일마다 신문(申聞)하여 빠뜨린 계책이 없으니, 신이 감히 권한을 넘어 거듭 말씀을 드릴 수 없겠습니다만, 삼가 송(宋)나라 때의 문감(門監) 정협(鄭俠)이 기민도(饑民圖)를 그려 올린 고사에 의하여 대략 이목(耳目)에 미친 바를 들어 저하의 인술(仁術)에 한 가지라도 보탬이 될까 합니다. 신이 삼가 올해 실농한 것을 보건대, 신해년·임자년과 같은 경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민생의 곤궁함은 도리어 더 심함이 있습니다. 대개 몇 해 동안 백곡이 풍등(豊登)하지 않았고, 목면(木綿)의 경우, 농민이 위로는 공부(貢賦)에 응하고 아래로는 온갖 비용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 동안 재해를 입었음에도 전세(田稅)를 터무니없이 징수하고 기한(饑寒)이 몸에 절박하여 죽음을 면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데, 환자를 재촉하여 번포(番布)를 징수하는 것이 풍년 때보다 급하여 수갑과 차꼬를 채우는 것이 마치 도적을 다루는 것과 같으니, 이리저리 뒹굴면서 울부짖어 다시는 사람의 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장정들은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나뒹굴어 굶어죽은 시체가 길을 메웠으니, 만약 연말의 애통한 교서와 정봉(停捧)하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백성들은 거의 살아 남지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환자를 정봉하는 일이 빠르지 아니하여 진휼하는 일을 때를 넘기게 만들었던 것이니,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고, 유리(流離)한 자를 다시 부를 수 없으며, 말라 죽어 귀매(鬼魅)가 된 자는 다시 소생시킬 수 없고, 마지 못해 도적이 된 자는 다시 안집(安集)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여역(癘疫)까지 아울러 번져 굶주린 자들이 먼저 병이 들어 양식을 흩어 주고 죽을 쑤어 먹여도 잇달아 죽으니, 소식(蘇軾)이 이른바 ‘구해 주는 것이 더디어 경비(經費)는 많이 들었으나 도움이 없다.’고 한 것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지금 크나큰 은혜가 흘러 넘치고 만물이 봄기운을 머금고 있습니다만, 이 불쌍한 의지할 때 없는 외로운 백성들은 유독 살아날 뜻이 없습니다. 초근 목피로도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고 농사짓는 달이 이미 다 지나가도 동작(東作)의 희망이 없는데, 봄 조세(租稅)를 다그쳐 독촉하고 거기에다가 채찍질까지 따릅니다. 가장 심한 것은 대동 작포(大同作布)로서 거북이 잔등의 털을 긁는 것과 같은지라, 민정(民情)의 어수선하고 두려움이 겨울보다 심하니, 그 사세로 보아 또 장차 아이를 포대기에 꾸려 업고 사방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두루 살펴보건대, 국가가 뒤집혀 망하는 화는 도적이 절발(竊發)하는 데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고, 도적이 절발하는 근심은 기한(饑寒)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으니, 장각(張角)·갈영(葛榮)·이특(李特)·이자성(李自成)의 부류는 유민(流民) 아님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싸늘한 바람과 서리·우박에 양맥(兩麥)이 모두 시들었는데, 불행하게도 또 사방 수백리에 한재(旱災)가 들었으니, 비록 뜻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미처 도모하지를 못할 형편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몸이 오싹하며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삼가 《주례(周禮)》의 황정(荒政) 열두 가지 인을 살펴보았더니, 첫째는 산리(散利)요, 둘째는 박정(薄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산리는 곧 이미 저장해 둔 공재(公財)를 흩어주는 것이고, 박정은 백성들이 채 바치지 못한 조(租)를 감해 주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황정(荒政)의 큰 강령(綱領)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만, 저하께서 빨리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시어 우선 올해 봄의 공부(貢賦)로서 미처 바치지 못한 것을 정지토록 해서 각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러 도의 잉여(剩餘)를 따로 준비하는 법을 혁파하여 진대(賑貸)에 전적으로 뜻을 기울이게 한다면, 이른바 박정과 산리의 요점이 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마땅히 검소를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저축의 길을 넓히며 오는 사람을 위로하고 보조해 주어 밭갈고 씨부리는 것을 권하며, 병기를 수리하고 집포(緝捕)하는 길을 넓혀 도적을 막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또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고 난의 싹을 소멸시키는 급무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정신을 기울여 재단하고 살피소서. 신이 그윽이 호남 한 도를 보건대, 토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들어오는 조세(租稅)가 경비의 반을 충당하니, 마치 중국의 강회(江淮)지방과 같습니다. 임진년의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칠도(七道)가 판탕(板蕩)되고 삼경(三京)이 폐허가 되었는데, 밖으로는 천병(天兵)을 응접하고 안으로는 행재소(行在所)에 이바지하면서, 병졸을 조련하고 군량을 공급하여 중흥의 대업에 기업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도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종(祖宗)의 배양하신 힘이 심후하고, 뭇 어진 이를 육성(育成)한 공이 바야흐로 새로웠기 때문에 인재가 배출되고 인심이 향상되어 적개심을 가지고 왕사(王事)를 위해 죽는 것을 마치 자제가 부형(父兄)을 호위하듯 하여 끝내 흉봉(凶鋒)을 좌절시켜 대훈(大勳)을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강이 날로 쇠퇴하고 풍속이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신년 이후 인심이 그릇되어, 의리는 캄캄하게 막히고 윤상(倫常)은 썩고 끊어지며, 난적(亂賊)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가 하면 변괴(變怪)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대개 그 풍속이 싸움과 송사를 숭상하고, 과시와 거짓을 좋아하며, 명검(名檢)을 천시(賤視)하고 공리(功利)를 귀하게 여겨, 전적으로 의기(義氣)로써 서로 치축(馳逐)하면서 글을 읽고 조용함을 지키는 것을 기꺼이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다스리기는 어렵고 어지러워지기는 쉽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고 다스리지 못한다면, 장차 백 년을 기다리지 아니하여 오랑캐가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풍속을 바꾸는 데 교화보다 앞서는 것은 없고, 교화를 세우고 두터이 하는 데는 학교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는 데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이고 본받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의 성시(盛時)로부터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리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군현(郡縣)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맨먼저 그 유현(遺賢)을 찾아 비록 한 가지 절행을 가진 선비라 할지라도 반드시 포양(褒揚)하고 사당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실로 쇠퇴한 세상을 위하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신은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학교를 수흥(修興)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이 다스리는 현(縣)에 이른바 영귀 서원(詠歸書院)이란 것이 있으니, 곧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를 향사(享祀)하는 곳이며, 절사신(節死臣) 유팽로(柳彭老)와 집의(執義) 이흥발(李興浡)을 배향(配享)하는 곳입니다. 사당을 건립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사액(賜額)을 하지 아니하였고 묘우(廟宇)는 퇴락되었으니, 선비들이 쓸쓸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간혹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능하지 못한 자가 있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즉 ‘먼 지방의 검박하고 누추한 곳이라 서책을 간직해 둔 것이 전혀 없으며, 비록 대주(大州)의 향교나 서원이라 할지라도 경적(經籍)을 간직해 두지 않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담장을 대한 듯 눈앞이 캄캄하여 허다한 아름다운 자질을 무너뜨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탄하여 아까워할 만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김 인후는 높은 자질과 바른 학문으로서 효릉(孝陵)을 만나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계합(契合)하였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1천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다스리고자 아니하여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매, 김인후는 원통한 나머지 피를 머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휘신(諱辰)에 혼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종일 통곡하였고,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묘비(墓碑)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한 마음으로 삼재(三才)를 조화하는 묘(妙)를 포함했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綱常)의 무거움을 맡았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밝고 통달한 지식은 어지러운 사물(事物)의 밖에 초월하였고, 깊이 도달하고 두터이 쌓은 것은 정밀하고 정대한 영역에 나아갔다. 그 맑은 풍채와 큰 절개(節介)는 기운을 용동(聳動)시키고 빛을 떨쳐 완만(頑慢)한 자는 청렴하게 하고 겁장이는 바로 서게 하였으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해도 가하다.’고 하였으니, 이 몇 구절만으로도 그 조예와 수립이 크게 이루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묘(顯廟) 임인년에 장성(長城)의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사액하고 이조 판서, 양관(兩館) 대제학의 추증과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릴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유팽로는 곧 본현(本縣)의 사람으로서 임진년 난리 때 성균 학유(成均學諭)로서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서행(西行)했는데, 집정 재신(執政宰臣)이 말을 빼앗아 달려가 버리자, 유팽로는 도보로 고향에 돌아와 이웃 고을의 의사(義士) 안영(安瑛)·양대박(梁大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전(前) 참의 신(臣) 고경명(高敬命)을 장수(將帥)로 추대해 문열공(文烈公) 신(臣)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죽었으니, 선묘(宣廟)께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좌승지를 추증하고 정려(旌閭)하였으며,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祀)에 사액하였습니다. 이흥발은 곧 문정공(文靖公) 신 이색(李穡)의 후손으로서 글을 읽고 지조(志操)를 지켜 혼조(昏朝) 때 과거를 폐하였다가 계해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병인년 겨울에는 동지(同志) 수십 인과 더불어 상소하여 오랑캐 사신을 참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말씨가 늠렬(凛烈)하였습니다. 병자년의 난리 때는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서 남한 산성이 함락되었음을 듣자 통곡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암혈(巖穴)에 은거하였으며, 누차 헌직(憲職)과 큰 고을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현을 다스림에 유화(儒化)가 크게 있었기에 사민(士民)들이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지금까지 송모(頌慕)함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아! 위에 말한 세 신하는 모두 미관(微官) 원신(遠臣)으로서 변란을 만나자 자정(自靖)하여 충절(忠節)이 빼어났으며, 집에서 효우(孝友)하여 교화가 인리(隣里)에 미쳤으니, 그 덕행과 의열(義烈)은 사전(祀典)에 진실로 합당합니다. 끼친 유풍과 남긴 사랑을 끝내 민멸시킬 수 없을 것인데, 표장(表章)하는 사람이 없어 장차 그 유적(遺蹟)에는 풀만 무성할 것이니,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윽이 탄식한 지 오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大朝)께 품하여 은액(恩額)을 내려 주시고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송조(宋朝)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국조(國朝) 문회 서원(文會書院)의 고사를 상고해 내어 경적(經籍)을 반사(頒賜)하되 역(驛)을 통해 보내주시어 충성을 포장하고 어진 이를 숭상하며 문교(文敎)를 높이고 교화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본현의 사민(士民)들이 기뻐 춤추고 거룩한 은택을 노래함은 진실로 말할 겨를도 없을 것이고, 남쪽의 학자들이 반드시 용동(聳動)하고 진작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장수(藏修)·강습(講習)하는 자가 있으면 숙유(宿儒)를 맞이하여 훈적(訓迪)을 맡게 하고 효제(孝悌)와 예의(禮義)를 닦게 하되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가르친 뒤에 그 중에서 빼어난 사람을 뽑아 조정에 천거한다면, 10년이 채 되지 아니하여 장차 집집마다 풍악(風樂)이 울리고 마을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이 크게 변하고 의리가 이미 판가름 나서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질 것이니, 은연중에 하나의 장성(長城)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혹 당연히 김인후와 유팽로는 이미 각각 사원(祠院)이 있으니, 첩설(疊設)할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토(南土)는 궁벽하고 멀어 문교(文敎)가 펴지 아니하여 서원이나 향사(鄕社)가 거의 없으며, 약간 있다 해도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에서 넓게 설치하기를 서로 다투어 도리어 문폐(文弊)가 되는 것에 비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또 본 서원은 이미 금령이 있기 전에 세웠고 특히 사기(士氣)가 미약하여 감히 사액을 청하지 못했던 것이니, 지금 만약 옛집은 그대로 두고 은액(恩額)을 걸기만 한다면, 격례(格例)에도 방해되지 않고 공을 거둠이 클 것이니, 이는 또한 사문(斯文)을 흥기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가 예자(睿慈)에 바라건대, 특별히 이해하여 채납(採納)하시고 사람이 불초하다 하여 말을 버리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지(批旨)를 내려 답하기를,

“진달한 바 민사(民事)는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대조께 우러러 품할 일은 또한 등대(登對)하여 품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3 집 61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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