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벽당시집 ▒

임벽당의 남편 유여주(兪汝舟)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 일생을 마쳤다. 명필이었다.

천하한량 2007. 3. 16. 17:40
유여주(兪汝舟)

성명(姓名)

 유여주(兪汝舟)

본관(本貫)

 기계(杞溪)

시대(時代)

1476(성종 7)~1538(중종33)

자(字)

사성(帥聖)

호(號)

임벽당(林碧堂)

이력(履歷)

유여주(兪汝舟)    1480(성종11)~?

조선의 서예가. 자는 사성(帥聖), 호는 임벽당(林碧堂), 기창(起昌)의 아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추천 받았으나 급제 못하고,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 일생을 마쳤다. 명필이었다.

 

 

<서천군지>

第8編 성씨인물(姓氏人物)

第2章  인물(人物) 第6節 문학(文學)

유여주(兪汝舟)

유여임(兪汝림)의 동생이다. 현량(賢良)에 뽑히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명맥이 같았다.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때 물러나와 숨어서 임벽당(林碧塘)을 지어 호를 쳐사(處士)라 하였다.  그의 처 김씨(金氏)의 시에

땅은 궁벽하니 오는 사람이 적고

산은 깊숙하니 속쇠의 일은 적고나

집이 가난하여 말술이 없으니

잘 사람도 밤이 되니 돌아가네

라 하였다.  뒤에 이시는 퍼져서 중국사람들이 다투어 외웠다 한다.

묘(墓)

 

부(父)

 

모(母)

 

배(配)

 

자(子)

 

녀(女)

 

형제(兄弟)

 

문헌(文獻)

1. 杞溪兪氏族譜(奎1813), 兪命賚等(朝鮮)編.

          8卷·別錄·附錄 合 3冊 地圖 木活字本 28.3×20.5cm.

          四周單邊 半郭:28.1×19.7cm.

          14行 28字.

          序:諭命賚.

          跋:兪棨·兪命成·兪命健·兪命聃.

     1704년(肅宗 30) 兪命賚 兪命咸 兪命健 등이 편찬·간행한 兪汝霖을  중심으로  하는 杞溪兪氏派譜이다. 表題는 「杞溪譜」이다. 兪命咸의 跋에 따르면, 杞溪兪氏族譜는  1645년(仁祖 23, 乙酉)兪棨 兪철 등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이 甲申譜는  乙酉譜와  趙種耘의 《氏族源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비교적 초기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派譜이며, 수록양식에 있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1)  先男後女法에  따라 諸子女를 出生順으로 실었는데 庶子女는 「庶」로 표기하였다. (2) 女壻도  四代를  실었는데 女壻의 女壻 및 그 後孫을 싣기도 하였다. (3)  無男의  경우는  「無男」으로, 夫妻早歿로 立後하지 않은 경우는 「無後」로 표지하였다. (4) 一面을 8段으로  구분하였다. 世譜 8卷, 別錄, 附錄 합 3冊인데, 제1책에는 兪命賚의 序, {권1}  初篇,  {권2} 察訪公派, {권3} 杞溪公派上, 제2책에는 {권4} 杞溪公派下, {권5} 府使公派, {권6}  肅敏公派, {권7} 進士公派, {권8} 將仕公派, 名字講定錄, 제3책에는 別錄, 墳塋圖,  附錄, 兪棨의 乙酉譜舊跋, 兪命咸 兪命健 兪命聃의 跋이 각각 실려있다. 初篇은 杞溪의  위치 연혁과 始祖 兪義臣으로부터 19代까지의 世系가 실려 있는데, 12代까지는  全體世系가, 13代∼19代까지는 {권2∼8}의 내용을 제외한 世系가 실려 있다.  {권2}:察訪公派의 世系, 派祖 察訪公은 兪汝霖의 형인 汝諧의 아들 璟으로, 그의 子 定이 無後하여  璟과 사촌인 관의 네째아들 洵으로 繼後하였다. 洵을 포함 8代(14代∼21代)가  실렸는데  血緣系譜로 보면 {권4} 杞溪公派下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권3}:杞溪公派上으로  兪汝霖의 長男인 杞溪府院君 관의 長男 灝으로부터 8代(14代∼21代까지의  世系이다.  {권4}:  杞溪公派下는 관의 3子 泓으로부터 7代(14代∼20代)까지의  世系이다.  {권5}:府使公派世系, 兪汝霖의 제2자 瑞興府使 縝이 無後여서 弟 絳의 제2자 涵으로 繼後하였는데  涵과 그 後孫 7代(14代∼20代)를 수록하였다. 血緣人으로는 {권6} 肅敏公派의 世系에  이어진다. {권6}:肅敏公派 世譜, 유여림의 제3자인 絳(肅敏公)의 子 泳으로부터  8代까지 실려있다. {권7}:進士公派 世系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유여림의 제4자  윤이  無男이어서 그의 女 3인과 後孫 4代의 世系이다. {권8}:將仕公派 世系, 派祖 緯는 유여림의  弟 汝舟의 아들이다. 緯의 子 浚으로부터 8代가 실려 있다. {권8}끝에 刊記가  있다.  제2책 끝에 「名字講定錄」이 있는데 20代 彦字行 이하 5世의 行列이다. 「別錄」은  世祖와의 관계때문에 族譜에 올릴 수 없는 兪應孚와 그 弟가 卷首에 실려 있고  譜牒이  없어서 世次가 始祖에 연결되지는 않지만 杞溪 同貫임이 확실한 10派의 世系가  적혀  있다. 「墳塋圖」는 始祖 兪三宰를 비롯한 14인의 墓圖와 설명이다. 유여림의 7代祖  ??, 6代祖 承桂, 高祖 成福, 曾祖 輯, 祖 解 및 비 朴氏, 父 起昌, 本人, 絳, 泓, 지,  ??, 晳 등의 墳山圖이다. 承桂와 成福의 墳山圖에는 位土 관계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附錄」은 墓誌銘, 神道碑銘, 行狀, 諡狀 등이다. 대상인물, 글의 종류, 撰者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解(墓表 金億齡), 汝諧(墓碣銘 金淨), 汝霖(神道碑銘 洪彦弼),  관(墓表 宋寅), 絳(神道碑銘, 諡狀 李延龜·張維·宋時烈), 윤(墓表 陳復昌), 灝(墓表  金貫榮), 泓(行狀 神道碑銘 成渾·鄭斗卿·張維), 涵(墓誌銘 李好閔), 大脩(墓碣銘  崔??), 大進(墓碣銘 兪棨), 大逸(墓碣銘 鄭斗卿),  省曾(福道碑銘·墓誌銘·墓表,  李景奭·兪棨·鄭澔), 守曾(墓誌銘 夏益),  養曾(墓誌銘·墓表陰記  兪棨·宋時烈),  懋曾(墓碣銘 兪棨), 希曾(墓碣銘 權尙夏), 伯曾(神道碑銘·諡狀 南九萬·趙동·朴世堂),  榥(神道碑銘 宋時烈), ??(行狀·神道碑銘·墓誌銘 金昌協·宋時烈·南九萬),  棨(神道碑銘·墓誌銘 宋時烈·尹拯), 晳(墓碣銘 權尙夏), 命胤(墓表·碑碣銘 宋時烈), 命弼(墓表  宋時烈), 命舜(墓誌銘 金昌翕). 편찬·간행의 중심인물들은 18代 命字行列중에서도  肅敏公派와 忠穆公派의 兪命賚 命健 命弘 命雄 命咸 命聃이다. 兪命賚 命健은 乙酉譜의  편찬에 참여했던 兪??의 姪子이며 인쇄비용은 兪命弘 命雄 兄弟가 주로 부담한 것 같다.

기타(其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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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신라 아찬공 유삼재(阿飡公 兪三宰)의 묘소

-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동(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신라(新羅) 때 아찬(阿飡)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 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후 기계 유씨는 의신(義臣)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승추(承樞)의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와 동정(同正) 진적(晋迪)의 계통인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 크게 열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기계 유씨는,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 여해(汝諧)의 후손인 전서(典書) 현(顯)의 아들 효통(孝通)이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하여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문명(文名)을 떨쳤다.
  
한편,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의 유명한 응부(應孚)는 기계 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특히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壯)하고, 활쏘기를 잘하여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응부(應孚)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평안도 병마절제사(平安道兵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었다.
  
친국(親鞠)을 받을 때 세조(世祖)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하니 응부가 말하기를 "잔치 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의 고발한 바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하였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다리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가죽과 살이 다 익었다. 응부는 얼굴빛이 변치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는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을 듣고 아내가 원통해 한 것은 그의 원통한 죽음이 아니라 살았을 때 한번 잘 먹고 잘 자보지 못했던 가난을 가엾이 여겨 울었다고 하며, 관에서 역적이라 하여 가산을 몰수하는데 갖고 나간 것이 짚자리 한 장  뿐이었다고「동각잡기(東閣雜記)」와 「추강집(秋江集)」에 적고 있다.
  
사재감 주부 여해(汝諧)의 7세 손 참판(參判) 해(解)의 아들인 기창(起昌)은 연산군 때 만포진 첨제절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직간(直諫)을 하다가 다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이들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죽음의 사자(使者)가 바다를 건너오는가를 기다리고 살았다.
  
어느 날 기창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 사람과 영결(永訣)한 후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그 도사가 가져온 전갈은 교사령(絞死令)이 아니라 중종반정의 소식과 그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그의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기용한다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갈을 보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겠다."하며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통곡하고는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하고, 자신은 고향인 비인(庇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 신주(神主)에 옛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만 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 그 많은 국신(國臣) 가운데 연산군에게 학대받고 연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은 홍언충(洪彦忠)과 유기창(兪起昌) 두 사람 뿐이었다.
  
기창의 아들 여림(汝霖)과 여주(汝舟)는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의 기묘현량(己卯賢良)으로, 형인 여림은 예조 판서를 지냈으나 아우 여주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書藝)로 일생을 마쳤으며 글씨에 뛰어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림의 아들 강(絳)은 중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병조 참판과 한성부 판윤, 공조·호조 판서를 지냈다.
  
특히 그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글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의 유생(儒生)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서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叛事件)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삼등공신(平難三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던 홍(泓)은, 여림의 손자이며 생원(生員) 관(관)의 아들로 종계변무(宗系辨誣)에도 공을 세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석학(碩學) 조 식(曺 植)에게 극찬을 받았다.
  
대수(大修 : 진사 함의 아들)는 선조 때 주서(注書)와 전적(典籍)을 거쳐 형·호·예조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 10년 간 외직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대칭(大稱 : 강의 손자)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대일(大逸)의 아들 백증(伯曾)은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 아부하지 않기로 유명하여 말직에만 머물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공을 세워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고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하여 <충박신(忠朴臣)> 또는 <유충박(兪忠朴)>으로 불리웠다.
  
그가 경상감사로 나가 윤선도(尹善道)의 실정(失政)을 녹박했고, 대사간으로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으며, 이조 참판으로서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下獄)을 청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부총관(副摠管)으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여 화의(和議)를 주장한 윤 방(尹 昉)과 김 유(金 유)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는 등 강직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누차 직언(直言)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탑(御榻)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므로 인조도 백증(伯曾)의 고집 때문에 무척 골치를 앓았다고 하며 <유고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다.
  
효종조의 명신이며 학자로 유명한 계(棨 : 참봉 양증의 아들)는 윤리(倫理)와 예법(禮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항거했던 인물로,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숙종(肅宗) 때 간행된 그의 저서(著書)인「가례원류(家禮源流)」를 중심으로 노소론(老少論)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그외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글씨에 능했던 하익(夏益 : 수증의 손자)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서인(西人)의 가장 과격한 문신(文臣)으로 남인 타도에 앞장섰던 명일(命一 : 선공감역 비의 아들),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한 소론 일당을 숙청했던 명웅(命雄), 영조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던 명홍(命弘) 등이 뛰어났으며, 목사(牧使) 명건(命健)의 아들 최기(最基)는 병조 참의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언술(彦述)과 더불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밖의 인물로는 1787년(정조 11)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언호(彦鎬 : 우윤직기의 아들)가 좌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렸고, 한전은 순조 때 백년(百年)이래의 대 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아 서예(書藝)에 능했던 한지(漢芝),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환(莘煥),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판서에 오른 치선(致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한성부민회장(漢城府民會長)을 지낸 길준(吉濬)은 새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기초한 진오(鎭午)와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기계 유씨를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