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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 행장(行狀)

천하한량 2007. 2. 3. 21:09
 행장(行狀)
유원 고아중대부 하남부 노총관 겸본로제군 여로총관 관내권농사 지하방사 증집현직학사 경거도위 고양후 시 정혜 한공 행장(有元故亞中大夫河南府路摠管兼本路諸軍與魯摠管管內勸農事知河防事贈集賢直學士輕車都尉高陽侯諡正惠韓公行狀)

이곡(李穀)

공의 이름은 영(永)이고, 자는 정보(貞甫)이며, 고려(高麗)의 청주(淸州)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은 광윤(光胤)이니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 예빈경(朝請大夫禮賓卿)에 이르렀고, 돌아가시자,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를 증직하였다. 조부의 이름은 강(康)인데,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유술(儒術)로써 충렬왕을 도와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脩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돌아가시자, 시호를 문혜공(文惠公)이라 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기(謝奇)이니,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 우사의 대부 지제고(朝請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다. 공이 귀하게 됨으로써, 강(康)에게 중순대부 첨대상 예의원사 상기도위(中順大夫僉大常禮儀院事上騎都尉)를 증직하고, 추숭하여 고양현백(高陽縣伯)에 봉하고, 비(妣) 임씨(任氏)는 고양현군(高陽縣君)에 추봉했다. 여러 번 증직하여, 아버지 사기(謝奇)에게는 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輕車都尉)를 주시고, 고양현후(高陽縣侯)로 추봉하시고 비(妣) 채씨ㆍ정씨는 같이 고양군 부인에 봉작되었다. 공은 정씨의 소생으로 처음에 본국에서 세신 대가(世臣大家)의 자제를 보내 인질로 삼을 때, 공의 아버지도 선발에 끼게 되어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오게 되었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젊었을 때부터 황제 계신 곳에서 자라게 되었고, 글을 중국에서 배우다가 대덕(大德) 7년에 뽑히어 숙위(宿衛 황제를 보호하는 친위병)에 충군되고, 11년에 인조를 잠저(潛邸)에서 모실 적에 임금에게 알려졌다. 지대(至大) 초에 제(制 황제의 명령)로 승무랑 자 무고 제점(承武郞資武庫提點)을 받으시고, 황경(皇慶) 원년(元年)에 수무고사(壽武庫使)를 받으시고, 연우(延祐) 원년에는 이기고(利器庫)의 사(使)로 옮겼다. 이때에 명종이 바로 주왕(周王)에 봉하게 되어 가실 때에 세갑(細甲)을 인종에게 청하니 임금께서 주시기로 하였는데, 강절성(江浙省) 승상(丞相) 답실만(答失蠻)이 이때에 무비경(武備卿)이 되었으므로, 무비시(武備寺)에 이르러 창고에 보물로 두었던 것을 가져 가려 하므로 공이 말씀하시기를, “경은 듣지 아니하였습니까. 세조께서 상의(尙衣)와 어개(御鎧)로서 내려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써 무비고의 주장되는 보물로 두라’ 하셔서 후대의 계승하는 황제로 혹 병거(兵車)를 타실 때에나 사용하는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오면, 비장하여 대대로 보물로 여기며 지켜와서 무비시(武備寺 시(寺)는 관청)의 관리들이 이것을 받들기에 더욱 삼가 조심하였습니다.” 하니, 경이 말하기를, “내가 그저 가져다 보려고 함이요, 다른 뜻은 없소이다.” 하므로, 보여 주었더니, 곧 가지고 달아나는지라, 공이 큰소리로, “경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고, 뛰어가 손수 빼앗았으나, 겨우 투구와 창을 얻었을 뿐이었다. 경이 도로 와서 빼앗거늘 공이 말하기를, “내 머리는 뺏을 수 있으되, 이것은 뺏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내 끌어안고 우니, 경도 어찌할 수 없어, 다만 갑옷만을 가지고 왕저(王邸)로 가서 바쳤다. 이 몇 달 뒤에 인종이 이 갑옷을 가져오라 하니, 주관하는 자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노하시여 경을 극형(極刑)에 처하였으나, 끝까지 투구와 창의 사건을 가지고 임금에게 고한 사람은 없었다. 삼고(三庫 자무고ㆍ수무고ㆍ이기고)에 모두 상방(尙方)의 용기를 비장했는데, 공이 재삼 열쇠를 관장하고 잘 삼가고 조심하여 조금이라도 잃음이 없었다. 경이 형벌을 받게 됨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더욱 공을 중히 여겼다. 연우(延祐) 경신년에 나아가 금주(錦州) 고을을 다스렸고, 지치(至治) 임술년에 고주(高州)의 자사(刺史)로 옮기니, 고주는 예전 해글안(奚契丹)의 땅으로 여러 번 싸움을 겪어 백성과 물건이 씻어낸 듯이 없어졌고, 변방의 오랑캐 잡종들이 모여 밭 갈고 누에치는 생산업을 하지 않고 항상 도둑질로 일을 삼았다. 공이 그것을 알고 스스로 검속하고 덕화로써 힘써 이들을 정성껏 감화시키되, 진실로 도둑질을 고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게 되면 엄하게 법으로써 다스려 조금도 가차없이 하니 한 지역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였다. 천력(天曆) 원년에 또 의주(懿州)로 발령을 받았으나 제(制 명령서)가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어사대(御史臺)에서 공을 천거하여 풍헌(風憲)에 임명할 만하다 하여서 다시 고쳐, 하서 농북도 첨렴방 사사(河西隴北道僉廉訪司事)를 받았다. 바야흐로 군사가 일어나려 할 때 영하(寧夏)의 토호(土壕)가 위엄을 빌리고 틈을 타 헌사(憲司)를 막고 파괴하려 하니, 공이 수레에서 내려 곧 본도(本道)의 점리(點吏 아전들)의 장을 이일때문에 파직해 버리니,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갔다. 총관(摠管)흔도(忻都)와 문관 추관(推官 법관)이 외축(畏縮)하여 병을 칭탁하였는데, 공이 홀로 감사(監司)를 일년 동안 지내니, 풍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또 영전(營田)에 수리를 주관하는 자에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80여 명을 쫓아내고, 이내 청렴하고 능한 자를 뽑아 하도(河道)를 보수하니 백성이 힘을 입어서 편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하(寧夏)가 변두리에 있어 먼 곳의 여행객이 죽으면 빈장할 수 없으므로 해골이 드러남에 이르렀었다. 공이 이에 경력(經歷 행정관)으로 있는 장규(張珪)로 하여금 담을 쌓고 집을 지어 그 안에다 570 여구를 거두어 두고, 천자문으로 순번을 기록하여, 그 성명과 관향(貫鄕)을 표(標)해서 그 친척으로 하여금 살펴보기 쉽게 하였다. 그리하여 담 안에 무덤을 파고서 드러나 있는 해골을 장사지내었다. 관섬(關陜 섬서성)이 가물어 주린 사람들이 많이 유랑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들판에서 한뎃잠을 자다가 비바람에 병들었다. 공이 봉급을 내어 창도(倡導)하니, 큰 부자들이 다투어 돈을 내고 도와서, 무릇 집 20여 칸을 지었다. 그 전당 잡히어 팔리는 남녀들에게는 관청에서 옷과 밥을 주어서 그 부모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죽은 자는 무덤을 얻고 생존한 자는 병드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 옥사(獄事)를 논죄할 때는 한결같이 공경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 근본하였다. 영하(寧夏)의 죄수 당씨(黨氏)의 며느리가 간통을 하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독약 먹여 죽였다 하여 옥사가 이미 완결되었었다. 2년 동안 심문하고 조사하였으나 다른 말이 없었는데, 공이 한 번 물어보고 그 사실을 알고 두 번 물어 그 정상을 얻으니, 그 남편이 과연 병들어 죽은지라, 아울러 그 간부와 함께 곧 심리하여 내어 보내니, 사람들이 그 귀신처럼 밝음을 탐복하였다. 지순 2년에 섬서성 원외랑 계아중대부(䧒西省員外郞階亞中大夫)로 전근되었다. 무릇 섬서(䧒西)에 분성(分省 중서성(中書省)의 지방 분성)된 자나, 막부(幕府 군사령부의 직무를 받은 자)의 직을 맡은 자는 어사대(御史臺 감찰하고 규탄하는 관청)가 거기에 같이 세워졌으므로 매양 불려가서 응대하기를 꺼리어, 임명을 받고 나가기를 달게 여기지 아니하고, 이미 부임하고서도 병이 났다고 보고하고, 혹은 해[年]나 달[月]이 못되어 가는 자가 이따금 있었다. 그때에 행성(行省 분성)의 관료들이 부정으로 탄핵(彈劾)을 당하여 파면되었으나 공은 의젓하게 2년 동안 홀로 있어서 마침내 능하다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보다 앞서 전형으로 선택하는 것이 공변되지 않아 오직 세력에만 붙게 되니, 뇌물이 아니면 이루지 못했는데, 공이 그 폐단을 다 알고서 선후(先後)와 정궐(定闕)과 등차(等差)를 문부에 올리고, 이름을 불러 천망하여 결정하고 곧 방을 붙여 게시하니, 청탁하는 길이 끊어져서 위와 아래로 손을 쓰던 사람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격문(檄文)을 받은 선비들이 기뻐서 복종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때마침 수령을 선발하였기 때문에 원통(元統)원년(元年)에 하남부 노총관(河南府路摠管)으로 옮겼는데, 공은 처음에 수레에서 내리면서 백성에게 병폐가 되는 것을 물어서 이로운 것은 일으키지 아니함이 없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하남(河南)은 서북으로 통하는 길이니, 서쪽은 문향(閿鄕)으로부터요, 북쪽은 맹진(孟津)으로부터이며, 동쪽은 공현(鞏縣)으로부터이니 대체로 열한 번째 역(驛)인데, 민가가 없어져서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다. 은폐(隱蔽)된 것을 검사하고, 이리저리 살펴서 실정을 파악하여 빈약한 사람에게는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고 모두 풍후(豊厚)하게 도와주고, 또 관사(館舍)를 새롭게 하여 지방의 고을 길을 닦으며, 마을에 문을 세우며, 농사와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호하는 약국(藥局)을 지어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였다. 구리로 만든 전문 관측기를 거두어 설치하고 조심스레 기상을 관측하였다. 백성이 이미 기뻐하며 복종하므로 즉시 영을 내려 이르기를, “다스리는 도리를 강구하려면 학교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공자의 사당이 더러워지고, 재실(齋室)이 기울어지니, 어찌 조정에서 스승을 높이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 뜻이 되겠는가.” 하고, 봉급을 덜어 권장하며, 이끌고 나아가 공사를 시작하여 수리할 적에 대성문(大成門)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차례로 세우니, 총 49칸이었다. 뒤에 총관(摠管) 양의(梁宜)라는 이가 있어서, 그 일을 문을 지어 기록하였으나, 간략하여 자세하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이미 묘학(廟學 사당과 학교)을 일신하게 한 다음에는 제생들에게 공부시키는 과정을 엄격하게 정하여, 무릇 공사(公事)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매화당(梅花堂)을 수리하고, 관료와 아전을 모아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설(講說)하며,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무릇 원근의 백성들이 오래도록 해결을 하지 못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헌사(憲司)에서 모두 다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또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것을 조사하여 모두 그 정상을 밝혔다. 불행하게도 지원(至元) 병자(丙子) 3월 26일에 병으로 관직에서 세상을 끝마쳤는데, 향년 52세였다. 선비들과 서민들로서 부음을 들은 자는 슬피 울며 사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옥(獄)에 갇힌 사람들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목이 메일 정도로 호곡(呼哭)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府)와 노(路)가 있고난 후로 청렴하고 능란하고 선량함이 공과 비길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공의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치우치지 아니하며 정도(正道)를 지키어 사(私)가 없으며 집에서는 아무 근심 없이 온화하시어 일찍이 말씀을 빨리하거나 급한 표정을 짓지 아니하였으나, 공무에는 부지런히 수고하시어 침식을 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행실이 청렴결백하여 티끌 하나라도 사람에게서 취하지 아니하였고, 붕우들이 보내는 것도 비록 조그마한 음식이라도 혹 뜻에 적합하지 않으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였다. 고주(高州) 하남(河南)에 있을 때에는 조정에 갈 때가 되면 곧 양식을 싸 가지고 가시며, 먹은 것은 나물이라도 반드시 후한 값으로 치루고, 마시는 것은 오직 물뿐이었다. 그 아들 효선(孝先)이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섬서(陜西)에 갔다가 노(路)로 돌아오는 길에 근친하였으나, 공이 문로(門路)를 나가지 못하게 명하였다. 뵙기를 청하니 공이 허락하지 않아 며칠을 머물다가 가니, 노의 관원이 술과 밥을 갖추어 가지고 교외(郊外)에서 전송한다는 말을 듣고 기쁘지 않게 여기어, 그 비용을 계산하여 갚았다. 자봉(自奉 자기 몸에 들이는 것)하는 것은 매우 간략하여, 안으로 첩과 시녀(侍女)가 없이 담담하게 지냈다. 그런 까닭으로 세상을 마치던 날 장롱에는 남은 비단이 없었고, 창고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으며, 깔끔한 지조는 시종이 여일하였다. 지정(至正) 계미년에 집현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集賢直學士亞中大夫輕車都尉)를 증직하고, 고양군후(高陽郡侯)에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정혜(正惠)라고 하였다. 최씨(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여러 번 봉하여 고양군 대부인(高陽君大夫人)으로 봉함에 이르렀다. 자손은 아들이 삼형제로서, 장자는 효선(孝先)인데, 일명(一名) 첩목아불치(帖木兒不花)라 한다. 근시를 거쳐 여러 번 승진되어 대부감좌장고부사 정동행중서성원외랑 자정원도사 강남제도행어사대 감찰어사 대사농사도사 첨산강북도 숙정염방사사(大府監左藏庫副使征東行中書省員外郞資政院都事江南諸道行御史臺監察御史大司農司都事僉山南江北道肅政廉訪司事)로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되었고, 둘째는 중보(仲輔)인데, 일명 관음노(觀音奴)라고 한다. 시의사통사사인(侍儀司通事舍人)을 거쳐 중흥무공고 부사(中興武功庫副使)로 옮기었고, 셋째는 문헌(文獻)인데, 일명 승수(承壽)라 하며, 동궁(東宮)의 급사가 되었다. 딸 하나는 섬서 제도행어사대 감찰어사(陜西諸道行御史臺監察御史) 철철불화(徹徹不花)에게 시집가서 원평현군(宛平縣君)에 봉하였다. 나 곡(穀)은 같은 고향 사람이다. 일찍이 이 분을 따라 놀았기 때문에 공의 덕행과 그 집 내력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