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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採薇亭)

천하한량 2007. 2. 2. 17:50
종    목 시도기념물 
제55호 (구미시)
명     칭 채미정(採薇亭)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1,141㎡
지 정 일 1985.10.15
소 재 지 경북 구미시  남통동 249
시     대
소 유 자 해평길씨문중
관 리 자 해평길씨문중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구미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54-450-6063
설     명 채미정은 야은 길재(1353∼1419)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채미정이란 명칭은 중국의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길재 선생이 고려가 망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한데서 유래하였다. 길재 선생이 세종 1년(1419)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컫게 되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이 기둥만 16개이다. 앞면과 옆면 모두 3칸씩으로, 중앙에 방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숙종(1674∼1720)이 직접 써서 선생의 충절을 읊은 오언시(五言詩)를 경모각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유적이 있으나 오랜 세월에 황폐화 되어 1977년 정부에서 보수하였고, 현재는 잘 정돈해 놓았다.
문화재명 채미정
이 채미정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이며 대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충절(忠節)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朝鮮) 영조(英祖) 44년(1768)에 건립된 것이다. 야은 선생은 고려가 망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했으므로 중국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故事)에서 이름을 따 '채미정'이라 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 한 칸에 방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한 특이한 정자이다. 야은 선생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2년(1353)에 출생하여 우왕(禑王) 12년(138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선산(善山)에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다. 선생이 세종(世宗) 원년(1419)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후세 사람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컬어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學德)을 추모하였다. 이곳에는 채미정 이외에 선생의 충절을 읊은 숙종(肅宗)(1671∼1720)의 어필(御筆) 오언시(五言詩)가 경모각(敬慕閣)에 보존되어 있고, 구인재(求仁齋)와 비각(碑閣) 등 건물이 있다. 이들 유적이 오랜 세월에 퇴락되고 황폐하여 1977년 정부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