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남을 먼저 떠나보내다가 종국에는 내가 먼저 떠나가는 것이다. 그 사이에 그윽한 슬픔을 간직한 채 죽음의 두려움을 애써 잊으며 때로는 관계의 상처로 아파하고 때로는 생계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때로는 불행한 일을 겪으며 괴로이 살아간다. 간혹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었겠지만, 삶에서 온전히 기뻤던 날은 얼마나 될까? 스물한 살 이덕무의 겨울은 몹시 고되었다. 당시 이덕무는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햇볕도 들지 않는 단칸방인지라 방안은 몹시 냉랭했다. 하루는 집 뒤편으로 매서운 바람이 스며들어 등불이 마구 흔들거렸다. 궁리 끝에 이덕무는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로 삼았다. 임시변통의 꾀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 자못 뿌듯했다. 다음날 밤에도 찬바람은 어김없이 들이닥쳤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고, 이불깃은 차갑게 얼어붙어 버석버석 소리가 났다. 추위에 뒤척이던 그는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늘어놓아 추위를 누그러뜨렸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이덕무에겐 혹독한 견딤의 시간이었다. “낙숫물을 맞으면서 헌 우산을 깁고, 섬돌 아래 약 찧는 절구를 안정시켜 두고, 새들을 문생(門生)으로 삼고 구름을 친구로 삼는다.(敗雨傘承霤而補, 古藥臼逮堦而安, 以鳥雀爲門生, 以雲烟爲舊契).”라는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과 병치레는 이덕무의 일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살아가는 힘을 준 것은 책이었다. 이덕무는 이른바 책 미치광이였다. 그는 단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덥든지 춥든지 병들든지 건강하든지 오로지 책을 읽었다. 이덕무에게 책 읽기는 삶의 원동력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행위였다.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더 이상 살고 싶은 희망조차 사라질 때, 그를 일으켜 준 것도 책이었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 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이 있어 글자를 배울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위로하다 보면 조금 뒤엔 절망스러운 마음이 조금씩 안정된다. 만일 내가 온갖 색을 볼 수 있다 해도 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哀之來也, 四顧漠漠, 只欲鑽地入, 無一寸可活之念. 幸余有雙眼孔頗識字, 手一編慰心看, 少焉, 胸中之摧陷者乍底定. 若余目雖能視五色, 而當書如黑夜, 將何以用心乎?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이덕무가 스물두 살이던 늦여름, 비록 허름한 작은 집이었지만 뜰에는 아홉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모두 처마와 비슷하게 자랐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이덕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늘진 복숭아나무 아래에 섰다. 나뭇잎을 몇 개 따서 붓으로 내키는 대로 글씨를 썼다. 아이에게도 따라 쓰게 하고, 그림도 그려보게 했다. 나뭇잎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날 이덕무는 아이와 함께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저물녘 마루에 앉아 아이와 함께한 하루를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마음에 딱 맞는 날이었다. 시원한 복숭아나무 아래서 아이와 함께 보낸 참 좋은 날의 하루는 그의 인생에서 잊기 힘든 추억 하나를 새겨 주었다. 그러다가 이덕무는 문득 어떤 서글픔이 몰려왔다. ‘오늘처럼 마음에 꼭 드는 날이 얼마나 될까?’ 세상은 그에게 소소한 일상도 들어주지 않았다. 서얼 출신인 그에게 세상은 차별의 시선을 보냈으며,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관직의 길을 내주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에 그와 가족들은 잦은 병치레에 시달렸고, 어느 날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맹자』를 팔아 쌀을 사기도 했다. 어느 늦은 여름날, 동자와 마음에 꼭 드는 날을 경험한 이덕무는 근심과 재앙에 얽매이지 않는 지인의 삶을 소망했다. 젊은 날의 이덕무는 가난과 병치레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을 부끄러워해 감추거나 가난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가난을 죄로 여기게 하는 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일 뿐, 고전 시대 선비들에게 가난은 삶의 충분조건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우리를 생겨나게 했을 때 이미 가난할 빈(貧)자 한 글자를 점지해 주었으니 거기서 도망할 길도 없거니와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덕무는 가난과 함께 하는 법을 알았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알았다. 나아가 가혹한 삶의 조건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웠다.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천하 사람들을 위해 은택을 베풀 것을 생각(貧不貯半緡錢, 欲施天下窮寒疾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자오(自娛)하는 맑은 선비였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평화주의자였고, 갈매기와 귀뚜라미를 사랑한 진정한 생태주의자였다. 근래 한 드라마에서,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백발이 성성한 아들이 묻는다. “어머니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한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때가.” 삶은 언제나 고되고 앞날은 늘 근심스럽다. 오늘의 우리는 연애, 결혼, 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넘어,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행복한 삶은 사치처럼 들린다. 그러나 행복은 크고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세상은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타고 큰 힘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입한다. 남들이 집어넣은 큰 행복이 아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행복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그날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슬플 때는 책을 읽으며 나뭇잎에 글씨를 쓰는 데서 행복을 느낄 줄 알되,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삶을 소망한 이덕무의 삶은 진정한 소확행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 ㉕정약용 '여유당전서' |
▲필자 미상 ‘정약용 초상’. 종이에 옅은 채색을 한 ‘지본담채’로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이후 널려 알려졌지만 문헌에서 전하는 정약용의 모습과 많이 달라 그 진위가 명확하지 않다. 개인 소장 다산은 유배된 후 할 일이 없어 고금을 연구하고 민생 문제와 국가의 대계에 유념하여 토론하고 저술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규명하여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저술은 모두 후세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황현, ‘매천야록’ 권1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민과 국가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개혁 사상을 내세운 실학자다. 그가 남긴 저술과 제시한 개혁안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새로운 차원에서 기억되고 호출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그가 남긴 학문적 성취가 현재까지 남아 현재로 이월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의 학술적 역량과 개혁적 사유는 ‘여유당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천이 다산의 저술을 두고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범으로 주목한 것은 다산의 실사구시 정신을 주목한 것일 터이다. ▲여유당전서 154권 76책 일부. 오랫동안 공간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다 일제강점기인 1934∼38년에 걸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했는데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구상한 체재와는 다르게 편찬됐다. 사진은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중 일부인 ‘마과회통’(麻科會通). #시대를 아파하고 민을 노래한 거인 다산은 실학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남긴 시문은 여느 시인과 달리 현실 문제를 소재로 포착하고 있어 진한 울림을 준다. 더욱이 다산의 남시문은 그의 학술적 성취와 안팎을 이룰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다산시문집’ 권21, ‘아들 연아(淵兒)에게 보냄’ 다산은 일찍이 “나는 조선사람. 조선시를 즐겨 지으리라”라고 해 ‘조선시 선언’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한시 특유의 음풍농월과 달리 민의 삶을 포착하여 민을 위한 비가(悲歌)로 표출한 바 있다. 나라와 시대를 걱정하고 권선과 징악을 풍자하는 시만이 진실한 시라고 주장한 다산의 사유 속에는 항상 민과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매우 단호한 문학인식을 보여 줬다. 그 문학적 단호함은 ‘애절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군적을 만들어 군포(軍布)를 거두는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확언하면서 ‘애절양’을 인용한 바 있다. ‘애절양’은 조선조 후기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군포 착취로 농민이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비참한 내용을 담은 한시다. 다산은 ‘경세유표’ 앞머리에서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발언하고 있거니와, 이는 남근을 스스로 자르는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자 당대 현실의 정확한 진단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구체적인 저술 연대는 알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좌절을 딛고 고뇌 속에 꽃핀 창조 다산은 유배 생활에서 숱한 좌절을 겪지만, 그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학단을 만들어 제자를 기르는 한편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빌려 저술활동을 하고 개인적 좌절도 이겨 내었다. 그는 유배 기간 내내 학문적 고뇌 속에 창조적 예봉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세유표’를 비롯해 ‘목민심서’와 ‘흠흠심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유배 시기에 구상하거나 저술했다. 학술적 두 축인 경세학과 경학의 성취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다산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창조적 시간으로 활용해 학술적 역량을 꽃피운 것이다. 유배를 마친 이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보완하고 수정을 거듭하며 자신이 구상한 사회개혁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대안을 녹여 내었다. 하지만 자신의 학술적 성취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내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두고 제사를 지낸다 하여도, 내가 진정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고 내 책 한 장을 베껴 주는 일보다는 못할 것이니, 너희는 그 점을 기억해 두어라. -‘다산시문집’ 권21, ‘두 자식에게 보여 주는 훈계’ 유배지에서 학술 교류가 없던 상황이다 보니 자신의 성취를 외면하지 말 것을 자식에게 당부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저술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는 민을 위하고 국가를 혁신하는 대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저술은 민과 국가를 자양분으로 사고한 학술적 꽃이다. 무엇보다 다산 스스로 유배지에서 넉넉한 민의 품성을 재발견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개혁하려 한 역사적 전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산이 시문에서 ‘민’을 중심에 놓고 노래한 것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재해석한 저술과 ‘경세유표’와 같은 경세서에서 국가를 중심에 놓고 혁신적 안을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낡고 오랜 우리 조선을 새롭게 혁신’(新我之舊邦)할 것을 주장했다. ‘경세유표’ 머리글에서는 “지금 곧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 #난세에 호출되는 ‘여유당전서’ 다산의 저술은 한국학의 거점이자 19세기 학술의 뛰어난 성과다. 그의 저술은 이후 역사 공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는다. 과거사가 아닌 현재진행의 역사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호출된다. 고종은 부강정책에 예의주시하여 경장을 서둘렀다. 그러나 많은 신하 중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을유년과 병술년 사이에 ‘여유당집’을 올리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권1 고종이 부국강병을 위해 다산의 저술을 기억한 것은 새로운 국가체제의 구상에 필요한 대안을 다산의 경세서에서 찾으려 한 것임은 물론이다. 시대의 호출에 다산의 저술이 부활한 것이다. 다산의 혁신적 사유와 개혁적 여러 안들은 갑오농민전쟁 시기에도 다시 주목을 받는다. 1930년대 실학 연구의 선구자인 최익한은 ‘강진읍지’를 인용하면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갑오농민군 지도자들이 ‘경세유표’를 활용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정약용의 저술이 역사적 변혁기에 재발견되고 호출하고 있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다산의 저술은 일제강점기에 이월돼 조선학 운동을 추동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등은 ‘신조선사’라는 출판사에서 ‘여유당전서’와 ‘담헌서’ 등을 출간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근대적 학술이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식민지학에 대응한 자국학의 정립에 방점이 있다. 자국학의 구체적 학술적 성과에 ‘여유당전서’를 그 중심에 둔 것은 지금의 한국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다산의 저술은 시공을 넘어 수시로 기억된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의 저술은 일찍이 필사본과 목판본, 연활자본 등으로 유통됐다. 다산의 자제와 제자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원고본을 만들었지만 500권 100책에 이르는 저술은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저술 중에서 실용적인 문헌은 19세기까지 필사본으로 유통됐지만, 공식 출판은 19세기말 목판본인 ‘이담속찬’이 유일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일부 학술단체의 일본인들이 다산의 저술을 필사하고 연활자로 간행한 바 있고 이후 장지연, 최남선, 정인보 등 지식인들은 다산의 저술을 재발견해 일부 저술을 연활자로 간행했다.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로 1934~38년 신조선사에서 154권 76책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이 ‘여유당전서’는 정약용 스스로 구상한 체재와 다르게 7집 체재로 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일찍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번역했고 1982~94년 ‘여유당전서’ 중에서 시문집 22권 10책을 국역 간행했다. | 분발은 용기를 끌어내는 길잡이이고 실패는 성공을 이루는 계기이다. 奮者 勇之倡 失者 得之機 분자 용지창 실자 득지기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농암집(農巖集)』 권21 「증계달서(贈季達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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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시장에 한파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수십 장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여도 면접 기회를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많은 낙방과 실패로 취업준비생은 괴롭다. 자존감은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조언에도 쉽사리 위로되지 않는다. 위의 구절은 조선 후기 문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과거 시험에 낙방한 사촌 동생 김창직(金昌直, 1653~1702)에게 보낸 글의 일부이다. 1차 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는 합격하였으나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 낙방한 사촌 동생에게 김창협은 위로하는 한편 축하를 전한다. 비록 낙방했지만 이를 계기로 분발한다면 스스로 역량을 키움으로써 훗날 그가 마음먹은 일을 모두 성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에 조말(曹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웠으나 세 번이나 패배해 땅을 잃었다. 그러나 훗날 제나라·노나라 제후 간의 회담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비수 한 자루를 가지고 제나라 환공과의 담판 끝에 잃었던 땅을 모두 돌려받았다. 조말이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앞선 실패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분발하여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은 쓰디쓰다. 실패의 아픔을 다시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재도전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두려움을 떨쳐내고 의지를 갖고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다. 그 자리에 멈추지만 않는다면, 실패는 도리어 나를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 되고 나를 성공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창협의 위로 덕분일까 김창직은 결국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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