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렝(Santarem)의 포르타 두 솔(Porta do Sol) 전망대에서 에즈라(Ezra)를 만났다. 테주 강을 내려다보는 동쪽 절벽 요새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말을 텄다. 피렌체 출신인 그는 프랑스 순례길을 걷고 연이어 포르투까지 거꾸로 걷는 중이라고 했다. 에즈라가 포르투갈어를 이해하는 덕분에 순례길의 작은 마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산타렝이 유럽 고대 역사로 거슬러 오르면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쌓인 곳임을 알았다.
“게르만계 루시타니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비시고트인, 아랍인이 살았어.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레콘키스타(Reconquista)에서 포르투갈의 중심이었대.”
너른 강과 넘치는 햇살로 평원은 풍요롭고 천연 요새 지형이라 군사적으로도 요지였음은 분명하다. 이민족 다문화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는 산타렝에는 기독교에 얽힌 전설도 많다. 당장 지명부터 성녀 이레네(Santa Irene)에서 유래한다.
“이레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 그는 수녀가 되려고 했대. 문제는 가정교사를 하던 수도사가 그에게 흑심을 품은 거야. 이레네를 범하려다가 실패하자 수도사는 그의 행실이 나빠 임신까지 한 상태라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대.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그를 죽인 후 강에 버렸고.”
버려진 이레나의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와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시신이 상하지 않았고 이레네를 성녀로 칭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명을 상타 이레네(Santa Irene)로 바꿨고 발음이 변하면서 산타렝이 된 것이다.
산타렝을 구석구석 돌아본 날, 저녁을 먹다가 에즈라는 할 얘기가 있다면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부터는 그 얘기를 해야겠다. 그날의 에즈라처럼 나 역시 망설였다. 여행담을 나누는 지면에 꼰대질이 될지 모를, 들어 불쾌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해야겠다. 에즈라의 말대로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아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사실 난 한국 사람들 너무 싫었어. 한국 사람들한테 질려서 중간에 순례를 그만두고 돌아갈까 했을 정도였어.”
다정하고 친절했던 에즈라가 한국 사람인 나를 앞에 앉혀 두고 한국 사람이 싫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례길에 안티 코리아(Anti-Korea) 정서가 점점 많아진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가 내 식구 흉을 안다 해도 다른 이들이 흉보는 것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얘기를 타국 사람을 통해 전해 들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국인 단체 순례’ 아니 ‘순례길 단체 관광객’ 이야기다.
“한국 사람들이 단체로 알베르게(Albergue,순례자숙소)에 몰려왔어. 스무 명이 훨씬 넘었어. 닭을 삶는 데 정말 오래 걸리더라. 주방을 다 차지하곤 기다리는 다른 순례자들은 아랑곳하지도 않았어.”
다음날 나누어 가질 달걀과 감자를 수십 개씩 삶고 사람들은 팩에 들어있는 술을 마셨다고 했다. 소주였던 것 같다. 한국인들은 소등시간이 지난 후에도 알베르게에서 시끌벅적 늦게까지 즐겼다.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며 에즈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순례길은 일반 관광지와는 다르다. 파울루 코엘류의 ‘순례자’ 이후 유명해졌고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보 여행지가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관광지는 아니다. 2017년에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은 길이라 해도 까미노로 불리는 순례길은 육체적 정신적 변화의 체험을 소망하는 개인들의 걷기 성소인 셈이다.
많아야 둘, 셋 만 넘어도 눈에 뜨일 만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순례자가 혼자 걷는다. 혼자 걸으면서 다른 순례자를 만나 교감하고 배려하는 것이 순례길의 문화이자 전통이건만 수십 명이 몰려다니는 순례자들이라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온종일 걷고 피곤한 몸으로 들어간 숙소에서 그런 단체를 만난다고 생각만 해도 불쾌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지난번 순례에서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최소 거리 100km부터 출발한 단체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순례자 숙소에서 마주치지는 않았다. 여행사를 통해 배낭을 배달하면서 걷는 미국 단체는 순례자 숙소가 아니라 호스텔이나 호텔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어쩌자고 그 한국 여행사는 자기 고객들에게 ‘끔찍하고 무례한’ 한국인 소리를 듣게 하고 순례길에 안티 코리아가 생기게 한단 말인가?
“그 사람들 피하려고 다음 날 무리해서 40km를 걸었는데 거기서 또 다른 한국 단체를 만났어. 한국인들은 수십 명씩 다니면서 알베르게를 전부 차지해. 그날도 주방은 한국 사람들만 사용했어.”
얘기를 들어보니 저녁 내내 삼겹살을 구웠던 것 같다. 숙소에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에즈라는 그 날 이후 한국인이 묵는 숙소가 어딘지 알아내 피해 다녔다고 했다. 사람들과 서로 메신저로 연락하면서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아 때로는 수 킬로미터씩 더 걸었다는 말은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순례길은 단체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걷는 길이 아니다. 그럴만한 길은 세상에 많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유롭고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그 땅과 역사를 숨 쉬듯 걷기 원하는 이들이 찾는 순례길에서 불편하고 불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누굴 가르치려 드냐고 하실 분도 계실 것이고 겨우 한 사람에게 들은 말로 전체를 싸잡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 밝혀두자면 에즈라뿐 아니라 이후로도 여러 사람에게 유사한 목격담과 피해담을 들었다.
여행이란 익숙함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닌가? 내게 여행은 나를 벗어나고 생각을 벗어나고 자발적으로 안락함을 떠나 경계를 넘는 즐거움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것을 먹고, 불편과 수고를 감당하지 않으려면 집이 최고다. 더군다나 순례길 걷기는 스스로 불편을 택하고, 사서 하는 고생이며 그 고생 자체가 보상인 여행이다. 그러니 산티아고에 가지 마시라. 가시겠다면, 최소한 그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살피고 존중하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감동을 안겨준 얘기만으로도 부족한 산티아고 길이건만 굳이 불편한 얘기를 하고야 말았다. 안티 코리아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 나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길에서 소중한 체험을 한 사람으로서 그 길과 길을 찾는 사람들 모두를 아끼는 마음으로 여행기의 지면을 빌려 얼굴을 붉힌다.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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