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퇴계(退溪, 1501~1570)와 율곡(栗谷, 1536~1584)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 조금 앞서 태어난 화담(花潭) 서경덕이 지은 <술회(述懷)>라는 시이다. 주돈이(周敦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로 대표되는 북송(北宋)의 성리학을 주희(朱熹)가 집대성하여 하나의 체계로 구성한 바 있는데, 이러한 주희의 학문을 진실하게 믿고 그 바탕에서 사유를 전개한 퇴계와 달리 화담은 세상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懷疑)를 품고 기성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이치를 터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처럼 자득(自得)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바탕으로 화담은 주자학보다는 소옹의 상수역학(象數易學)과 장재의 태허(太虛)에 바탕한 우주론을 탐구하는 데 더 열정을 기울였다. 이 시와 관련하여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은 당시 사림(士林)의 선배였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화담에게 출사(出仕)를 권유하였을 때 화담이 이 시를 지어 사양한 것이라고 하였다. 은거(隱居)하여 학문(學問)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시 한 수에 잘 담아내었기에 시를 받은 모재가 무릎을 치며 더 이상 화담에게 강권하기 힘들었을 듯하다. 특히 세인(世人)들이 욕망하는 부귀(富貴)는 다툼이 있기 마련이라 차지하기 어렵지만 주인 없는 임천(林泉)은 금하는 이 없기에 몸을 보존할 만하다고 노래한 함련(頷聯)은 상투적인 듯하면서도 부귀와 임천의 대구(對句)가 묘하게 어우러져 화담의 견결(堅決)한 인생 지향을 잘 보여준다. 나물 캐고 고기 낚아 생계를 삼는 촌부(村夫)이자,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을 노래하는 시인(詩人)으로 사는 것이 바로 화담이 꿈꾸는 일상(日常)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일상을 사는 이유는 바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리에서 학문을 탐구하려는 데 있기에 의문을 해소하였을 때 찾아오는 쾌활함을 미련(尾聯)에서 말하였다. 정유일은 이 시를 통해 화담의 흉회(胸懷)가 매우 쾌활함을 볼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활함이란 지적 희열과 일맥상통할 듯하다.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면 발분(發憤)하여 끼니도 잊고, 의문을 해소하면 즐거워 근심을 잊고 늙음이 이르는 것도 모르셨다던 공자(孔子)의 학문하는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정유일 외에도 이제신(李濟臣, 1536~1583)과 신흠(申欽, 1566~1628) 역시 화담을 논하면서 특별히 이 시를 인용하였고, 화담처럼 은거하며 뜻을 길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이 시의 운자로 차운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가 화담의 본령(本領)을 잘 표현한 것으로 여겨져서인 듯하다. 다만 이식(李植, 1584~1647)은 송화수(宋樺壽)라는 사람이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서재에 걸어놓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이식이 학문 성향이 다른 화담의 문장을 보지 않은 데서 생긴 잘못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