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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팔마스의 영웅들…대서양에 청춘 바쳐

천하한량 2016. 11. 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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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50년 전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대서양의 어장을 개척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을 아십니까?

지난 19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여 조국으로 송금한 돈 1조 원은 경제 발전의 마중물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비슷한 시기의 파독 광부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특파원 현장보고에서는 험한 바다에서 소중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던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파리의 박진현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지금도 직항이 없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19시간이나 가야하는 먼 곳.

스페인 남부 라스팔마스, 우리나라 원양 어업의 전진기지입니다.

1960년대, 당시 북태평양 어장에서 큰 성과를 얻었던 정부가 대서양으로 눈을 돌리면서 마련된 거점입니다.

지난 1966년 이곳 라스팔마스 루스항에 원양 어선 강화호가 입항하면서 라스팔마스 이민 50년사가 시작됐습니다. 

라스팔마스는 아프리카 연안에서부터 먼바다까지 어종이 풍부한 바다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인터뷰> 김태정(태림 코퍼레이션 대표) : "일본 사람들이 그 당시에 선호하던 살오징어,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문어,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종들이 고가의 어종들이 많이 잡혔습니다."

한때 2백 척이 넘는 어선들이 운용됐습니다.

<녹취> 대한뉴스 제792호(제작연도 1970년 9월 5일) : "지난 8월 2일 고려 원양 어업 참치 어선 선원 75명이 신임 선원들과 교체했는데 이들은 지난 2년 반 동안 3천2백 톤의 참치를 잡아들여 155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첫해였던 66년에는 252만 달러였지만 지난 1987년에는 1억 천만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당시 1억 천만 달러는 파독 간호사·광부 만 9천여 명이 15년간 송금한 금액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87년까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8억 7천만 달러.

1조 원이나 되는 이 돈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마중물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이곳을 처음 개척한 50년 전 청춘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 침술원을 17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일광 씨.

<녹취> 박일광(라스팔마스 교민) : "(가스를 거의 다 배출하고 있어요.) 가스를요? 밤새도록 그렇죠? (예.)"

군대를 제대하고 23살 때 무선 통신사 자격으로 2년 동안 원양 어선을 탔습니다.

<인터뷰> 박일광(라스팔마스 교민) : "잠을 자도 소위 토끼잠을 자는 거죠. 그런 데다 만약에 그물을 끌다가 암초에 걸려 찢어질 경우 그런 것을 수리해야 하니까 쉬는 시간도 잠을 못 자죠. 이제."

높은 파도 속에서 사흘 동안 낯선 바다를 헤맸던 기억은 아직도 아찔한 순간입니다.

<인터뷰> 박일광(라스팔마스 교민) : "저의 경우는 무전을 하려면 키가 있거든요. 모르스부호를 치는 키요. 그것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막 내동댕이쳐지고... 밥솥에 밥을 못하고 엎어지고 했으니깐요. 그래서 죽는 줄 알았어요. 진짜..."

박 씨는 계약 기간 2년이 끝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배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박 씨처럼 구사일생의 행운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래된 현지 신문을 찾아보니 우리 선원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지역 신문이 78년 3월 31일 자 머리기사로 대왕호 침몰 사고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4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실종상태이며 수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내용입니다.

다음날 속보까지 다뤄졌던 이 사고는 한국 선원들에 대한 위령탑을 건설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또 79년에는 태창호라는 선박이 상선과 충돌해 30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희생 선원들이 점차 늘어나자 2002년에는 이들을 모시기 위한 납골당까지 마련됐습니다.

이 납골당에는 50년 전 원양어선 선원으로 청춘을 바치다 조업 중 사고 등으로 숨진 백여 명이 함께 안치돼 있습니다.

처음 안치된 선원 117명 가운데 일부는 유족들이 원해서 한국으로 운구되기도 했습니다.

선원들의 이러한 희생은 역설적으로 이민 사회가 정착하게 된 든든한 토양이 됐습니다.

한 살 때 라스팔마스에 건너온 장우성 변호사.

해상법을 전공한 그는 1.5세대와 2세대들 가운데 자신처럼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1세대들의 남다른 교육열을 그 이유로 꼽습니다.

<인터뷰> 장우성(변호사) : "대단한 분들이죠. 2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은 교육이라며 이를 잘하셨죠. 그 덕분에 1.5세대들이 나가서 활동을 잘하고 있습니다."

한때 선원 만 명에 교민이 5천 명이었던 한인 사회는 라스팔마스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인터뷰> 마뉴엘 비달(라스팔마스 항만청 고문) : "한국분들은 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고, 그만큼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지역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 감사함을 표현하는 조형물이 라스팔마스 항만청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인 사회의 힘은 한국 음식 바자에서도 확인됩니다.

입장료가 30유로로 싸지 않지만 20년째 만원이고 손님들 70% 이상이 현지인들입니다.

<인터뷰> 이필해(라스팔마스 어머니회 회장) : "3번씩 4번씩 바자회 때마다 참석을 해주시는 분들이고 이곳을 오시는 분들도 중산층 이상의 수준을 가지고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수익금은 자녀들의 장학금과 라스팔마스 불우 이웃 돕기 등에 쓰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인 사회는 크게 위축됐습니다.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원양 어업이 후퇴됐고 특히 90년대 중반부터 밀려든 중국 어선들에 자리를 내주면서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태정(태림 코퍼레이션 대표) : "옛날에 활황기 때는 2백 척 이렇게 이야기 하던 것이 오늘 6척 정도 운항되고 있는 배가 그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 결과 지금 남아 있는 교민은 천 명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위축된 한인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대서양 어장을 개척했던 그 젊은 청춘을 기억하기 위해 KBS 한민족 방송은 라스팔마스를 찾았습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공연은 어려웠던 지난 50년을 반추하고 앞으로 50년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녹취> "고 노 도 로 모 보...."

새로운 라스팔마스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어린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때 전교생이 3백 명이나 됐지만 지금은 한국 학생은 30명에 불과합니다.

위축된 한인 사회를 똑 닮은 이 한글 학교는 그러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 남아있는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라는 역발상을 합니다.

<인터뷰> 김현숙(한글 학교 교장) :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완전 개인지도와 마찬가지로 수업할 수 있으니까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좋은 면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한글 학교의 이러한 역발상이 라스팔마스의 미래를 여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한덕훈(한·스페인 해양수산협력 연구센터장) : "향후에는 원양산업에서 좀 더 벗어나고 발전되어서 해양 수산업 다른 분야 해양 플랜트, 수산 양식, 수상 레저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 산업을 발굴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원양 어업 전진 기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라스팔마스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고민과 실천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그것만이 50년 전 목숨을 걸고 대서양 바다를 개척하며 조국 발전에 기여한 이름없는 영웅들을 기억하는 길인 것입니다.

라스팔마스에서 박진현이었습니다.
  • 박진현
    • 박진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