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손인식 기자]
여행의 즐거움은 음식 맛이 좌우
여백(餘白), 공간이다. 남은 공간이란 뜻도 된다. 그러나 여백이 존재를 위한 공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존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공간임을 다 안다. 예컨대 글씨는 선을 통해 읽고 새긴다. 그러나 선과 선 사이에 여백이 없으면 선은 곧 꽉 막힌 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선과 선 사이의 여백은 존재 성립 요소임과 동시에 존재 본질에 관한 소통의 원천이다. 곧 여백이란 존재 자체요 활로다.
▲ 쓸쓸했던, 그러나 희망이 부풀고 있던 스페인 아빌라의 벌판 |
ⓒ 길동무 |
▲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 국경을 넘어 세비야 향하는 길에 펼쳐진 무한 대지. |
ⓒ 길동무 |
"저는 괜찮은 식재료를 보면 생기가 돌아요. 한식은 물론 스페인 요리하기도 좋아합니다. 한때 일식 조리에 반해 일식집을 운영한 적도 있어요."
스페인은 정말 식재료가 풍부하고 신선한 곳이었다. 식재가 좋으니 음식 맛 또한 손색이 없다. 대부분의 식사 시간이 기대되고 시장기와 상관없이 기다려졌다. 좋은 음식 맛은 여행의 즐거움을 크게 배가한다. 여행 후 평가도 여행지의 음식 맛이 크게 좌우한다.
길동무가 과일과 채소가 생동감 그 자체였던 9년 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토바 호수 여행을 즐겨 떠올리는 이유다. 방울토마토와 양배추를 싸서 다니며 먹었고, 브라이(남아공 식 양고기 구이)와 와인이 환상의 조합을 이루던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잊지 못하는 것도 풍부하고 맛난 음식들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 낯달이 슬펐던 마드리드 근교 콘수에그라 벌판 |
ⓒ 길동무 |
맛이 참외의 아름다움을 능가한다(味勝金果美)고 옛 시인이 예찬한 홍시 그리고 단감, 달리는 버스 안에서 쪼갤 수밖에 없도록 유혹을 했던 멜론, 토마토와 오렌지, 그리고 말린 무화과와 밤, 호도 등. 이 모두는 혹시나 해서 준비해간 인스턴트 간식거리들을 모두 되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동 시간을 잔잔한 감동으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 이베리아 반도의 풍광이었다. 때로 천천히 때로 급하게 스쳐 지난 차창 밖 풍경, 한반도의 약 2,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대지가 자아내는 모습은 무한함과 다양함이었다. 산과 바다, 강과 산은 서로를 위한 여백이었으며, 들과 도시와 마을은 하나를 빛나게 하는 다른 하나였다. 그리고 그 모두는 그냥 하나였다.
▲ 끝없이 펼쳐진 스페인 남부 세비야의 포도밭 |
ⓒ 길동무 |
지역마다 특색을 갖춘 과일들이 종목을 바꿔가며 재배되고 있었다. 그 이전 지역에서 올리브나무와 도토리나무로 대변되던 산하와는 영 딴판이었다. 오랜 옛날 바다의 융기로 솟아난 땅 이베리아 반도, 돌과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땅의 개벽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거기였다. 땅의 원형과 자연스럽게 조응한 것이 올리브 나무와 도토리나무 지대였다면, 그라나다에서 발렌시아 구간은 인간의 의지가 찬란히 꽃핀 곳이었다.
▲ 여행 8일째 이동거리 5시간. 참 많은 시간 갖가지 풍경으로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
ⓒ 길동무 |
▲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지중해의 네르하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길. 불쑥 나타난 엽서 속 그림 같은 건강한 과수원과 마을 |
ⓒ 길동무 |
햇볕만 강할 뿐 물 부족에 시달리는 회갈색 땅이 푸른 옥토로 싱싱하게 펼쳐 있었다. 포르투갈 지역 일부를 재외 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놀라운 생산력을 갖춘 자연 정원 바로 그것이었다. 우주에서 찍은 사진에도 선명히 드러난다던 시설 하우스 지역, 세계 영농관계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는 그 지역이야말로 지중해 기후의 축복을 축복 그대로 드러낸 곳이었다.
▲ 중국의 만리장성과 함께 우주 항공사진에도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스페인의 시설하우스 단지 |
ⓒ 길동무 |
▲ 스페인 남서부 그라나다에서 발렌시아까지 가는 7시간 내내 종류별로 펼쳐졌던 멜론, 감, 아보카도, 석류, 오렌지 등 많은 종류의 과수원. 달리는 차 안에서 찍은 이 사진은 오렌지 과수원 |
ⓒ 길동무 |
아! 이베리아 반도를 보았다고, 느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순례, 그러므로 이 여행으로 얻어야 할 것은 자기의 길이라든가 자기 발견 따위가 아니리라. 그렇다. 이 여행에서 가져가야 할 것은 겸손이다. 아는 것보다 실제가 훨씬 더 크고 넓으며 아름다운 것, 그것이 깨닫게 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 아닌가.
▲ 지중해를 바라보고 하나 둘씩 들어서는 하얀 집들 |
ⓒ 길동무 |
"오늘 저녁 식사는 예약이 된 것이 아니므로 특별히 레스토랑을 찾지 않아도 좋겠어요. 그냥 우리에게 맡겨두세요. 마침 숙소도 좀 자유로운 곳이니 좋네요. 이 선생님도 초청할게요. 아까 샀던 과일과 채소도 풍부하거니와 누룽지와 볶은 멸치와 볶은 김치도 있어요."
장마마께서 갈래를 그렇게 잡았다. 길동무가 나름 먹을거리를 준비해간 데는 이유가 있다.
"일행의 나이와 일정을 참작할 때 한국 음식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좀 드실 것을 준비해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길동무가 의뢰한 마드리드 여행사 직원의 의견이었다. 직업적 경험과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메일을 보냈을 것이다. 소식을 받은 날은 준비에 촉박한 출발 하루 전날이었다. 그러나 권유를 받고서도 그냥 갈 수는 없잖은가? 부랴부랴 휴대용 작은 밥솥도 사고 고추장도 볶았다. 물론 컵라면 몇 개는 빼놓을 수 없는 메뉴였다. 각 부부가 나름 가능한 부분들을 챙겼다. 믿고 기대는 길동무의 큰손, 큰언니 장마마를 기대하면서.
"밥솥 가져온 사람은 밥해오고, 이 과일 야채 좀 나눠서 씻어 와요. 아 참 누룽지도 가져오고..."
▲ 길동무 여행에는 이렇게 뚝딱 차린 신선한 식탁이 더러 등장한다. |
ⓒ 길동무 |
"와 누룽지도 있네요? 스페인에서 누룽지를 먹다니..."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했다는 가이드 이 선생은 놀라워했다.
"참 정감 어린 퍼포먼스입니다. 놀랍고 즐겁습니다. 사실 길동무 여행을 처음 의뢰받을 때부터 좀 흥미로웠어요. 일행 숫자도 그렇고 이베리아 반도만 16박 17일 일정 여행은 가이드 경력 16년 만에 처음이거든요. 부부가 항상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도 보기 좋고, 열심히 경청해주시니 설명하는 것이 신납니다. 무엇보다 일행이 항상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에 제가 즐겁습니다."
놀면 뭐해 호두나 까지
여행 9일째 코르도바 일정을 마치고 그 밤 숙소가 정해진 론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으니 도착지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잘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약 200m 전방의 교통사고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달려왔다. 조금 있으니 헬기도 현장에 내렸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인명사고가 있는 것 같았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길 사정, 그런 순간 길동무에는 늘 장마마가 계시다.
"놀면 뭐해. 자 우리 이 시간에 호두나 까지."
▲ 안달루시아 지방 론다를 가는 길에 전방의 사고로 차가 멈춰섰다. 차에서 내려 호두를 까는 길동무. 차는 멈춰도 길동무는 멈추지 않는다. |
ⓒ 길동무 |
▲ 길동무가 길에서 깐 호두와 마트에서 산 말린 무화과. 이동 중 맛난 간식꺼리 |
ⓒ 길동무 |
"(장마마의) 세 자녀가 이미 장성하여 그의 슬하를 떠났다. 결혼한 큰아들로 인해 손자가 생겼다. 손자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할머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도 여전히 할머니로 살지 않는다. 폭넓은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희망의 에너지 전파자로서 늘 동분서주다. 그가 있어 그의 이웃들은 늘 활력을 얻으며 행복을 가꾼다."
기왕 에피소드 나열이니 하나만 더하겠다. 여행 12일째 마드리드 서북쪽 사라고사(Jaragoja)에서다. 그 밤 숙소는 사라고사 기차역과 잇대 지은 대형 호텔이었다. 그날 호텔의 저녁 식사 시간에는 길동무 말고도 한국에서 여행 온 단체 두 팀이 더 있었다. 마치 한인들이 호텔 전세를 낸 느낌이었다.
"오늘 건배사는 누구 차롑니까?"
여행 내내 잔을 들면 늘 하던 건배사, 그날은 다른 여행객들도 있고 하니 그냥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가이드 이 선생은 "괜찮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시죠." 하고 재촉을 했다.
▲ 스페인의 고속도로 휴게소 과일 판매대 |
ⓒ 길동무 |
"한국에서 오셨어요?" 식사를 마치고 나가던 여성 여행객이 반가운 듯 말을 붙였다. 여성 길동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한 사람은 "예", 또 한 사람은 "아니요"였다. 각기 대답이 달랐는데 또한 둘 다 맞는 대답이었다. "예"는 한국인이니 거침없이 나온 대답이었고, "아니요"는 인도네시아에서 왔으니 또한 맞는 대답이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당황한 기색의 그 여행객 왈 "저팬?" 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추측만 하고 설명할 틈도 없이 급하게 돌아섰다.
▲ 길동무 |
ⓒ 길도무 |
길동무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인도네시아 사람인 척 하기로 의견이 모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거나 단어가 막힐 때를 대비한 대책도 나왔다. 인도네시아어로 숫자 나열하기, 자카르타 동네 주워섬기기나 길 안내하기 등 묘안이 백출했다.
"근데 그 여행객이 인도네시아 말을 다 알아들으면 그땐 어쩌지?"
순간을 놓칠 복나눔씨가 아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한바탕 웃을 수밖에 없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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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행을 위해 ‘길동무’란 이름으로 뭉친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다섯 부부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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