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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

천하한량 2016. 8. 17. 15:08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위의 지도는 칠백의총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진왜란시 금산 지역 전투도>에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다. 맨 오른쪽 주황색 일대가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한 최초의 전투 지역이고, 맨 왼쪽의 녹색 지역이 권율, 황진 등의 분투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이치 대첩지이다. 이치대첩 다음날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몰하는 곳이 빨간 동그라미 일대이고, 다시 조헌과 영규 의병군이 2차 금산성 전투 끝에 칠백의총을 낳고 마는 지역이 노란 동그라미 일대이다. 아래의 보라색 일원은 조헌 전사 소식을 들은 변응정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전사지이다.
ⓒ 정만진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는 2차 금산 전투의 전말을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준다. 이날 기사는 '의병장 조헌과 의승(義僧) 영규가 금산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무렵 왜적은 금산에 주둔하면서 가끔 이웃 고을을 습격했다. 호남의 관군과 의병 장수들이 8∼9진으로 나누어 모든 요해처(고개)를 지켰지만 (지난 7월 10일) 고경명이 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깊숙하게 진격하지는 못했다.

다만 보성과 남평(전남 나주) 두 곳의 군사들만 재를 넘어 적을 엿보다가 역습을 당해 남평현감 한순이 군사 5백여 명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그 후 아무도 재를 넘을 수 없었다.

 칠백의총 기념관에서 보는 조헌 초상
ⓒ 정만진
조헌은 (공동으로 적을 치자고 제안한 뒤 실제로는 방해를 한) 본도(충청도) 주장(主將, 순찰사)에게 잘못 이끌려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홀로 금산의 적을 치려 했다.
전라감사 권율과 충청감사 허욱이 모두 만류하면서 함께 군사를 크게 일으키자며 공격 날짜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자꾸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 이끌고 재를 넘으려 하였다.

의병을 돕지 않는 관군, 심지어 방해까지

이에 영규가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조헌은 울면서 '군부(君父, 임금)가 어디에 계시는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만 어찌 돌아볼 수 있으리오.' 하였다.

이윽고 조헌 의병군은 북을 치며 행군하였다. 영규도 '조공(趙公,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며 승려 수백 명과 함께 금산으로 나아갔다. 영규는 전진하는 중에도 문첩(文牒, 공문)을 계속 보내어 관군이 협공해 줄 것을 재촉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관군은 오지 않았다. 적이 조헌 의병부대에 후속 지원군이 없는 것을 알고 군사를 잠복시켜 뒤를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해서 공격해 왔다. 조헌이 큰소리로 '오늘은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자.' 하고 외치니, 군사들이 모두 따랐다.

한참 동안 조선 의병군과 왜적은 힘을 다하여 싸웠다.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모두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조헌은 장막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장수들이 빠져 나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조헌은 '대장부가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면서 크게 북을 울려 더욱 전투를 독려했다. 군사들은 모두 맨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다. 마침내 의병군은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하지만 적군은 더 많이 죽었다. 전투가 끝난 뒤 시체를 운반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적들이 우는 소리가 줄곧 이어졌다.

 칠백의총에서 바라본 사당 종용사의 뒷모습과 내삼문
ⓒ 정만진
조헌이 군사를 일으킨 지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군사들에게 벌을 주지 않았지만 의군들은 모두 명령을 받들어 각자가 힘써 전투하였고, 가는 곳마다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여 대열이 어수선해지지 않았다.

당초에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원근에서 따르며 모였는데, (의병의 세력을 줄이려고) 순찰사가 가족을 잡아 가두어도 의병들은 조헌을 사모하여 떠나지 않았다.

조헌의 아들 조완기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절륜하였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의복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으려 한 것이었다. 적이 그를 주장(조헌)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조헌 전사 소식 들은 충청도 백성들, 몇 달 동안 고기 안 먹어

의병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죽은 군사의 집에서는 아무도 (남편과 아들이 조헌 때문에 죽었다는) 사사로운 원한을 품지 않고 오직 조헌이 전사한 것을 슬프게 여겼으며, 요행히 뒤에 처져 죽음을 모면한 자도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호서(충청도)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조헌을 위하여 몇 달 동안이나 소식(素食, 육류를 먹지 않음)하였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1길 71 조헌 유적지 뒷산에 있는 조헌 묘소
ⓒ 정만진
이튿날 조헌의 동생 조범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전사하였고 장졸들이 모두 (조헌을 마지막까지 지키느라) 곁에서 빙 둘러 죽어 있었다. 4일만에 조헌 시신을 관에 넣었는데 낯빛이 살았을 때와 같았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움직여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음을 깨달을 수 없었다.

2차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선열들 중 실록에 이름이 전하는 분들

이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사람 중 이름이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은 효자로서 우애가 높았고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고,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

봉사 임정식은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무재(武才, 무인의 재질)가 있었는데, 척후(斥候, 보초부대)로 진 밖에 있다가 조헌이 위급함을 보고 말에 채찍질하여 돌격했다가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선비) 이려는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김절은 맨 먼저 군사를 모집하고 전투에 참여해 힘써 싸웠다. 편비(?裨, 수하 장수)인 만호 변계온, 현감 양응춘, 봉사 곽자방, 무인(武人) 김헌·김인남·이양립·정원복·강인서·박봉서·김희철·이인현·황삼양·박춘년·한기·박찬 등은 모두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사인 박사진·김선복·복응길·신경일·서응시·윤여익·김성원·박혼·조경남·고명원·강몽조는 모두 문인(門人, 제자)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문생(門生,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 표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 식수 표지석 위에 얹힌 듯 보이는 종용사(칠백의총 사당)
ⓒ 정만진
이상과 같은 내용의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 기사는 청주성 탈환에 성공한 조헌 의병장과 영규 승병장이 관군과 함께 힘을 합쳐 금산을 회복하려다가 결국은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순절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날 기록에는 세 가지 사실이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채 문맥 속에 숨어 있다. 첫째, '충청도 순찰사에게 잘못 이끌려'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청주성 승리 후 조헌은 임금이 피란 가 있는 평안도로 가려 했다. 순찰사는 조헌이 임금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 즉 의병군이 청주성을 공격할 때 관군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은 과오를 임금에게 말하게 되면 문책이 떨어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조헌에게 금산의 적부터 치는 것이 옳다고 권유했다. 

사실 의병군들이 임금 주변에만 모여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속셈을 따로 감춘 것이 문제이지 순찰사의 의견도 현실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다. 조헌의 부장들도 순찰사의 음흉한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채 금산 공격 주장에 동조했다.

하지만 실록은 조헌이 '순찰사에게 잘못 이끌려' 마침내 순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헌 의병군이 금산의 왜적과 대혈전을 벌일 때 관군이 협조하지 않은 점을 강조한 것이다.  

 수심대에서 바라본 조헌 사당의 뒷모습(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2)
ⓒ 정만진
둘째, '함께 군사를 크게 일으키자며 공격 날짜를 약속'했던 전라도와 충청도 감사가 '자꾸 기일을 연기하자 조헌이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했다'라는 표현에 유의해야 한다. 두 감사는 금산 전투의 승산을 낮게 보았고, 그래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을 듯하다.

이 부분은 조헌의 사람됨을 가늠하게 해준다. 조헌은 '성패(성공과 실패)와 이해(이익과 피해)'만 따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군이 이길 성싶은 전투만 한다면 적군 역시 그런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투가 성립되지 않는다.

패전을 통해서도 얻는 것이 있다. 그 점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사례가 바로 조헌의 패전이다. <연려실기술>은 '이(금산 전투)로부터 감히 왜적이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당 종용사. 칠백의총은 이 건물 바로 뒤에 있다.
ⓒ 정만진
셋째, 조헌이 무턱대고 죽음은 선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금산성 10리 밖에 주둔하고서 관군을 기다렸다'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관군과 합동 작전을 제안했던 조헌 의병장만이 아니라 영규 대사도 금산으로 가는 중에 '관군의 협공을 요청하는 공문을 계속 보냈다.' 문제는 관군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군의 호남 진입을 막은 칠백의총의 의사들

실록의 본문은 당시 백성들이 조헌의 순절을 진정으로 애통해 했다는 사실을 잘 증언해준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사례 하나를 더 읽어본다.

'(조헌의 제자) 김락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석공(石工) 이춘복(李春福)에게 돌값을 물으니 "포목 70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춘복이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김락이 "스승 조 선생께서 순절하셨으므로 비석을 세워 역사적 사실을 새기려 한다." 하고 대답하자 이춘복은 "그렇다면 어찌 감히 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냥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춘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여 돌을 다듬었고, 품삯도 받지 않았다.'

 칠백의총
ⓒ 정만진
이춘복이 기증한 돌은 '칠백의총' 외삼문을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에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로 남아 있다. (순의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왕조실록도 한탄한 임진왜란 당시 관료들의 행태' 참조) 순의비 옆에는 칠백의총중수기념비가 있고,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종용사가 우뚝 자리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다. 종용사는 사당이므로 참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하나 당연한 일은, 종용사에서 참배를 할 때 이 사당에 모셔져 있는 선열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종용사에는 우선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한 칠백 의사가 제향되고 있다.

칠백 의사는 조헌, 영규대사, 이광륜, 조완기(조헌의 아들), 임정식, 곽자방, 김절, 이려, 박사진, 김선복, 복응길, 신경일, 서응시, 윤여익, 김성원, 조경남, 박혼, 전충남, 고명원, 강몽조, 변계온, 양응춘, 김헌, 강충서, 강인서, 박봉서, 김희철, 정원복, 이인현, 김인남, 이양립, 황삼양, 박춘년, 한기, 박찬, 한응성, 길안수(길재의 5대손으로 아들 서춘과 함께 순절), 김형진, 박사현, 박중립, 그리고 조선생 사졸(조헌 의병장의 이름 모를 사졸들), 승장 사졸(영규대사 휘하의 이름 모를 승병들)들이다 .

고경명 의병군과 변응정 의병군도 모두 칠백의총 종용사에서 제사

 칠백의총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중봉 조선생 일군(一軍) 순의비'는 본래의 것이 아니다. 본래의 순의비는 외삼문으로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에 있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 칠백의총을 처음 조성할 당시 순의비는 묘 바로옆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부수었다. 주민들이 파괴된 비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복원하여 외삼문 안쪽에 세웠고, 의총 옆의 것(위의 사진)은 박정희 정부의 '정화사업' 때 건립된 것이다.
ⓒ 정만진
그런데 이곳 전체의 이름이 칠백의총이라고 해서 연곤평 싸움 순절 700 의사만 종용사에 모셔져 있는 것은 아니다. 조헌 의병군이 연곤평에서 전몰하기 이전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의병군도 모시고 있다.

고경명, 고인후(고경명의 아들), 한순, 류팽로, 안영, 고선생 막좌(高先生幕佐, 고경명 선생과 함께 순절하신 이름 모를 참모들), 고선생 사졸(高先生士卒, 고경명 선생을 따라 순절하신 이름 모를 의병들)이 바로 그 분들이다.

또 횡당촌 싸움에서 전몰한 변응정, 그리고 무명의사(無名義士, 변응정 장군과 함께 돌아가신 이름 모를 분들)도 모시고 있다. 이 분들을 위하여 종용사에는 향이 피워져 있고, 찾아온 나그네들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칠백의총 경내에는 일군순의비가 둘 있다

종용사 건물 바로 뒤로 돌아들면 칠백의총 묘소가 나타난다. 그런데 칠백의총 옆에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가 또(!) 있다. (위의 사진 아래에 덧붙여 놓은 설명처럼) 이것은 1603년에 세워진 본래의 비석이 아니라 1971년에 제작된 복제품이다. 순의비 옆에는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 요약'이라는 제목의 작은 빗돌도 있다.

일군(一軍)은 하나의 군대라는 뜻이다. 순의는 의를 지켜 죽었다는 말이다. 조선생일군순의는 조헌 의병군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모두 함께 의를 지켜 죽었다는 의미이다. 적군과 싸우다가 한꺼번에 순절한 700 의병을 모시고 있는 무덤, 바로 그 금산 칠백의총 앞에 나는 지금 살아서 서 있다.

 왼쪽 끝에 내삼문, 오른쪽 끝에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보이는 풍경
ⓒ 정만진
칠백의총 참배를 마친 뒤부터는 종용사를 왼쪽 등 뒤에 두고 내려온다. 올라갈 때와 반대편으로 걷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왕좌왕하지 않고 칠백의총 경내를 두루 답사할 수 있다.

종용사와 내삼문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 기념 식수'라는 빗돌이 서 있다. 빗돌에는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錦松)으로 칠백의총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손수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 1971년 4월 13일'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과 유품들,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내삼문을 나오니 기념관이 기다리고 있다. 기념관 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물론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부터 읽어본 다음 기념관 안으로 들어선다.

'이 건물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유산인 의병의 전통을 세운 중봉 조헌 선생과 승병장 영규 대사 등 7백의사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순국하신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에는 조헌 선생과 승병장 영규대사 등 7백의사의 행장(行狀, 살아온 이력), 그리고 국방 강화 상소도, 창의도, 청주성 탈환도, 전략 회의도, 금산전 출전도 및 금삼전 순절도의 7폭 그림과 관계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평소에 순박한 우리 민족은 나라가 외침을 당하면 나아가 적과 싸워 국난 극복의 선봉이 되어 목숨을 바쳐 조국을 수호해 왔다. 우리 모두 7백 의사의 애국충정의 큰 뜻을 이어받아 호국정신의 사표(師表, 본받아야 할 모범)로 삼아야겠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유산인 의병의 전통'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당연히 이곳 기념관 안에는 우리 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유산인 의병의 전통 중 금산 일원 전투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칠백의총 기념관
ⓒ 정만진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임진왜란시 금산 지역 전투도>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념관 자체가 금산 지역 의병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니 금산 지역 전투 상황을 말해주는 역사 지도가 전시 공간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지도는 일본군이 금산으로 몰려온 1592년 6월 22일부터 8월말까지의 금산 지역 전투도이다. 지도에는 '1592년 6월 담양에서 고경명 거병, 6월 23일 개티 전투 금산군수 권종 등 수백 명, 곰티재 전투(7월 7일)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외 1500명, 배티재 전투(7월 8일) 권율 동복현감 황진 외 1500명, 눈벌 전투(7월 10일) 의병장 고경명과 800명, 연곤평 전투(8월 18일) 의병장 조헌, 승장 영규와 700의사, 횡당촌 전투(8월 27일) 해남현감 변응정 외 6차의 전투 끝에 왜군은 호남 진출을 포기하고 퇴각함'이라는 내용을 밝혀 두었고, 각 전투 지점도 표시해 두었다. 

 칠백의총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는 <토적맹약도>
ⓒ 정만진
전시실에는 특히 기록화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다. <국방 강화 상소도>는 조헌이 1591년 장차 국난이 올 것을 예견하여 국토 방위의 방책을 강화하도록 상소하는 장면이다. 해설에는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임진 국난(國亂)을 당했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토적 맹약도(討敵盟約圖)>는 왜적을 토벌하라는 임금의 교서를 받은 조헌이 1592년 7월 4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왜적 토벌을 맹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근왕 창의도(勤王倡義圖)>는 1592년 조헌 선생과 그 제자들이 국왕을 보위하고 강토를 수복할 의병을 모으고자 궐기하는 장면을 담았다.

<청주성 탈환도>는 조헌 선생이 이끄는 1600여 명의 의병이 영규대사 휘하 1000여 승병과 합세하여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금산 혈전 출전도>는 청주성 탈환 후 7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의 왜적을 토멸하기 위해 출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략 회의도>는 조헌 선생이 영규대사와 함께 휘하 참모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곽자방 등과 함께 전투를 앞두고 전략을 협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금산 혈전 순절도>는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가 이끄는 칠백 의사가 1592년 8월 18일 금산 연곤평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조헌 선생, 영규 대사,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곽자방 등 휘하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 회의를 열고 있는 광경의 <전략 회의도>(칠백의총 기념관 전시)
ⓒ 정만진
기록화 외에도 전시실에는 볼 것들이 많다. 보물 1007호인 화살통(조인세 기증)은 조헌 선생이 일진왜란 때 사용한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울 때 쓰였던 창살도 있다.

교지 종류도 많다. 1567년 조헌 선생이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교지(조인세 기증), 1592년 선조가 의주에 피란해 있으면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왜병을 하루 속히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 내용의 선조대왕교서(육병태 기증), 2차 금산전투 이래 291년이 경과한 1883년 11월 20일 고종이 조헌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라고 내린 교서(조인세 기증), 1812년 8월 20일 순조가 서천군수 권행언으로 하여금 조헌사당에 내리신 제문(조종락 기증), 순절 207년 후인 1799년 정조가 이광륜의 뛰어난 공덕을 기리면서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벼슬을 추증한 교지(이종헌 기증), 1795년 정조가 우부승지 유광천을 조헌사당에 보내어 참배하게 하면서 내린 제문(조인세 기증) 등이 진열되어 있다.

 충북 옥천군 도이면 도이길 42에 있는 후율정사
ⓒ 정만진
조헌 선생이 1574년 5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쓴 일기책(조인세 기증)인 <조천일기>, 조헌 선생의 전기, 저술 등을 수록한  20권 10책의 <중봉 전집>(1740년 영조의 명으로 간행, 조종락 기증), 임진왜란 당시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던 중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 선생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제봉 문집> 등 문집들이 다수 진열되어 있는 것이야 조헌과 고경명 등이 선비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시 말할 것도 없다.

또 왜란 발발 전인 1584년 보은현감에서 물러나 옥천군 안읍의 밤티마을에 후율정사를 짓고 은거하며 학덕이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던 시절, 조헌이 자신을 찾아온 선비들의 방문록을 실은 <심원록>,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조헌 선생이 왕에게 올린 장계를 비롯하여 고경명, 고인후, 유팽로 등이 나라에 충성토록 각 도에 보낸 격문들이 수록된 <정기록>도 있다.

 고경명이 말에 탄 채 창의를 독려하며 쓴 격문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 정만진
<마상격문(馬上檄文)>은 고경명이 1592년 6월 24일 의병을 모아 출전하던 중 각 도의 관원, 군인, 백성들에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깨우기 위해 말 위에서 작성하여 발표한 글이다. 그런가 하면, 액자 속에 들어 있는 '世篤忠貞(세독충정)' 네 글자는 고경명의 좌우명으로, 액자 아래에 붙어 있는 해설에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라는 의미로 풀이되어 있다.

문득 고경명 의병장이 말을 잘 타지 못했다는 윤근수의 '고경명 비명(碑銘)'이 생각난다. 그런데도 고경명은 말에 탄 채 창의를 독려하는 글을 썼다. '항상 올바른 마음'의 전형을 의병장은 그렇게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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