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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 유전무죄'.. 추락하는 사법신뢰

천하한량 2016. 6. 8. 01:21

사법부는 대한민국 인재들의 집결지라 할 만하다. 대부분 초·중·고교 시절 내내 학업 선두를 유지하며 법학과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등을 거쳐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을 통과한 뒤에도 꾸준히 정진해 판사로 임명된 사람들이다. 인재 구성으로 보면 행정고시를 통과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과 수위를 다툰다. 그러나 국민의 인식 속에 자리한 사법 서비스의 질은 낙제점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OECD 회원국 중 사법제도 신뢰도 ‘최하위’

7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Government at a Glance 2015)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한국이 최하위권이다. 한국인의 사법제도 신뢰도는 27%로 조사 대상국 42개국 중 39위를 기록했다. OECD 평균치(54%)에 한참 미달하고 공동 1위를 기록한 덴마크·노르웨이의 83%와 비교하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멕시코(39%), 러시아(36%), 슬로바키아(30%), 이탈리아(29%)보다 못하고 콜롬비아(26%)와 얼추 비슷하다. 이 보고서는 OECD가 여론조사기관 갤럽에 의뢰해 국가별로 국민 1000명씩을 설문조사해 만들었다.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한 장면.

인재들이 모인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왜 이렇게 싸늘할까. 우선 OECD 보고서가 주로 ‘신뢰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사법부의 ‘효율성’을 조사한 다른 국제 조사보고서는 OECD 조사와 반대로 한국의 순위가 제법 높은 편이다. 다시 말해 우리 국민은 재판 효율성과 별개로 사법부를 별로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국민이 사실과 정도의 차이를 떠나 ‘무전유죄 유전무죄’현상이 여전하다고 보는 게 사법 신뢰 저하의 원인으로 꼽힌다. 정운호(51)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재판 로비 의혹에서 보듯 ‘사법부가 전관예우와 법조브로커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일반인의 인식이다. 이처럼 “부자가 돈 많은 변호사나 브로커를 써 재판 결과를 뒤집는다”는 견해에 대해 사법부 구성원들은 펄쩍 뛴다. 한 재경지법 판사는 “설혹 한 번은 재판 결과를 부당하게 내린다고 해도 전관 변호사들이 3심제인 재판에서 어떻게 잇따라 힘을 쓰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판사 역시 “정운호 대표 사건에서 브로커의 부당한 청탁이 들어오자 해당 판사는 바로 재배당을 요청해 로비 시도를 무력화시켰다”며 “실패한 로비를 두고 사법부를 비난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막말 판사’,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재판 결과보다는 과정 때문에 사법 불신이 쌓인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사건 당사자가 비록 패소나 형을 선고받더라도 재판 과정에 대해 납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법부는 이런 설득작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압적인 재판 진행과 ‘막말 판사’논란이 끊이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법정에서 “70세가 넘어서 소송하는 사람은 3년을 못 넘기고 죽는다”, “늙으면 죽어야 해요”, “형편이 어려운데 왜 재판을 하느냐” 등의 막말을 판사에게 듣는다면 소송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당사자들은 좋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최근 대법원이 ‘법정 언행에 주의하라’고 당부하면서 막말 사례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판사는 고압적인 재판 진행으로 막말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선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재판이나 설득 논리가 불분명한 판결문도 사건 관계자의 불만을 산다. 사건 당사자와 변호인 측에서는 누가 봐도 승소할 것으로 판단되는 재판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면 재판부에 대한 뒷말을 하게 마련이다. 어떤 판결문은 판사가 판단을 내리게 된 경위를 여러 증거를 통해 설명하는 대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투로 쓰여 있다. 이런 판결문을 보면 재판 당사자들은 “판사가 사실관계도 제대로 모르고 썼다”고 불만을 품기 마련이다. 재판 과정과 판결문이 공정성과 합리성, 논리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사건당사자가 재판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게 되고 이는 사법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조계 “1%의 의도된 오판 있다는 의구심 들어”

극히 드문 일이지만 법원이 ‘기획된 오판’을 내린다는 주장조차 제기된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어떤 사건을 맡다 보면 정말 법원이 일부러 오판을 의도한 게 아니냐는 오싹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의혹의 대부분은 실체와 근거가 없다. 다만 일부 변호사는 ‘대법원이 어떤 식으로든 일선 판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법원은 이런 의혹 제기는 법원 조직을 잘 모르는 외부에서 제기하는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일축한다. 상명하복이 엄격한 검찰과 법관 개개인의 독립이 보장된 법원을 혼동해 벌어진 일이란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이른바 ‘튀는 판결’이란 비판을 듣는 판결이 있다는 건 법원이 판사 개인의 법적 양심을 보장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법원이 판사들의 재판을 일일이 통제한다면 ‘튀는 판결’은 나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법원 내부가 예전보다 의견 개진이 많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경직된 관료조직 문화가 남아 있는 만큼 소통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법원을 둘러싼 각종 의혹과 오해는 폐쇄적 조직문화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며 “활발한 내부 소통이 대국민 신뢰 회복의 밑거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박현준·정선형 기자 hjun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