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진 한 번 찍자. 찍을 수 있겠나?"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등 공식 수행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4년 12월 7일 프랑스 국빈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모습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인물들의 좌우 배치나 앞 뒤 간격 등 전체적 짜임새가 왠지 엉성하다. 당시 청와대 전속 사진사였던 사진가 장철영(45)씨는 사진을 가리키며 “그땐 찍으면서도 이 사진의 의미를 전혀 몰랐죠”라고 말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를 사흘 앞둔 20일 ‘노무현의 사진사’는 자신이 찍은 대통령의 사진 속에 숨겨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1 마지막일지 모를 기념사진
수행원들과 경호원 대다수는 영빈관 앞에서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로비에는 대통령 내외와 경호원, 그리고 장씨만 남아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통령이 장씨에게 물었다. “차에 다 탔는가?” 장씨는 “네”라고 대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대통령은 갑자기 “기념사진 한번 찍자. 찍을 수 있겠나?”라며 장씨를 바라봤다. “예? 네…” 얼떨결에 나온 전속 사진사의 대답이 못미더웠는지 대통령은 다시 물었다. “지금 다 모을 수 있겠나?” “네!” 장씨는 대답과 동시에 밖으로 뛰어 나갔다. 대통령을 기다리던 수행원들은 전속 사진사의 다급한 손짓에 “도대체 뭔데요? 왜 그래? 누구 찾으시는데요?”라며 허둥지둥 로비로 들어왔다.
귀국 직전 예정에 없는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수행원들의 표정엔 당혹감과 궁금증, 비장함이 교차했다. 사진을 찍은 장씨는 파리 드골 공항을 이륙한 지 40분만에 기념사진의 의미를 파악하고 무릎을 쳤다. 대통령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이 비행기는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라며 극비였던 자이툰 부대 방문 계획을 알린 것이다. 당시 자이툰 부대가 주둔한 이라크 아르빌은 정세가 불안하고 테러 가능성이 높아 이동 동선 자체가 매우 위험했다. 장씨는 “대통령께서는 혹시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념사진 한 장 남겨둘 생각을 하신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흔히 청와대 전속 사진사는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서실이나 홍보수석실에서 통보할 경우 사진 촬영을 하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다. 경직된 시스템 속에서 대통령의 사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씨의 경우는 예외였다. 2004년 대통령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건의를 노 전 대통령이 흔쾌히 허락하면서 경호실 통제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 장씨는 “매일 대통령을 가까이서 기록하다 보니 사진가로서 ‘직감’이란 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이 ‘직감’을 믿고 촬영한 두 번째 사진 이야기를 이어 갔다.
#2 소파에서 잠 자는 대통령
2007년 1월 참여정부 4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린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다. 대통령은 “다들 쉬세요. 나도 좀 쉴테니…”라며 혼자만의 휴식을 청했다. 수행원 대기실로 이동한 장씨는 대통령의 휴식이 무척 궁금했다. ‘직감’이 발동한 것이다. 조용히 좁은 통로를 기어서 대통령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침대가 아닌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대통령을 발견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본능적으로 셔터를 두 번 누르고 돌아온 장씨는 비서에게 “어르신 주무시는데 이불 덮어드리라”고 말했고,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이불을 들고 들어가는 비서를 따라가 몇 장을 더 찍었다. 장씨는 “한참 후 일어나신 대통령은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사진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말했다.
#3 벤치 옆에 쪼그려 앉는 대통령
장씨가 찍은 사진에선 격식을 싫어하는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한 성품도 엿볼 수 있다. 2006년 12월 북악산 등반 중 촬영한 사진 속에서 대통령은 쪼그려 앉아 곶감을 먹고 있다. 바로 옆에 벤치가 있고 그 위엔 경호실에서 준비한 방석과 물수건도 놓여 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주변에서 벤치에 앉을 것을 권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앉는 게 더 편하다”라며 청와대 운영관 즉, 셰프가 간식으로 준비한 곶감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산행을 계속했다.
장씨의 기억 속 대통령은 궁금한 게 있으면 불쑥 질문을 던지곤 했다. 장씨에게도 “카메라 안 무거운가? 몇 킬로나 되나?”라고 묻고는 “한 20킬로 됩니다”라는 대답에 입을 떡 벌리기도 했다. 어느 날 기념촬영을 하는 도중 대통령이 “잠깐만, 자네 셔터 소리는 두 번 났는데 플래시는 왜 한 번만 터졌나?”라며 전속 사진사의 정곡을 찔렀다. 장씨가 “어제 술을 마셔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충전을 못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음, 그라믄 내가 제대로 본거지?”라고 말해 좌중이 크게 웃기도 했다.
#4 이 담배 맛은 어떤가…
2007년 11월 합천 해인사 방문을 마친 직후 대통령이 담배를 피우자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본인이 가져온 담배를 권했다. 새 담배를 받아 든 대통령에게 라이터를 든 비서가 다가갔으나 대통령은 “괜찮다”며 피우던 담배를 거꾸로 들고 불을 붙였다. 대통령이 담배 피우는 모습은 찍지도 않고 찍어서도 안 되는 금기와 같다. 장씨는 “담배 피우시는 모습을 몰래 찍었는데 플래시가 작동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놀라서 쳐다보셨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다시 피우셔서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사진가로서 노 전 대통령을 최고의 피사체라고 말한다. 장씨는 “대통령 자신이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아시는 분이었기에 일상적인 기록을 허락했지만 전속 사진사를 믿는 만큼 사진에 관해선 그 어떤 간섭도 없었다”고 말했다.
#5 두 손 꼭 잡은 대통령 내외
2006년 12월 5일 호주 방문 당시 시드니 공항에 내리는 대통령 내외의 뒷모습이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영부인이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손을 꼭 잡고 트랩을 내려가는 대통령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장씨는 “대통령은 영부인에게 ‘나중에 비서랑 경호원이랑 사진사랑 아무도 없이 우리 두 사람만 놀러 갔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또, “전속 사진사로서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찍으려 노력했지만 그 분이 진짜로 원하는 사진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10~20년 후에 사진을 보여드리고 추억을 얘기하고 싶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6 “뭐 불편한 거 없어요?”
2006년 5월 어느 날 관저로 들어가던 대통령은 검측실을 방문했다. 검측실은 X-RAY 판독기 등 검색 장비가 들어선 비좁은 공간에서 경호원들이 24시간 근무를 서는 곳이다. 대통령은 좁은 실내를 들여다 보며 “근무하기에 뭐 불편한 거 없어요?”라고 물었다. 대통령이 관저 내 검측실을 방문한 예가 없었던 데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면서도 경호원들은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장씨에게는 “언제 또 오실지 모르니 청소 깨끗이 해놔야겠다” 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7 춘추관 대기실에서 메이크업
2007년 3월 8일 노 전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업무 때문에 바빴던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 직전까지도 메이크업을 할 시간이 없었고 결국 기자회견장 옆 대기실에서 잠깐 시간을 냈다. 메이크업을 하는 동안 윤태영 당시 대변인이 회견문 내용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8 세계지도가 왜 이래
2007년 11월 21일 임기 중 마지막 해외순방지인 싱가포르에서 열린 기념 만찬. 미리 세계 지도가 그려진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이 중심에 위치한 세계지도 케이크가 등장해 다들 의아해 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찍어 맛을 보던 대통령이 이유를 묻자 누군가 이 호텔 주방장이 유럽 출신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을 했고 대통령 내외는 허허 웃었다.
#9. 창 밖이 궁금해…
#10. 신발에 흙이 들어가서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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