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됐던 최빈국에서
세계경제 10위권 안팎으로 성장했고
세계의
부자클럽인 OECD의 회원국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하드웨어를 기준한다면
이미
우리들은 선진국에 진입해 있으며
이제는
소프트웨어-삶의질을 다져나갈 때 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를 않는다.
금방이라도
싸울듯한 험한 얼굴을 하고있으며
불만에 가득찬 표정들이다.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일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의 우리수준 이라면
험한 표정을 지을 정도는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들을 짚어볼 충분한 조건들이
성립되는 셈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써 이 대목에서 걸린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하는가.
적어도 행복해 지려면
이 물음에 대한 자기답변이 있어야 한다.
그건 철학이기도 하고 가치관 이기도 하다.
충분히 행복할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대부부의 이유는,
행복을 ‘소유’ 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로마사람들은 재물을 소금물이라고 했다.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다는 뜻이다.
소유가 그렇다.
물로 바다를 채울수는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채울수 없다는 말도있다.
결코,
행복은 물질의 소유는 아니다.
행복은 끝까지 ‘느낌’ 이다.
소유가 느낌의 매개는 될수있지만
행복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살아보면
어느날엔간 깨달아지는게
행복의 문제이기도 하다.
충분히 행복할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남과 자기를 끊임없이 비교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박탈감을 가지는 한
황금침대에 누워도 행복할수 없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남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을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고
본질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장 분명한 이유는,
모든 인간은
철저히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생긴것도 다르고
성격도, 학력도, 경제력도 다르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때문에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가장 파괴적인 자가당착이 된다.
나는 나일 뿐이고,
내 삶은 단지 나의 일상인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할 이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변에 흩어져있는
행복의 조각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미래의
희망을 가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생활의 발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복을 미래에서만 찾는다면
그 행복은 영원히 미래의것이 되고만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람은 죽을때까지 행복할 수가 없다.
오늘을 지나 내일에 도착하면
행복은
모레에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런 행복은
누릴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다.
행복이
존재하는 자리는 언제나 일상안이다.
지금 오늘,
여기에서 내 옆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비로서 눈이 열리고 행복을 발견할수 있다.
행복의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만족하는 마음이며 그 뿌리는 감사다.
감사없이 만족없고,
만족없이 행복은 없다.
우리모두는 불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실
불만스러운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감사하고 만족할수 있는 일들도 함께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
수술의 후유증으로
소변이 막힌 경험을 한 사람들은
시원하게 소변을 볼수있다는 사실에
감사할줄 안다.
소변을 볼수 없었던
극심한 고통과 불안이
어떤 것 인지를 알고있기 때문이다.
작은일에 감사하고 만족할줄 모르는 사람은
큰 일에서도 감사와 만족을 모르게된다.
그러니
행복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감사와 만족은
행복에 이르는 큰 문 이지만
불만은
행복에 이르는 문을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할 필요가 있다.
다른말로는 가치관의 정립이며
자기주관이
뚜렷한 개성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입맛’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모두는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
내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언제나 최고다.
똑같이
다른사람들도 자기가 선호하는 음식이 있다.
자기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매사에 남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의미다.
입맛에도 맞지않는
남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내 행복은
결국 나만의 행복이다.
남의 행복은 존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내 행복이 될수는 없다.
행복은 지극히 개성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은밀하고 깊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면
행복은
그만큼 더 빨리 찾아지기도 한다.
어떤 농부가 자기밭의 작물을 위해
열심히 농약을 뿌렸다.
그런데도
병충들이 줄어들지않고
계속 작물들을 훼손했다.
자기밭은 열심히 관리했지만
주변의 다른 밭들에서
계속
해충들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이웃농부들과 협력해서
주변의 밭들에 모두 농약을 뿌렸을 때
해충은 막아낼수 있었다.
이기심 만으로는 세상을 살수도 없고
더구나
행복해 질수도 없다.
이웃이 있어야 하고,
이웃을 배려해야 하고,
이웃과 협력해야 한다.
개성적인 것이
곧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대단히 각박하다.
매마르고 삭막하다는 뜻이다.
이 척박한 토양에 행복이 있을 리가 없다.
배려는
반드시 더 큰 배려가 되어 돌아온다.
그속에
행복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한명의 현직 교도관과
네명의 출감자로 구성된 이상한 팀이 있다.
미장이, 목수, 전기공, 도배장이가 그들이다.
교도관은 총무일을 맡고있으며
그들은 한달에 한번모여
독거노인등 극빈계층의
다 낡은 집들을 뜯어고치고 있다.
그 비용도
그들 스스로가 회비로 충당한다.
이일은
지혜로운 교도관이
출감자들의 재범을 막으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일 자체에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비로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내것을 내어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 아름다운 봉사는
행복을 잉태한 커다란 주머니가 된 것이다.
내것에 집착하고,
챙기고,
내놓지 않는한
진정한 행복은 모르고 산다.
한명의 교도관과 네명의 출소자들은
절대로 남들이 알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은
소유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느낌’ 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공을 오늘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제와 내일은 지금의 일상이 아니다.
어제는 회상하고
내일은 희망하는 것이지
오늘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상은 우리와 밀착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현실적인 삶의 현장이다.
우리가 일상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누구에게나 아는만큼만 보인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있다면
일상안에서, 주변에 숨어있는
크고작은 행복을 찾을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인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일에 게으르다.
그래서
험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게되며
불행하게 살고 있다.
행복이 바로 내 앞에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본가는 평안북도 강계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38선을 넘어온 월남가족인 셈이다.
지금 우리 가족들이
북한에 살고있다면 어떤 형편일까.
인구 2천5백만명중 1000만명이
영양실조 라는게 WHO 의 발표다.
강냉이라도 배불리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다는게
북한주민들의 절실한 고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쌀밥과 고깃국을 앞에놓고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우리가족들은
지금 남쪽에 살고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미 지적했던대로
우리는 단군이래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내가
처해있는 처지에서 주관적으로,
개성적으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서 일상안에 숨어있는 행복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작은 행복부터 챙기면
큰 행복에 도달할수 있다.
그게 행복의 비밀이기도 하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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