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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권하는 사회-"장사하며 낸 대출이 카드로, 사채로.." 중산층도 한순간 '추락'

천하한량 2015. 10. 25. 22:27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빚’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학자금 대출, 전세자금 대출은 기본이다. “전화만 하면 빌려드립니다”라는 유혹에 생활비나 사업자금을 마련하려는 서민들은 불법 사금융에도 발을 들이게 된다.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40·50대는 “빚이 더 늘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취업의 벽에 부딪힌 20대는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족쇄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 자영업자 권선영씨 이야기

지난 14일 오후 부산에서 만난 권선영씨(60·가명·여)는 5년 전 일을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당시의 두려움을 완전히 잊지 못한 듯했다. 양쪽 눈에 눈물이 흥건했다.

권씨는 “빚은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빚은 늪처럼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어요. 희망도, 계획도…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게 빚이었어요. 가도가도 끝이 없어요. 지옥 속이었어요.”

시작은 카드론이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전문직종에 종사했던 권씨는 자영업으로 직종을 바꿨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열심히 해서 조금이나마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장사가 안돼 가게 위치를 다섯 번이나 옮겼다. 그때마다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대기 위해 권씨는 대출을 받아야 했다. 은행 대출한도를 초과해 이자율이 연 15%인 카드론도 받았다. 매달 돌아오는 카드결제 대금과 이자를 합치면 월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2010년 어느 날 평소 가게에 자주 오던 남자 손님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손님은 대뜸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빌릴 수 있는 데가 다 있어요.” “다른 사람이면 이자율을 더 높게 받는데 사장님은 잘 아는 분이니까 특별히 생각해서 15%에 해드릴게요. 얼마 하실래요?” 이자율은 좀 높지만 잠깐만 빌렸다 갚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권씨는 솔깃했다. “그럼 2000만원만….” 알고보니 그 남자 손님은 사채업자였다.

카드 값을 막기 위해 빌린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빌린 돈에서 15%를 ‘선이자’ 명목으로 제하고 카드 값을 막고, 또 빌리고 15%를 이자 명목으로 제하고 카드 값을 막고, 그러다 카드 값도 막지 못하게 되자 또 2000만원을 빌리고…. 나중에 추산해보니 거래된 돈만 50억원이 넘었다. “이것만 막아야지” 하는 생각에 남편, 자녀들 카드도 썼다. 그렇게 해도 원금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자를 갚는 것도 힘들었다. 가게마저 적자가 났다. 지난 2월에는 밀린 이자만 8000만원이었다. 이자를 갚기 위해 빌린 2억원의 원금은 별개였다.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는 협박을 했다. 본인의 자금운용에도 문제가 생겼다며 가게로 찾아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돈을 안 갚아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지금 돈을 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니까.” “계속 이렇게 돈 안 갚으면 남편에게 알릴 거예요. 식구들이 다 알게 만들어줄까요?” 심장이 두근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권씨는 가족 몰래 돈을 빌린 터였다.

지난 5월 말 사채업자는 가게에 여자 한 명을 데려왔다. 권씨에게 돈을 빌려준 ‘사모님’이라고 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이런 식이에요?” “나도 바쁜 사람인데 당신 때문에 여기에 왔잖아요. 장사 계속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안되죠! 똑바로 하세요!” 이들이 소리를 지르자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은 밖으로 나갔다. “제발 나가서 이야기해요. 여기 직원도 있고 제발 나가서….” 권씨는 사정사정하며 이들을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들은 권씨에게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서였다. 7월 말까지 돈을 반드시 갚겠다고 적혀 있었다. 권씨는 각서에 서명을 했다. 권씨는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죽음밖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사모님이라는 여자는 전주가 아니라 겁을 주려고 동원된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권씨가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는 집에 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사채업자에게 가족이 무엇을 한다거나 집주소를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평범했던 권씨의 가정은 금이 갔다.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가게 일을 하다가도 “내가 미쳤지”라는 생각에 맥이 풀렸다. 권씨는 “사는 게 아니었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빚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권씨도 몇 번이나 ‘죽어버릴까’ 생각했다. 권씨는 “차를 몰고 앞이 낭떠러지인 커브길을 돌 때면 여기서 떨어지면 끝나겠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불법사채 신고’라고 돼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도 있지만 결국에는 “경찰서로 가세요”라는 말만 돌아왔다.

권씨는 최근 다른 일자리를 얻었다. 개인회생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권씨는 그래도 희망을 찾을 거라고 했다. “빚이 없다면 행복해질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정말 빛과 소금처럼 살고 싶어요. 나 같은 사람에게 힘이 된다면요, 끝까지 도울 거예요.”

◆ 수렁에 빠진 사람들

박영모씨(가명·42)는 1990년대 말 경기가 좋을 때 보험 설계사를 하다가 돈을 모아 보험대리점을 차렸지만 2년도 안돼 망하면서 카드론 대출을 이용했다.

여러 개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해봤지만 3000만원 정도의 빚이 남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박씨는 30대 중반에 식당에 취직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악착같이 생활한 끝에 3년 만에 카드론을 청산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버지가 당뇨로 쓰러지면서 또 1000만원짜리 카드론을 받았다. 박씨는 “옷도 안 사고, 차도 없는데 월세와 카드론 이자만 매달 70만원”이라며 “더 이상 빚이 불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영업자인 40대 신영태씨(가명)는 사업을 하면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게 됐다. 처음에는 제1금융권 은행의 마이너스통장으로 충당이 됐지만 사업을 확장하자니 목돈이 필요했다. 제2금융권, 제3금융권으로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대출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해 허덕이게 됐다.

길을 걸어가다 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봤다. “대출해드립니다.” 다급한 마음에 문구 아래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심사 기간도 길고 대출 조건도 까다로운 은행과 달리 별다른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신씨는 빚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자율이 무려 1000%였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더니 어느덧 쌓인 빚만 8억~9억원으로 늘어났다. 결국 신씨는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

중산층에게도 빚은 남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보증을 잘못 서거나 사채를 이용한 경우 고통은 가족 전체로 이어진다.

50대 최신혜씨(가명)는 전문직에 종사하던 남편이 보증을 선 빚을 갚기 위해 사채를 쓰면서 빚에 몰리게 됐다. 시작은 남편의 실수였지만 해결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이자만 160만원이었다. 갚아야 할 돈은 점점 불어났지만 일을 아무리 해도 갚아지지 않았다. 최씨는 “일반적으로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고리대금업은 돈을 벌어서 빚을 갚을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며 “우리는 돈을 갖다 바치는 도구가 된 것”이라고 했다.

사채업자들은 가족들을 협박했다. 최씨는 “전화를 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고 직장에 와서 창피를 주겠다거나 자식들을 운운하며 협박을 했다”며 “휴일이 돼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감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혜리·김상범 기자 lh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