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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라면의 역사를 찾아서

천하한량 2015. 9. 21. 02:13

한국 라면의 역사를 찾아서

   

 

한국 라면의 독특한 맛은

시간이 갈수록 내 입에도 익숙해졌다.

두 나라의

봉지 라면을 양손에 들고 보니

왠지 꼬불꼬불하고 기다란 면의 끝이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한국에 오기 위해

바다를 건너올 때 느꼈던

묘한 일체감과도 통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라면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역사를 살펴보기로 했다.

한국과 일본 현대사의 흐름에 배를 띄워서...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故전중윤회장

 

한국의 라면 역사를 찾아서

 

일본 오사카 이케다 시에는

인스턴트 라면 발명기념관이 있다.

한큐 다카라즈카선 이케다 역에서

'면의 거리'라고 명명된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연한 갈색 돌담에 싸인,

마치

미술관 같은 느낌을 풍기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 앞뜰에는

치킨라면 봉지를 손에 든

닛신(日淸)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동상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인스턴트 라면 발명기념관, 오사카

 

안도 모모후쿠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일본 식탁문화에 일대변혁을 가져온

인스턴트 라면의 발명가다.

 

그는

식민지 시절 대만의 타이난 현에 있는

작은 도시 보쿠시에서 나서 자랐다.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자질이 있어서

22살에

이미 타이페이 시에서

속옷 판매점으로 큰 성공을 했다.

 

이후 오사카로 건너와

섬유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전쟁 중에는 군수품으로까지 

넓힐 정도로 사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좌절의 순간을 맛보아야만 했다.

군용기 엔진 부품을 제조하는

공장의 경영에 참가했을 때

부품을 빼돌린다는 혐의를 받고

헌병대로 소환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만계 신용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돼지 않아 도산하는 바람에

많은 부채를 남긴 조합을 수습하느라

전 재산을 잃기까지 했다.

 

바닥에서

새로 출발한 것이

바로 라면 사업이었다.

 

 

 

1958년 봄,

초라한 가건물 연구소에 모인

그의 가족들은

환희와 감격의 눈물로 뒤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온 험난한 여정을 회상했다.

 

그들 앞에 놓인 대접에는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치킨라면의 뜨거운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 책의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공부하는 지한파 일본인이다.

 

1988년 서울 시내의

일어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한국인 아내까지 얻었다.

 

일본으로 귀국 후

안내원, 통역 등을 맡으며

수많은 한국인들과 교류했다.

2007년부터 교토에서

한국어학원 '녹두학원'을 운영 중이다.

 

한국의 국민배우 안성기의 평전인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를 비롯해

한국어 학습서 등을 다수 출간했다.

 

2013년

세계는 1천56억 개의 라면을 먹었다.

인구가 많은

중국이 462억2천만 개로 1위이다.

한국은 36억3천 개의 라면을 먹었다.

 

1인당 라면 소비는

한국이 74개로 세계 1위이다.

이어서

베트남이 세계2위이다.

한국인은

매주 평균 1.4개의 라면을 먹는다.

매일 1개 먹는 사람도 있는데 

이 통계 믿어도 되나?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일본의 라면이 바다를 건너와

이렇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중적 음식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소개한다.

 

전쟁 이후의 배고픔을 해결코자 

한일 양국의 두 거인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와

삼양라면의 전중윤 회장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라면의 면발이 왜 꼬불꼬불한지,

라면 스프는 정말 해로운지,

라면의 나트륨 함량 등

라면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규명해주며,

라면 가격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주말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추천한다.

 

서양의 와인 리스트,

파스타의 종류,

커피의 역사는 그렇게 자세히 알면서도,

 

출출하면

바로 뜨거운 물 부어 먹는

'우리의 라면'에

그리 무지해서는 안된다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가

자기 집 문 앞에서

'라면 먹고 가실래요?'라고

물어보기를 그렇게 기대하는 남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강조한다.

 

 

 

"추운 겨울 밤,

보초근무를 교대하고 들어와

페치카의

시뻘건 불에 라면 끓여 먹으며

그렇게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

 

라면이

어떻게 군대 페치카에까지 왔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있어야 한다.

 

라면 값이 싸다고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가치까지

그렇게

무시하면 정말 안 되는 거다.

양은 냄비에

대충 끓여 먹는 음식이라고

그렇게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무라야마 도시오

 

1988년 서울 올림픽,

저자는

당시 서울의 일본어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배고픔을 달래려고

도심 빌딩숲에서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간판이

바로

'라면 전문점'이었다.

기대에 부푼

그는 식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라면 메뉴 중 하나를 골라 주문을 했다.

 

한국의 식당에서 처음 라면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빨간 국물에 가라앉은 굵은 면발이 그를 압도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눈에 스몄다.

 

국물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워 보였다.

한 입 먹어보니

혀가 저리고 목구멍을 지나간 국물이

목을 찌르듯 매워서 그만 콜록거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국 라면과의 만남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일본에선

인스턴트 라면을 식당에서

좀처럼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라면을 비교해 보았다.

일본의 라면은

무게가 80~90그램 정도인데,

한국은 120그램을 넘겼다.

 

말하자면

본은 간식 정도로 여기지만

국은 당당한 한 끼 식사로

라면을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그는 한국의 라면 역사를 찾아 나섰다.

 

 

 

아홉 번의 실패, 한 번의 성공

 

"북한군 남한 침투, 모든 전선 총공격 개시, 개성 점령....."

 

신문의 호외 면을 바라보는 청년은

올해 28살인 오쿠이 기요스미였다.

 

그는 얼마 전

동료 몇 명과 함께 농림성의 위탁을 받아

이노카시라 공원 역이 코앞에 있는

무사시노 지역에 즉석 면(麵)을 제조하는

묘조(明星)식품을 설립했다.

 

'한국동란(韓國動亂)'이 발발한 것이다.

그도

한때는 군인이었다.

패전을 앞 둔 때에 육군 기상교육대에서

자동차반 반장으로 종군했는데,

당시의

전쟁 참상이 어제 일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의 맹공으로 

부산까지 쫓겨 내려간 한국군과 연합군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서울을 탈환하고 평양을 공략한 후

중국 국경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중국의 전쟁 개입으로

혹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았다.

 

당시

패전국 일본은 이 전쟁의 특수로

경제에 큰 활력을 맞고 있었다.

일본은

목재, 시멘트, 사료 등에 주력하는 한편

철강, 금속, 해운 같은 기간산업에 대해선

서서히 에너지를 비축함으로써

다가올

고도성장의 기반을 차근차근 다져나갔다.

 

이런 경기의 여파로

식품업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등장했다.

쌀이 부족해서

대체 식량의 확보가 시급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건면(乾麵)이 부상했다.

그래서

오쿠이의 창업 꿈은 커져만 갔다.  

 

 

 

건면만으로는

수요의 한계가 있고 해서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제품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국수를 말리다가 비가 오면

급히 안으로 들이는 반복하면서

절반 이상

폐기처분하는 일을 경험하면서

오쿠이는 공장 한쪽에

급한 대로 건조실을 만들고 실험을 시작했다.

자연건조를 대체할

실내에서

국수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렇게 비관할 일만은 아니야.

이번 실패는 반드시

다음 도전 때

성공을 가져다줄 열쇠가 될 걸세.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

어차피 밑바닥에서 시작한 거 아닌가?

 

열 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렇게 끙끙 앓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앞으로

여덟 번은 더 실패해도 끄떡없어"

 

 

 

 

1954년 2월,

일본 최초의

'이행식 자동건조장치'로

생산한 건면이 시장에 출시되었다.

석유난로를 이용해 건조를 하다가

실패를 맛본 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오쿠이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가 만든

건조기의 특허를 신청하지 않고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품질로 승부를 걸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일시적으로 경기가 동결되더니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후 1957년까지 호황의 연속이었다.

'진무(神武)'경기'라고 명명된

이 시기엔 소비가 대폭 증가했고,

 

서비스 관련 분야와

내구 소비재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특히

 TV, 냉장고, 세탁기 등은

서민들에겐 부의 상징물이었다.

 

'전후 10년 동안

일본의 실질국민소득은 평균 약 11퍼센트,

공업생산 23퍼센트,

수출액은 46퍼센트 성장을 이어갔다'

- '쇼와 31년(1956년) 경제백서' 중에서

 

 

 

한편,

오사카의 닛신식품은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해

우메다의 한 백화점에서 시식 판매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완판되었다.

 

하루에

6천 개밖에 생산하지 못하자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일 생산 10만 개의 공장을 다카츠키라에 신설했다.

 

용기에 라면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2분이면

먹을 수 있는 제품이라

소비자들은

마법의 라면이라고 난리였다. 

 

 

꿀꿀이죽에 사람들이 몰려들다

 

 

 

제일생명 6대 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중윤은

회사 빌딩

바로 앞에 있는 남대문 시장으로 나갔다.

 

시장 곳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가게 한쪽에서

커다란 솥에 뭔가 끓이고 있고

이를 대접에 담아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5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고급 담배가 한 갑에 50원,

버스 요금이 8원이었다.

 

전중윤도

20분 정도 기다려서 한 접시 받아 들었다. 

하도 오래 끓여서 뭔지 형체는 없지만

고기 냄새가 살짝 풍기는 그런 잡탕이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이빨 사이에 뭔가가 끼여서 꺼내 보니

깨진 단추 조각처럼 생겼다.

숟가락으로 대접을 휘 저어보았다.

세상에,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가며 사 먹던 음식은

바로

미군 기지에서 잔반으로 버린 음식을

다시 끓인 것이었다.

그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이런 것도 음식이라고 허기를 채우려고 하는데, 

보험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자신이

평생을 걸고 이루어야 할 일은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하여'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찾아내는 것 아닌가.

 

모두가 배곯지 않고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전쟁의 피난열차 안에서

뼈저리게 맛보았던 배고픔이야말로

자신과 우리 민족이

공유한 통한의 기억이 아니었던가. 

그는

지금이야말로

그 일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인스턴트 라면에 도전하다

 

1959년 8월의 어느 날,

묘조식품 사장실에는 진지한 모임이 있었다.

여기엔

고마키 헤이사쿠 공장장,

삶은 면 제조를 담당하는 후지타 기요시,

그리고

오쿠이의 아내 도시코도 참석하고 있었다.

 

 

 

무더운 이날은

여러 종류의

인스터트 라면을 시식하는 자리였다.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들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었다.

 

동명상행(東明商行)의 장수면은

남극탐험대가

휴대식량 중 하나로 가져갔는데,

비타민과 칼슘 등이 첨가되어 있었다.

 

오쿠이는

새삼

인스턴트 라면의 상품 가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후발주자로 나서는 만큼

기존 제품보다 훨씬 맛이 좋고

질도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불타올랐다.

 

묘조식품은 고생을 거듭 한 끝에

맛을 내는 스프의 개발을 완료했다.

 

언젠가 

묘조 측에 라면 생산을 제안했던

동경식품의 아나자와 아키라씨가

라면 생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다. 

 

1959년과 1960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이 두 자리를 기록하며

'이와토 경기'라고 불리는 시기에

일본의 각 기업들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이중에서도

상사(商社)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다.

 

동경식품도

대기업의 상사 회사였다.

시식용 제품으로 시식회를 가진 후

괜찮은 평가가 나온다면

동경은 자신들의 유통망으로

대규모

판매 루트를 개척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묘조 또한

상사의 판매 루트가 필요했기에

그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시식회는 실패,

그것도

대실패였다.

 

시식용 제품의 선택을

영업부의 출하 담당 직원에게 맡긴 탓이었다.

 

묘조가

라면 양산체제를 갖출 무렵,

동경식품과 함께

대기업 식품회사로 알려진

북양상회(北洋商會)에서 사업을 타진해왔다.

 

원래

미쯔비시그룹의 계열사였던 북양은

1925년 창립 이래 연어 통조림 등 

통조림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업 분야의 개척을 준비하던 중

라면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미쯔비시상사는

닛산식품과 제휴하고 있었지만

대리점 계약은

간사이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도

수도권 지역의 제조업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1977년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큰딸 박근혜(현 대통령),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앞줄 왼쪽)과 함께 서울 배화여고 교정에 설립된 ‘육영수여사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재봉실을 둘러보고 있다.

육 여사는 배화여고 16회 졸업생이다.

이 기념관은 배화학원 기성회장이던 전중윤 회장이 건립해

학교에 기증했다. [사진 삼양식품]

 

◆전중윤, 정권의 핵심 김종필의 도움을 얻다

 

1961년 10월,

삼양제유는 사업의 폭을 넓혀서

본격적으로 라면 제조의 기본을 정비하려고 

회사명을

삼양공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이로부터 2년 후의 일이다.

제면기계 도입을 추진중이던 전중윤은

오퍼상으로부터

다양한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을 입수해

독자적인 분석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에선 닛산식품을 비롯한

여러 인스턴트 라면 제조업체 간에

제조법 기술에 관련한

특허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면기계 한 대가 6만 달러라는

일본의 견적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해방 후

한국의 외화 부족은

무역수지 불균형으로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오늘 제가 가지고 온 게 있습니다.

우선 맛을 좀 봐주십시오"

 

 

 

가방에서

일본 인스턴트 라면을 꺼낸 전중윤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시식을 권했다.

그릇에 끓는 물을 붓고

잠시 기다렸다가

면 한 젓가락을 먹던 김 부장은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탄성을 질렀다.

"오오!

일본을 몇 번이나 갔는데

이런 건 처음이에요.

박의장한테도 한번 드셔보라고 할까"

 

당시

한국의 식량 사정은

식생활 개선이 불가피했다.

외화 6만 달러를

마련해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 부장은

모처로 전화를 걸고 또 걸더니

석 달 정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미국의 경제원조 일환으로

농림부에 10만 달러의

자금이 들어올 예정이므로

여기에서

5만 달러 정도는

전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1963년 1월,

그토록 기다리던 외화할당 통지가 도착했다.

일본행 티켓을 받아 들자

정중윤은

자신의 계획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끝내 인간의 강인한 의지가

승리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반세기 동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이 나라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덧없이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어떻게 벗어던질 수 있었을까.

 

뜻을 품은 사람끼리는

서로 통한다는 믿음 또한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길러온 신념이었다.

 

 

 

운명적인 회담

 

묘조식품 본사 응접실,

오쿠이 기요스미와 전중윤은 처음 만났다.

오쿠이의 나이가 41세,

전중윤은 이보다 3살 위였다.

 

창경궁의 

벚꽃으로 말문을 연 전중윤은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나라임을 강조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사업계획을 말하기에 앞서

한국의 식량 사정을 먼저 말했다.

 

서울 시내 남대문 시장 거리에서

미군 병사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뒤,

라면이라는 새로운 상품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면서

꿀꿀이죽이 5원이니까,

라면 가격을 10원 정도로 책정하면

한국인의 배고픔과

식량 사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포부를 밝혔다.

 

이어서

그는 에도시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 큰 역할을 했던

아메노모리 호슈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했다.

 

아메노모리는

당시

부산에 설치되어 있던 왜관(倭館)에

여러 해 동안

머물며 조선의 언어를 배웠는데,

그가 남긴 책에는

'성(誠)과 신(信)의 교류'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언제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이런 인물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오쿠이는

자신도 모르는

일본 역사 속 인물를 언급하며

설령

일본인이라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면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는

전중윤의 진심이 깊게 와닿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힌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교훈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받아들여야만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과 공간을 이어준다고 하는 것이로군요" 

- 오쿠이 기요스

 

 

파격적인 기술제휴

 

"두 라인

설치비용은 모두 합해서 천만 엔,

지금 환율로 환산하면

2만 7천 달러에 구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삼양식품이 독자적으로 생산이 가능할 때가지

기술지원은

우리 묘조식품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지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건 무상 제공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패전 후의 극도로 악화된

경제상황에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제안을 하겠되었다는

오쿠이 사장의 설명이 있었다.

 

바로 내일부터

사이타마에 있는

란잔 공장에서 연수를 받고

직접

라면 제조 공정을 확인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이해될 때까지

공장 책임자에게 

질문하라는 말도 함께했다.

 

'우리의 만남을 감사하는 의미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스프 배합표입니다'

 

 

 

한 달 가까이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하네다 공항에서 귀국하려는데

오쿠이 사장의 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봉투를 내밀었다.

사장의 선물이라며

절대로

비밀을 보장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비행기 자리에 앉아 봉투를 펼치니

한 장의 메모가 들어 있었다.

 

 

인스턴트 라면, 무시하지 말라

 

책은

한국의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과

일본의 묘조식품 오쿠이 키요즈미의

라면 기술 전수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는

수십 차례의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두 기업가의 실제 이야기를 추적하고,

한국과 일본의 라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이윤추구보다

'국민의 식생활 개선'이라는 사명에

뜻을 모은 두 사람의 경영철학은

현 시대의

경영자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하겠다.

 

잔무가 많아 출출한 밤

야식이나 밥을 대신해

툴툴거리며

끼니를 때우게 해주는 라면이 만들어지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라면 속에 담긴

깊은 철학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by/오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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