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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산증인 故 이종우 원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천하한량 2015. 9. 16. 01:16
태권도 산증인 故 이종우 원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글. 서성원 객원 칼럼리스트 | 긴급구조 태권도 진행자>   (2015-08-10 오전 10:09) ㅣ 추천수:6 ㅣ 인쇄수:10

고인의 태권도 생애와 기여도를 반추하며
태권도 이론과 조직 뼈대 구축한 재주꾼
 


고 이종우 원로
8월 8일 오후, 서울에서 무주 태권도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종우 원로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태권도 원로 중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배웠던 것이 많았기에 마음 한켠이 저려왔다. 

고(故) 이 원로의 장례는 국기원,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진흥재단 등 태권도 단체가 함께 ‘태권도장(跆拳道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은 정만순 국기원 원장,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김태환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김성태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 이승완 지도관 관장 등 5명이며, 장례위원은 각 단체 이사진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국기원은 고인의 태권도 발전을 위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추서단(10단)을 수여하고, 오는 11일(화) 오전 6시 30분 국기원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 원로는 태권도 발전의 공헌자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 창립에 기여하며 제도권에 발을 내디딘 후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국기원) 건립위원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창립준비위원장, WTF 부총재 겸 사무총장,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기술심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태권도 발전의 한 축(軸)을 담당했다.

특히 1960∼70년대 엄운규 원로와 함께 태권도계를 통합해 협회를 창립하고 경기화를 추진하며 세계화의 발판을 다진 정통 태권도인이다. 그런 그를 두고 박철희 원로는 “태권도계의 재주꾼”이라고 했고, 강기석 언론인은 “태권도계에서 조직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은 이종우다. 그는 2세대 선두주자로 태권도를 통합할 때 ‘막후의 인물’로 활약했다”고 평했다.

물론 과(過)도 있다. 인생에 흠결이 없을 수 없어 추문(醜聞)도 있었다. 하지만 태권도 현대사를 논할 때 그를 빼놓고 말해선 안될 정도로 많은 족적을 남겼다. 

이 원로는 어떤 사람이고 태권도 생애는 어땠을까? *(고인을 이종우로 표기)

이종우는 1928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부친은 서울로 이사 와서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다고 한다. 꿈이 많던 청소년 시절, 보이스카우트(소년단)으로 활동한 그는 친구 동생이 하는 ‘18기’ 무술을 보고 매료돼 조선연무관(朝鮮鍊武館)에 입관했다.

당시 그의 큰 키(180Cm)를 눈여겨 본 소년단 중구 지대장의 권유도 그가 무술계에 발을 디뎌 놓은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이종우는 조선연무관 공수도부(권법부)가 출범한지 20일 후인 46년 3월 23일 입관했는데, 배영기, 김복남, 전입섭, 이병로 등이 먼저 입관해 있었다. 입관비와 월회비를 내고 그곳에서 공수도를 익힌 그는 49년 경신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3단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이종우는 부산 피난 시절, 주위의 도움으로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건국대 부속 유치원을 빌려 무술을 가르쳤다.

또 당시 학생유도연맹 부위원장이었던 친구 김인화 등과 함께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하는데 앞장서며 그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는 등 무술 단체의 조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한공수도연맹의 주된 업무는 각 관(館)을 관리 감독하고, 공인 단증을 발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 결속력 부족으로 와해됐다.

그 전에 앞서 이종우는 53년 정전 협정 전에 서울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어수선한 서울에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고심 끝에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하는 형의 권유에 따라 보름간 조수로 일했으나 돈벌이는 시원찮았고 폐결핵에 걸려 피로가 쉽게 찾아왔다. 그는 당시를 상황에 대해 “별의별 손님을 다 만나는 중노동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울시청에서 부산 피난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사업가)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택시 조수 일을 그만 둔 그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의기투합, 서울에 백화점을 개점하고 관리부장으로 근무했다. 그 후 6개월 만에 상무이사가 됐지만, 백화점 업무를 등한시하면서 젊은 혈기를 탕진한 끝에 백화점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이제 이종우가 갈 곳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쟁 중에 전상섭이 북으로 납치되자 조선연무관에서 사범으로 활동했던 윤쾌병(가라테 7단)에게 제안해 조선연무관을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 그는 궁여지책으로 외도(外道)를 했던 생활을 정리하고 지도관에 복귀했다. 1954년의 일이었다.


당시 별도의 사무실과 수련장이 없었던 지도관은 을지로에 위치한 한국체육관에 터를 마련하고, 혼란한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권투, 유도,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었다.

“50년대 중반, 심사를 시행할 때 민감한 사안은 각 관(館)의 고참들의 단(段)을 어떻게 정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종우를 비롯해 엄운규, 손덕성, 이남석, 현종명 등은 사범 자격인 4단을 줬다. 승단심사는 실기로 했는데, 당시 이종우는 맹장염에 걸려 서류심사로 인준했다.”

1950년대 후반 국내 무술-무도계에는 공수도·수박도·화수도·권법·태권도 등의 명칭이 난립했다. 그 때 군세(軍勢)를 등에 업고 최홍희가 청도관과 오도관 세력을 결집시켜 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창립총회에는 6개 관(館)의 대표가 모여 통합체 구성에 합의했다.

초대 회장은 청도관 명예회장이자 오도관 관장인 최홍희가 맡았고, 부회장은 송무관 관장인 노병직과 지도관 대표인 윤쾌병이 맡았다. 당시 이종우는 지도관의 서열상 윤쾌병을 모시는 위치였지만 현종명, 고채전 등과 함께 상임이사에 선임됐다.

그러나 이종우는 최홍희의 주도로 창립된 대한태권도협회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협회 명칭을 결정하기 전 이종우는 노병직, 윤쾌병과 함께 ‘공수도’를 주장했지만, ‘태권도’를 주장하는 최홍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로써 6.25 전쟁 중에 창립된 대한공수도협회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61년 5월 박정희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문교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포고령에 따라 유사단체 통합을 추진했고, 여러 갈래를 퍼져있던 국내 무술계도 61년 7월 통합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최홍희는 박정희에 의해 예편한 후 말레이시아 대사로 부임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최홍희는 이종우와 관련된 일화를 이렇게 밝혔다. <최홍희 著 ‘태권도와 나’ 참조> 
“나는 (흐트러진 태권도계를 바로잡기 위해) 앙숙 간에 있던 청도관장 엄운규와 지도관 이종우 수석사범의 손을 잡게 한 다음 창무관장 이남석을 한남동 나의 자택으로 불렀다.

그들에게 태권도협회 진척에 관해 물으니 이종우가 “장군님 말씀대로 한데 뭉쳤습니다만, 명칭 때문에 옥신각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군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각자 연구한 이름을 문교부에 제출해 문교부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하고 타진했다. 그러자 이종우는 내가 문교부에 압력을 가해 태권도를 채택하게 하는 줄 알았는지 “그렇게 하면 태권도가 되고 맙니다”라고 단정했다.”

위의 내용은 최홍희의 회고록이기 때문에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홍희가 수하인 남태희와 함께 작명(作名)했다는 ‘태권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최홍희는 공수도와 당수도는 왜색 명칭이라며 태권도 명칭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르켜 ‘친일망국노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이종우는 왜 ‘태권도’ 명칭을 싫어했을까? 이종우의 후일담.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최홍희가 부대에서 여러 가지를 조합해 무술을 만들었는데, 그게 모두 일본 거예요. 가라테(공수도)를 기본으로 삼은 거죠. 가라테를 기본으로 하고 명칭만 태권이라고 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가라테라고 인정한 우리가 더 순수하죠.”

어쨌든 이종우는 껄끄러운 상대였던 최홍희가 말레이시아로 떠나자 행동반경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그는 유사단체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옵서버’ 자격으로 통합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도관 대표는 윤쾌병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각 관(館)으로부터 양해를 구해 ‘옵서버’로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민감한 사안은 통합체 명칭이었다.

태권도와 공수도가 팽팽하게 맞서자 윤쾌병은 태권도의 ‘태’와 공수도의 ‘수’를 따서 태수도(跆手道)로 할 것을 제안했고, 표결에 붙인 결과 6표 중 4표(기권 2표)를 얻어 협회 명칭은 대한태수도협회로 결정됐다. 이런 결과를 이종우는 수용했다. 손을 펴는 것(手)이나 쥐는 것(拳)이나 마찬가지로 본 셈이다.

그 후 61년 9월 창무관에서 열린 대한태수도협회 제1차 이사회에서 이종우는 9표를 얻어 5표를 얻은 엄운규와 함께 부회장에 선임됐다. 회장은 대외 인사로 하자는 결의에 따라 채명신(국군 장성)을 추대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태수도협회의 골격이 완성됐다. 이 과정에서 각 관의 이해득실과 노병직, 황기, 윤쾌병 등 1세대들과의 갈등으로 많은 마찰을 빚었지만, 그래도 대한태수도협회가 창설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한 이종우와 엄운규였다.

특히 이종우는 지도관 대표였던 윤쾌병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대한태수도협회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이를 두고 박철희(강덕원 2대 관장·대한태수도협회 이사)는 “이종우, 그 양반은 재주꾼”이라며 그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1961년 9월, 우여곡절 끝에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가 창립됐다. 협회 집행부 명단을 보면 ▷회장=채명신 ▷부회장=이종우·엄운규 ▷상임이사=남태희·이용우·이영섭·오세준·고흥명 ▷이사= 현종명·이교윤·박철희·고재천·송태학 ▷감사= 차수룡·이희진 등이었다.

당시 대한태수도협회의 현안은 각 관(館)의 유단자 조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 관별로 행해지던 형과 대련, 격파 등의 기술 차이를 없애기 위해 심사대표단을 구성했다. 이때 이종우는 이남석·엄운규·이영섭·박철희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채명신 초대 회장(군사혁명위원회 감찰위원장)이 군 내부 문제로 회장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협회의 실질적인 업무 집행은 부회장이었던 이종우와 엄운규가 처리했다. 일종의 ‘실세(實勢)’였던 셈이다.

대한태수도협회가 창립이 됐어도 내부 갈등은 여전했다. 1962년 7월, 소위 1세대라고 하는 황기와 윤쾌병 등이 ‘종신제 최고 심사위원’을 요구해 왔다. 협회 구성 과정에서 주도권을 제자들에게 빼앗긴 일종의 소외감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하루빨리 사태를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종우는 이남석, 엄운규와 수차례 회의를 한 끝에 ‘종신제’ 대신 ‘연한제’로 합의를 보고 이사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사들은 논의할 가치가 없다며 일축해 난항이 거듭됐다.

이에 황기는 1962년 7월 20일, 대한태수도협회 이남석 이사장에게 서한을 보내 협회 탈퇴를 통보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종우는 황기의 탈퇴 서한을 접하고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통합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황기와 윤쾌병의 탈퇴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이종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하게 됐다. 1962년 8월 29일, ‘무덕관장 황기-지도관장 윤쾌병’이라는 명의로 탈퇴서가 협회에 전달되자 그 때부터 같은 지도관 소속이었던 윤쾌병과 이종우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관장 윤쾌병-대표 이종우’라는 비정상적인 지도관의 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종우는 지도관 내분이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협회 참여를 거부하는 윤쾌병 추종자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지도관의 조직을 정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1964년 4월 대한태수도협회 규약을 개정하고 2대 회장으로 박종태(공화당 국회의원)를 추대하면서 탄탄대로를 걷던 이종우는 64년 후반,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마치고 귀국하자 제동이 걸렸다. 이종우와 껄끄러운 사이였던 최홍희는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작명한 ‘태권도’가 사라지고 ‘태수도’가 통용되는 현실에 분개했다.

당시 최홍희의 심경. <최홍희 著 ‘태권도와 나’ 참조>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와 보니 국내 태권도계는 이종우, 이남석, 그리고 엄운규를 주축으로 한 대한태수도협회가 체육회 산하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또 황기와 윤쾌병이 중심이 된 수박도회는 직접 문교부에 사단법인체로 등록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나 태권도는 이름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1965년 1월, 정치-체육계 배경으로 협회장에 취임한 최홍희는 이종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태수도협회’를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꿨다. 최홍희는 “서로 기술이 다른 오합지졸로 엉성하게 구성한 태수도협회를 장악해 볼 야심을 품었던 이종우는 손을 들게 됐다.

총회에서 이종우가 고집하던 태수도가 한 표 차이로 졌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울면서 죽어도 가라테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추태를 보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이종우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이에 대한 이종우의 주장.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태수도로) 한번 정했으면 됐지 왜 자꾸 바꾸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최홍희가 체육회에 압력을 넣어 사태가 아주 복잡해졌다. 나는 그때 ‘왜 체육회가 명칭까지 바꾸려고 하느냐?”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태수도 간판을 내리고 태권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친 놈(최홍희)이다. 내가 그것 때문에 울었겠는가? 오히려 그 자식이 술만 먹으면 울면서 ‘나는 두 사람(이종우와 엄운규) 밖에 없어, 나는 믿을 사람이 없어’ 그랬다.”

당시 이종우와 최홍의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종우와 최홍희의 ‘불편한 관계’는 60년대 중·후반에도 계속됐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는 ‘애증의 관계’라고 보지만, 이들은 당시 태권도라는 조직 사회에서 서로 밀고 댕기는 신경전을 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66년 1월,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된 지 1년 만에 불신임으로 불명예 퇴진을 했다. 그의 퇴진을 계획한 것은 이종우였다. 이종우 후일담. <태권도신문 1997년 10월 인터뷰>

“최홍희는 협회를 사조직으로 여겨 독선적인 협회 운영을 일삼았다. 그래서 엄운규와 그의 경질을 시도했다. 협회 총회가 있던 날, 아침 일찍 최홍희의 한남동 자택으로 찾아가 사퇴를 종용했더니 6개월만 더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명예와 돈, 권위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서, 명예를 위해 국제태권도연맹을 만들어 줄 테니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이종우의 주장은 사실일까? 이에 대한 최홍희의 반론은 애석하게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저술한 ‘태권도와 나’라는 회고록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그만큼 불명예 퇴진은 세상에 공개적으로 밝힐 만큼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최홍희는 1966년 3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했다. 이때 이종우는 기술위원장에, 엄운규는 사무총장에 각각 선임됐다. 그러나 이종우는 얼마 되지 않아 기술위원장을 사임했다. 왜 사임했는지 그때의 정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홍희가 추구하는 태권도와 이종우가 추구하는 태권도가 명백히 달랐다는 것이다. 두 사람간의 자존심 싸움과 경쟁심은 급기야 악연(惡緣)으로 치달았다. 최홍희는 훗날 “이종우는 태권도 기술은 없고, 음모와 아첨의 명수”라며 힐난했다. 인격모독에 가까운 말을 할 만큼 최홍희는 이종우를 증오했다.

이에 대해 이종우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내가 제일 강적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내가 그 자에게 국제태권도연맹까지 만들어줬는데, 어떻게 나를 그렇게 모략할 수 있는지. 최홍희는 태권도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다. 국제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맨날 돈 받고 단증이나 만들어주는 수준에 그친 것이다. 그 바람에 최홍희를 따르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다 떨어져 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종우는 최홍희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그는 후배인 이금홍와 연계해 김용채(강덕원 출신·공화당 국회의원)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엄운규와 함께 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종우는 1971년 김운용이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하자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당시 김운용은 이종우를 각별하게 예우하며 그를 통해 태권도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구상했다. 당시 국내 태권도 수련인구는 대략 130만명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 기술심의회 초대 의장이 된 이종우는 71년 7월, 태권도 지도방법과 개선책에 대한 좌담회를 열었다. 태권도 현대사의 한 부분을 들춰보는 의미에서 이날 간담회의 주요 내용을 보자.

▷이종우 = 현대 도장이나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태권도 지도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엄운규 = 현재의 지도방법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연 적응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문제지요.

▷홍정표 = 우선 사범 자신이 공부를 해야죠. 정신면이라는지 기술면에서 좀 더 세밀한 지도방법의 연구가 앞서야 한다고 봅니다.

▷현우영 = 지도자 자체가 학문적인 깊이와 수련을 쌓아야만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도방법에 있어서 과학적인 체계화를 이뤄야 하겠죠.

당시 그는 “협회가 생기고 나서 부회장을 한 번 하고 기술심의회 의장을 했다.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자리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양보했다. 자리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1972년 이 원로가 엮어서 펴낸 『태권도교본 품세편』(대한태권도협회 발행)은 그가 얼마나 태권도 기술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 원로는 이 책의 머리에서 “만 권의 책을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이 책에는 태권도 정의, 태권도의 발생과 형성, 태권도에 필요한 역학적 풀이, 예의규범, 지도상의 유의점, 수련과정표, 도복 띠 매는법과 접는법 등이 수록돼 있다. 부록으로 대한태권도협회 규약, 기술심의회 규정 및 대한태권도협회 위원 명단도 있다. 그가 예뻐했던 양진방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은 “1970년대 태권도 조직 구성과 기술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모두 이 원로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며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이종우는 국기원(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 건립 당시에는 건설본부장으로 활동했다. 국기원 건립에 얽힌 그의 술회담. <태권도신문 1998년 7월 인터뷰>

“당시 국기원 부지는 서울 한남동 삼거리 타워호텔 부근과 연세대 봉원사 부근, 그리고 강남 역삼공원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런데 내가 주장했던 타워호텔 부근은 리틀엔젤스가 땅을 확보한 상태라 제외됐다.”

국기원이 발행한 『국기 태권도 교본』제작하며 태권도 역사와 철학 등 이론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이종우는 73년 김운용을 보좌해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한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사무총장에 선임됐다. 

그 때부터 이종우는 대한태권도협회 집행부 임원에서 벗어나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서 태권도 세계화에 정진하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이종우와 호흡을 맞춰 왔던 엄운규는 72년 1월부터 76년 말까지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것은 결국 훗날 이종우와 엄운규가 태권도계 판세를 놓고 ‘라이벌 관계’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종우는 1977년 8월, 관(館) 통합을 위한 총본관의 부관장을 엄운규와 맡아 이병로, 강원식과 함께 관 통합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전무로 재직하며 관 통합에 앞장섰던 강원식은 평소 “(태권도 발전을 위한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종우씨가 많은 힘을 보태줬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 말, 관 통합과 관련한 강원식의 후일담.

“내가 관을 없애자고 할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이종우 관장이었다. 이종우 관장은 같은 연령인 다른 사람들(대표 엄운규)과는 달리 관이 없어져야 한다며 나에게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그 나머지 중앙 관장들은 수입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 관을 없애면 태권도의 위계질서가 파괴된다느니, 뿌리가 없는 나무가 어디 있느냐며 반발했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 부회장,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기술심의회 초대 의장, 1972년 태권도 기술통합 작업 주도하면서 「태권도 교본」 품새편 엮음,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초대 사무총장, 1976년 국기원 마크 제정에 기여, 1978년 행정 일원화 차원에서 관 통합 주도 등등….

1960∼70년대에 걸쳐 태권도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종우는 1980년 뜻밖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사회정화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 바람이 태권도계에 밀어닥쳤다.

당시 정부 당국은 태권도 제도권을 ‘비리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김운용을 비롯한 행정기관의 임원과 각 관(館)의 관장들의 사표를 강요했다. 서슬퍼렀던 군사정권 분위기에서 사표를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이종우, 엄운규 등도 사표를 내야만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종우의 후일담.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국보위에서 정화자 명단을 내라고 통보가 왔다. 그러자 김운용 회장이 고심했다. 그래서 나하고 의논해서 명단을 작성하고, 원로들도 다 퇴진하기로 결정했다. 무더기로 사람을 자르고 원로랍시고 눌러 앉아 있으면 말이 안 되니까 나도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 이기해는 육사 20기 출신을 교묘하게 이용해 세계태권도연맹 기조실장을 거쳐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직무대리를 꿰차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활동했다. 이종우는 이기해의 행각이 몹시 못마땅했다. 엄운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기해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황춘성(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사무국장)을 측면에서 ‘지원 사격’해 이기해의 허점을 잡아 징계위원회를 열고 제명해 버렸다. 김운용은 이규호 문교부장관에서 건의해 이종우와 엄운규 등 임원들을 복직시켰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김운용 총재로서는 이종우와 엄운규 등의 원로들은 자신을 뒷받침해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직시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그 후 엄운규는 20년간 대한태권도협회 상근부회장과 국기원 부원장,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태권도 제도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 청도관의 실질적인 수장(首長)으로서 존재감도 과시했다.


하지만 이종우는 달랐다. 

1980년대 말,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을 그만둔 후 제도권과 거리를 유지했다. 이승완(현재 대한태권도협회 상임고문)에게 지도관 관장을 물려준 뒤에는 소외감도 찾아왔다. 그래도 이종우는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자신이 한 일에는 자부심을 느꼈다.

“초대 사무총장으로 내정됐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 지 막막했다. 영어를 잘 못해 힘든 일도 많았다. 초창기에는 재정 기반도 열악해 고생을 많이 했다. 이 와중에도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이 때문에 어려운 고비에 여러 번 직면했다. 그때마다 나는 문제를 풀기 위한 제안을 했고, 그대로 실천해 세계연맹의 기틀을 다졌다.” <월드태권도誌 2000년 참조>

그렇게 1990년대가 흘러갔다.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권도에 대한 미련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외롭고 말벗이 필요할 때면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 자격으로 간혹 세계연맹을 방문, 이금홍(세계연맹 사무총장)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국내 제도권에서 재야 원로로 머물러 있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다.

1999년 8월, 그는 국기원 연수원 담당 부원장으로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세대교체 역행, 인사행정의 일관성 결여 등 비판이 제기됐다. 제도권에 복귀한 것과 관련, 이종우는 “김운용 원장의 요청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어쨌든 제도권은 이종우를 주목했다. ‘어떤 배경에 의해 복귀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귀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슈로 떠올랐다. 그는 주위의 이러한 시각을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종우는 ‘태권도 발전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며 배수진을 쳤다. 당시 그의 인터뷰 요지. <태권도신문 99년 8월 참조>

“앞으로 태권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이론 정립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 태권도의 무도 스포츠적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내가 부원장직을 수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연구소 설립이다.”

이종우는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임춘길을 교학처장, 이종관을 연구부장으로 각각 선임하고 태권도 연구기능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이 두 사람을 연수원 직원으로 채용한 것에 대해 국기원 내부에서는 반발이 심했지만 이종우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자신의 심중을 이해하고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2001년 11월 15일, 오후 12시 50분. 국기원 주위는 ‘태권도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태권도 재야 인사를 비롯해 수도권 태권도학과 교수와 학생 등 600여 명은 엄운규, 송봉섭, 임윤택의 퇴진을 요구하며 결의에 차 있었다. 당시 이종우는 ‘태권도 개혁’을 부르짖는 시위가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김운용에게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된다’고 진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평소 그의 말처럼 “2류가 판을 치고…뒷거래가 오고 가고…사욕을 버리지 못하고….” 우쭐댔던 사람들이 애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태권도 개혁파의 빗발치는 퇴진 촉구에 엄운규가 부원장 직책에서 물러났지만 이종우는 국기원 이사로 남아 있었다. 당시 태권도계의 최대 이슈는 김운용의 국기원장 복귀 여부였다. 이때 이종우는 ‘김운용의 국기원장 복귀는 순리’라고 설파했다. 이런 입장 때문에 범태련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이종우는 김운용의 국기원장 복귀를 반대하지 않았을까?

“김 총재는 국기원장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까지 수락을 하지 않았지만, 국기원장을 맡을 사람은 김 총재 밖에 없다고 본다. 김 총재가 잘못한 것은 있지만 태권도 발전을 위해 그가 계속 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태권도신문, 2002년 2월 25일자 인터뷰 참조>

이러한 이종우의 논리는 개혁파로부터 ‘기득권을 옹호하는 발언’이라며 공격을 받았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종우는 김운용의 공(功)과 과(過)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양반(김운용)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 태권도가 세계화될 수 없었다. 김운용씨의 과(過)는 간단하다. 그 사람이 지나치게 ‘나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열심히 뛴 것은 사실이지만, 태권도인들이 도와주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김운용씨는 떼거지로 달려드는 것을 겁내는 사람이다. 조직력이 강하다 싶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다가 그쪽 얘기만 듣고 문제가 많은 사람을 두둔하다가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 않은가.”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태권도 기술과 이론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이종우는 “심판 판정의 부조리가 계속 발생하면 결국 태권도의 힘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라며 판정 시비 해결책으로 전자호구 도입을 주장했다.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할 때부터 전자호구 개발에 남다른 의지를 보여 온 그는 시드니 올림픽이 끝난 후 김운용의 당부에 따라 전자호구 개발을 서둘렀다. 한동안 그의 집무실에는 전자호구 모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만큼 전자호구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했지만, 이 또한 그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과학의 ‘과’자도 모르는 나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전자호구를 개발했다. 그것을 채택하면 판정 시비는 대부분 사라질 텐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 불행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 시점에서 (태권도 경기 판정을)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 전자채점기를 도입해서 때리는 대로 점수를 주는 것이다. 그냥 스쳤다고 점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파워를 과학적으로 측정해서 처리하는 것이다.” <월간 신동아 2002년 4월호 참조>

이종우는 태권도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태권도 역사를 논할 때 빠짐없이 불거져 나오는 ‘가라테 유입설’에 대해 그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라며 태권도 발전 과정에서 가라테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성정(性情)이 직설적이었다. 좀처럼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런 기질이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2002년 월간 <신동아> 4월호에서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인정했다.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막는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다. 이제는 밝힐 때가 됐다.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품세를 만들고, 그 실무작업은 내가 했다. 지금은 우리(태권도)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다.”

당시 그는 기자에게 “1970년대 태권도 세계화 과정에서 태권도 역사에 대해 내세울 게 없어서 신라 화랑을 끌어다 붙였다”고 말할 정도로, 태권도 원로 중에서는 파격적인 말도 곧잘 했다. 다만 "무술의 기원의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무술도 문화의 범주에 놓고 봤을 때, 민족과 민족 간 또는 국가와 국가 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더욱 발전할 수도, 아니면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권도는 한민족 특유의 민족성이 유감없이 발휘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해석했다.




[글. 무카스미디어 객원 칼럼리스트 = 서성원 기자 | 태권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