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태권도인들은 1965년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박정희대통령은 1964년12월07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을 갖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서독에 방문했을때 '태권도사범 마이클안다손'이라는 사범이 도복을 입고 연도에서 박대통령을 환영한 것에 대해 박대통령은 감명을 받고 귀국했다. 그후 박대통령은 태권도사범 해외사절단을 지시했고, 구라파, 중동, 아프리카 등의 시범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정부의 관심속에 진행된 태권도세계화의 첫걸음이 된다. (사진 가운데가 마이클 안다손 사범). 태권도진흥재단 소장 자료.
그후 1965년 2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같은해 3월부터 아프리카 18개국을 순방할 태권도사절단을 의결한다. 당시 단장에는 최홍희 말레이시아 대사를 임명키로 결정한다.(동아일보, 1965.2.27). 이들은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를 순회하며 시범하게 된다.
그리고, 최홍희는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립한다. 이때부터 대한태권도협회와 갈등의 고리가 시작된다.
아래는 국제태권도연맹에 대한 네이버지식의 자료다.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 로즈 룸에서 9개국 협회 대표(월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서독, 미국, 터키, 이탈리아, 아랍공화국, 한국)가 참석한 가운데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설되었다. 이날 열린 ITF 발기인 총회는 임원진을 선출하고 앞으로 4개월 안으로 가맹 9개국 대표가 모이는 제1차 정기총회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이날 발기인 대회는 외국에 배당될 5인석의 이사선출을 보류하는 등 '국제성'을 강조하기도 했다(서울경제신문, 1966년 3월 22일자).
ITF는 당시 실력자였던 김종필을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최홍희가 총재를 맡았으며 이상희, 노병직, 조하리(말레이시아)를 부총재에 선출했다. 사무총장에 엄운규, 기술심사 회장과 차장에는 이종우, 백준기, 감사에 이남석, 홍종수, 정근식, 총무에 이계훈, 계획에 한차교, 재무에 이성우 등을 각각 선임했다. 1967년 10월 27일 ITF는 문교부 사회단체등록(제27호)을 필했고 이듬해인 1968년 11월 5일 민간친선외교단체 등록(제60호)을 마쳤다.
ITF는 대한태권도협회(KTA)의 동의 없이 명의를 도용하고 최홍희 자신이 말레이시아 대사로 재직하던 당시 친분이 있던 말레이시아 문교상인 '조하리'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인으로 집행부를 구성, 국제단체조직의 공익성을 저버린 사설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한태권도협회와 ITF 간의 싸움은 196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같은 사태를 간파한 대한체육회와 문교부는 체육단체 일원화를 위해 두 단체의 통합을 끊임없이 종용했으나 이들의 상반된 입장은 첨예하게 꼬인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8년 8월 28일 가맹단체인 ITF를 제명시키고, 협회 산하에 '국제위원회'를 신설, 모든 국제 업무와 해외에 산재해 있는 파견도장을 자체 내에서 관장키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두 단체가 해외도장을 둘러싼 관할권과 국제적인 업무를 놓고 대립양상을 보이자 대한체육회 민관식 회장은 업무관계가 뚜렷하지 않아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 대한태권도협회와 ITF 간의 업무한계를 규정했다.
대한체육회가 1968년 9월 3일 양 단체에 보낸 내용을 보면
△국제연맹은 국제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업무와 건전한 국제경기를 관장하고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 도장설립과 감독, 국내 대회관장 및 선수양성 등의 업무를 맡도록 했다.
따라서 ITF는 산하 도장을 갖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또 대한체육회는 1968년 9월 5일 양 단체 간의 분규가 노골화되자 직접 재조정에 나서기로 하고 대한체육회에서 4명, 대한태권도협회와 ITF에서 각각 2명 등 8명으로 구성된 수습위원회를 구성, 원만한 타협점을 모색키로 했다(대한일보, 1968년 9월 6일자).
1971년 8월에 소집된 전체회의에서 불만을 품은 최홍희가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남으로써 수습위원회는 2개월도 못 가서 해체되고 말았지만, 대한체육회의 노력으로 양 단체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는 대립양상을 해소하는 듯했으나, 해외사범 파견문제를 놓고 대한태권도협회와의 고질적인 분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더 악화되었다.
ITF는 1968년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홍콩에서 개최하였고 29개국이 참가하였고, 제2회 대회는 1971년 3월 말레이시아에서 개최하였다. ITF 본부는 1972년 최홍희의 캐나다 토론토 이주로 이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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