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자료 ▒

국내 최초의 권투대회와 김창엽

천하한량 2014. 8. 21. 01:47

우리나라에 권투가 소개된 것은 1912년 10월 7일 광무대 단성사의 주인이던 박승필이 유각권구락부 주최로 열린 흥행대회다.
이때만 하더라도 박승필이가 격투기를 좋아해 권투가 이런것이다 라는 소개정도였다. 체육보급을 위해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권투가 유입된 것은 1916년 미국 선교사 질레트가 권투글러브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1922년 YMCA에 의해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1924년 9월 그곳에서 정식으로 복싱부가 창설되었고, 1925년 YMCA체육부주최로 제9회 실내운동회에서 규격과 설비를 갖추고 정식경종목으로 채책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당시 언론에서는 1927년 9월 YMCA 권투부가 정식으로 생겨 30여명이 수련생이 있었다. 
1928년 6월에 YMCA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를 최초의 정식대회로 보고 있다.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다양했다.

 

위는 1928년 6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이 기록은 당시에 출전했던 선수들 명단이 나와 있다. 이석산이라는 인물은 1925년부터 권투사에서는 기록되고 있다. 역시 제1회 전국선수권에서도 YMCA소속으로 출전한다. 당시 보성고, 중동, 양정, 배제, 경성제1일고 등의 출전자들도 보인다.
이석산, 김정묵, 김덕은, 이동희, 이순용, 이명호, 홍윤식, 신대영, 이혜봉, 이윤발, 기석우, 오재일, 김준길 등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권투사 초기에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 당시 경기규칙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28년 6월 17일자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한편, 같은해 6월 24일자에는 당시의 입상자가 보도되었다.


 

제2회대회인 1929년에는 지방깡패에서 부터 어설프게 배운 건달들까지 다양했다. 특히 수표교를 무대로 주먹질을하던 사람도 몇 있었다고 전해진다.질레트가 처음 글러브를 가지고 들어왔을때만 해도, 글러브를 낀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룰도 없었다.이런 가운데 연습을 하다가 난투극이 생기기도 했고, 패싸움도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지역에서 주먹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제가 되었던 경기가 있다. 벤텀급경기에 오른 YMCA출신의 김충성과 수표교 깡패 두목 김창엽의 경기다. 김충성은 인천출신으로 유순한 성격이었고, 김창엽은 서울에서 악명높은 주먹쟁이로 알려졌다. 당시의 주심은 김영구. YMCA소속으로 김충성은 그의 제자였다. 결과는 김충성이 3회전 KO승이었다(기존 기록은 제1회대회 2회전 KO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 권투원로들의 구술에 의한 것이며 실제 당시의 기록은 다르다). 하지만 이 경기장에서는 깡패들과 관중들의 난투극으로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미들급에 안태경, 라이트급에 홍윤식, 패더급에 신대영, 플라이급에 이석산이었다. 이후 김창엽은 정식으로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복서가 되었다. 당시 김창엽과 김충성의 경기는 최대 하일라이트였다는것이 아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최초의 녹아웃으로 김창엽선수가 우승했다는 기사다.(1929.6.30. 동아일보)

 


 

1934년 극동올림픽 출전당시의 김창엽

 

정식으로 권투를 배워 일본인들이 두려운 상대로 여겼던 김창엽선수다. 젊은 시절 수표교를 주름잡았지만, 그는 YMCA에서 권투를 정식으로 시작해 1930년대 일본을 상대해 큰 활약을 한다. 특히 193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극동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며 최대 전성기를 누린다. 

해방이후 1947년에는 국제전의 심판활동을 했으며, 1955년 한비권투전(한국과 필리핀) 한국감독을 지냈다. 1961년에는 대한체육회 대의원을 역임하며 권투원로로서 활동을 하였다. 

1963년 7월 11일. 그는 왕년의 아마궈투계의 반탐급 챔피언과 사우드포 김창엽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향년 55세때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