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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暴이 점령한 심야 응급실… 의료진 94% "난동 목격했다"

천하한량 2012. 6. 4. 20:04

본지 사회부 기자 9명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사흘간 국립경찰병원, 국립중앙의료원 , 가천대 길병원 등 수도권 주요 병원에서 밤새 응급실 풍경을 취재했다. 주말 밤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멍들었던 주폭(酒暴)들의 '종착역'은 응급실이었다. 술 취한 사람들은 응급실에서도 소란을 부렸다. 주폭 난동에 응급실 의료진은 멱살 잡히는 일이 다반사였고, 다른 환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진료는 마비될 정도였다. 경찰병원 응급실 홍인영(32) 간호사는 "술 취해 난동 부리는 환자는 전혀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제일 두려운 존재"라며 "환자를 치료해야 할 응급실이 주폭들의 싸움판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는데, 주먹까지 휘두르는 장면을 보면 응급실이 주폭들의 앞마당이냐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 [조선일보]술 취해 얼굴 다친줄도 모른채 - 1일 새벽 1시 30분쯤, 술에 취해 넘어져 얼굴이 다친 것도 모른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이모(42)씨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부축을 받으며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로 들어가고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yaho@chosun.com

◇주취자 난동에 의료진과 환자는 '공포'에 시달린다

지난달 31일 밤 12시쯤부터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은 취객 하나 때문에 '전쟁터'가 됐다. 박모(48)씨는 3시간 가까이 의료진과 툭툭 밀며 몸싸움을 벌였다. 박씨는 처음에는 "팔다리가 안 움직인다"며 소리를 질러대다가, 진찰한 의사가 "별문제 없으니 가셔도 된다"고 하니 격분했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데 이상 있으면 어찌할 거야. 내가 멀쩡하다는 걸 증명하도록 각서를 써내라"며 의료진을 밀쳤다.

응급실에 누워 있던 50대 여성 환자는 몸을 떨다가 "저렇게 시끄럽고 술 냄새가 심한 환자는 빨리 쫓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간호사에게 조용히 불평을 터뜨렸다. 옆 침상에 누웠던 이모(44)씨는 박씨를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애써 딴 데로 돌렸다.

응급실 근무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응급환자들에게도 '응급실 주폭'은 공포의 대상이다. 본지 전화 설문조사에서 지난달 응급실 근무 의료진 110명 가운데 19명(17.3%)이 취한 환자로부터 폭행을 직접 당했다. 의료진 5명 중 1명이 지난달 폭행당한 경험이 있는 셈이다. 대한응급의학회가 2011년 841명의 응급의학과 전문의 중 3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한응급의학회 전문의 총조사'에서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폭언을 경험한 의사는 전체의 80.7%, 폭행을 당했다고 응답한 의사는 50%에 달했다.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는 의사도 39.1%에 이르렀다.

지난달 5일 여성 환자 한모(42)씨는 국립경찰병원 응급실에서 혈액 검사를 위해 피를 뽑자 "이 흡혈귀야. 내 피를 왜 빨아 먹느냐"며 난동을 부렸다. 한씨는 혈액을 뽑던 간호사의 팔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비틀더니 주삿바늘을 뽑아 던졌다. 이후 그는 "흡혈귀가 내 피를 빤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병원 직원은 "술 취한 환자가 넘쳐나는 응급실이 정신병원 병실보다 더 두려운 곳"이라고 했다.

"술에 취해 칼 맞고 피 흘리며 들어오는 '양아치'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가천대 길병원 전문의 김모(30)씨는 지난달 중순에 패싸움을 벌인 3~4명이 응급실에 들어온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들은 봉합 수술을 받은 뒤 치료비가 비싸다며 응급실에서 소리를 치고 의료진 멱살을 잡으며 난동을 부렸다. 올 1월 초에는 취기가 돈 조폭이 응급실 침대에 눕기도 했다. 양복을 입고 온 조폭은 수행원 한 명을 거느리고 응급실에 들어왔다.

◇응급실 주폭, 다른 환자 생명까지 위협

일선 응급실 의사들은 취객들이 시급한 환자 진료에 방해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했다. 강북삼성병원 관계자는 "특히 밤 9~10시부터 들어오는 환자 대부분은 술에 취해 다치거나 소란을 피우다 들어온 환자"라며 "도심에 있는 병원일수록 술 취한 환자가 넘쳐 다른 환자를 볼 여력이 없다"고 했다.

여성 환자 박모(50)씨는 지난달 31일 오후 4시부터 경찰병원 응급실 바닥에 구토하고, 울면서 소리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박씨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11시간 넘게 의사·간호사들이 박씨에 매달렸다. 잔뜩 취한 상태로 부부싸움을 한 박씨는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오른손 손가락이 4~5㎝ 정도 베여 응급실로 들어왔다. 박씨가 소란을 피우는 동안 다른 환자들이 줄줄이 응급실에 실려왔다. 손가락을 다친 5세 여자 어린이, 얼굴에 화상을 입은 20대 남자, 발에 붕대를 감은 경찰, 복통을 호소하는 60대 남성 등이었다.

길병원 전공의 장모(30)씨는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30대 만취 남자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찾겠다며 응급실 병실에 난입한 경우도 있었다"며 "자칫 위험한 순간을 가까스로 넘긴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천자토론] 술에 너그러운 대한민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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