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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나이 ‘오십청춘’… 진짜 인생의 출발점

천하한량 2011. 4. 25. 16:02

홀거 라이너스 지음 / 김용현 옮김 | 한스미디어 刊 | 287쪽 | 1만원
삶의 무게에 축쳐진 어깨를 펴라 50代, 이제 남은 3분의 1 인생
더 늦기전에 즐겨라 지금 아니면 언제 즐길 것인가



TV를 보다 또래 사내가 나오면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아내에게 묻곤 했다. “나도 저 사람 만큼이나 늙어 보여?” 아내는 “저 정도는 아니다”고 얼버무렸다. 이런 문답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아내의 대꾸가 다분히 위로성이라는 것, 내 얼굴도 적어도 나이 만큼은 삭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제 그런 우문(愚問)은 하지 않는다. 나이 쉰이 되자 그리 됐다.

나 이 들어가는 과정은 점진적이지도 순하지도 않다. 우스꽝스러워진 제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있는데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눈꼬리는 처지고 안구 흰자위는 탁해졌다. 온 얼굴에 세월과 피곤의 더께가 앉았다. 미어지고 비어져나온 살들은 또 어떤가. 황지우의 시처럼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쉰부터는 거울 보기가 싫다. 시인 강태기도 “가끔 화장실 거울을 보며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했다. 그는 쉰 넘긴 사람을 보면 참 지겹게도 오래 산다고 경멸하던 때가 있었는데 정작 그도 이냥저냥 살다보니 쉰줄에 들더라고 했다.

50대의 삶은 불안하고 허망하다. 한순간도 느긋하지 못하다. 좀스런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 옛 선비는 돈을 손으로 만지지 않고(手不執錢) 쌀값도 묻지 않는 것(不問米價)을 미덕으로 여겼다. 기녀에게 화대를 줄 때도 접시에 동전을 얹은 다음 젓가락으로 집어줬다. 돈에 초연하라는 얘기다. 선비는 고사하고 현대의 50대는 이리저리 헛된 셈을 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아이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늙어서 먹고살려면 얼마가 드나, 그런데 얼마를 더 벌 수 있나. 아무리 맞춰봐도 어긋나는 대차대조표를 머리 속에 썼다 지웠다 한다. 그냥 살아볼 밖에.

잡지사에 취직한 김동인이 중절모를 쓴 채 책상에 앉아 일했다. 보다 못한 사장이 “김선생, 사무실에서는 모자를 벗으시지요” 한마디 했다. 김동인은 벌떡 일어나 나가더니 종내 무소식이었다. 밥벌이에 목을 매는 쉰 살 들에게 김동인의 일화는 일화일 뿐이다. 곤고(困苦)한 불모의 시대에 감정은 무뎌 가고 욕망은 소진돼 간다. 모든 게 심드렁하고 시큰둥하다.

활력 넘치고 완숙한 50대를 구가하는 이도 많을 텐데 너무 처량한 넋두리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독일 건축가이자 작가 홀거 라이너스가 쓴 ‘남자 나이 50’은 그렇게 어깨 처진 남자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동년배 50대 남자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평가한 뒤 자신에 관한 성찰을 썼다고 했다. 그는 흔히 ‘중년’과 ‘위기’를 한 쌍으로 간주하지만 이 비참한 짝짓기는 50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암울한 환상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저자는 인생의 3분의 2는 결정됐고 3분의 1을 남긴 쉰 살이 인생 최고의 시기라고 강조한다. 밑천은 누구나 쥐고 있는 두 장의 ‘히든 카드’, ‘창창한 미래’와 ‘과거 경험’이다. 그는 가족·정치·종교·죽음·섹스부터 집·자동차·몸치장에 이르는 20여 항목에서 시종 스스로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라고 이른다.

이 책은 어쩌다 쉰 고개를 넘어선 이들이 삶의 여러 측면을 두루 점검하고 추스를 기회가 될 만하다. 이를테면 ‘인생 체크 리스트’ 격이다. 너무 건전해서 교훈집 같다는 건 단점이다.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칠 에피소드가 적어서 읽는 재미가 덜한 것도 아쉽다. 저자는 인생에 대한 여러 물음에 답을 피하거나 훗날로 미루는 50대가 많다며 ‘지금 아니면 언제?’, 이른바 ‘It’s now or never’를 명심하라고 한다. 자신과의 단절이나 불화부터 해소하는 것이 ‘젊은 50, 진짜 인생’의 출발점이겠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