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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쓰신 글의 종류

천하한량 2010. 3. 11. 19:22



저서로는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의 수필집과 류시화 시인이 엮은 <산에는 꽃이 피네>가 있고, 역서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숫타니파나>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法句經)> 등이 있다.

 

1 무소유

24 세상만사 뿌린대로 거둔다

2 산에서 살아 보면

25 다산 정약용의 근검정신을 되새기며

3 화개동에서 햇차를 맛보다

26 과거에만 얽매일 것인가

4 섬진 윗마을의 매화

27 선진국문턱은 낮지 않다

5 보왕삼매론

28 침묵과 무소유의 달

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

29 덜 쓰고 덜 버립시다

7 책 속에 길이 있다

30 죽이지 말자 죽게 하지도 말자

8 여백의 아름다움

31 산천이 통곡한다

9 오리이야기

32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

10 시은을 두려워 하라

33 보살핌 안에 구원이 있다

11 한덩이 붉은 해가 ...

34 식성이 변하네

12 믿고 따를 수 있게 하라

35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13 맑은 물을 위해 숲을 가꾸자

36 따뜻한 가슴으로

14 종교와 국가권력

37 급할수록 순리대로

15 야생동물이 사라져 간다

38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16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39 전 지구적인 재난이 두렵다

17 대통령 지망생들에게

40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다

18 명상으로 일어서기

41 텅 빈 충만

19 언론과 정치에 바란다

42 잊을 수 없는 사람

20 가을 들녘에서

43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21 가난의 德을 익히자

44 쥐이야기

22 두려워하지 말자

45 빛과 거울

23 일자리 잃으면 일거리를 찾자

46 법정스님 청와대 비서관들에 法講

47흐르는 물처럼 새롭게

48물흐르고 꽃피어난다.

49 있는 그대로가 좋다

50 한 생각 돌이키니

51 나무 종이보살

52 무 말랭이를 말리며

53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다

54 두타행(頭陀行)




法頂(법법,정수리정)스님은 1930년경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와 전남대 상과대학을 나오셨다.

1954년 당대의 큰 스승이었던 `효봉`선사의 문하에 입산 출가를 한 후에 한글대장경 역경위원,동국대 역경원,불교신문사 주필,전남 송광사 수련원장등을 역임했으나 70년대 후반 그 모든 것을 떨치고 송광사 뒷산에 손수`불일암`을 지어 홀로 살으셨다.

그러나 스님의 명성을 듣고 경향각처에서 찾아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수상집`버리고 떠나기`를 남기고 훌쩍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거처를 숨기며 오늘에 이른다.

학생들의 국정교과서에 스님의 수필집`무소유`가 천주교 `혜인`수녀님과 함께 교재로 채택이 되어 실린 것은 세간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자된 이야기이다.

`수행자로서의 밥값을 하기위해`라는 말씀과 함께, 한때 서울 성북동의 음식점으로 유명한 `대원각`이라는 고깃집을 청정도량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길상사`라는 터를 마련하여 회주로 있으시면서 가끔싞 강원도 산에서 내려 오시기도 했다.

(참고로 `길상사`절의 개원법회 때에 한국 카톨릭계의 수장인 `김수환`추기경이 종교의 벽을 넘어 `맑음과 평안의 향기가 솟는 샘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축하 메세지를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밭은 이야기 또한 유명하다.)

아직도 심신이 정정하시다고 들었으며,특히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신 것 처럼 그의 교법정신과 무소유 개념은 영구히 살아 남을 것이다.

 

*(잊을수가 없는)생애->한반도 최남단 해남의 어느 땅끝동네에서 어느날 홀연히 책3권을 가지고 출가.

*업적->중국 당나라때 역경인`현장`이 있다면,지금 우리나라에 `법정`스님이 역경에 조력함이 있다.

*교훈->`무소유` 개념

*배울점->소박한 살림살이를 가지고 자연속에 삶,불성을 가진 모든 사물(자성본불)의 박애,자비정신.

 

*(수많은)저서->영혼의 모음 / 무소유 / 서 있는 사람들 / 산방한담 / 말과 침묵 / 물소리 바람소리 / 텅 빈 충만 / 불타 석가모니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인도기행 / 숫타니파타 / 버리고 떠나기 /

오두막 편지 / 산에는 꽃이 피네 / 인연 이야기 /  홀로 사는 즐거움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봄 여름 가을 겨울------->옛날에는 `샘터사`에서 근래는`이레`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음.

 

*역서->선가귀감 / 숫타니파아타 / 진리의 말씀[법구경] / 화엄경 / 불타 석가모니 / 비유와 인연설화 등..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1971년의 글 '무소유'에서 법정스님은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고 썼다.

스님은 2008년 11월 길상사 소식지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스님은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자신의 말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로 이생의 삶을 마쳤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길상사
11일 열반에 든 법 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는 이날 그의 원적(圓寂)을 공식적으로 고지하며 그의 유지를 공개했다.

길상사에 따르면 법정은 이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스님 저서에서 약속하신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길상사는 "그 동안 풀어 논 말빚 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하여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고 전했다. 법정은 '무소유', '일기일회' 등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법정은 또 "평소에 말한 바와 같이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13일 오전 11시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다비할 예정이다.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길상사는 이날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 주시고,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시던 법정스님께서 불기 2554년(서기 2010년) 3월11일 오후 1시 51분,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원적(서거를 뜻하는 불교용어)하셨다"고 공식 공지했다.

"스님(속명 박재철 朴在喆)은 1932년10월8일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하셨고, 근대 고승 중 한 분인 효봉스님을 은사로 1954년 출가하셨으며,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셨고,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고 연혁을 밝혔다.



길상사·송광사는 어떤 곳?


법 정스님이 오늘 입적한 곳은 길상사이고요, 13일 다비식이 열리는 곳은 송광사입니다.

어떤 사찰인지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길상사]

서울 성북구에 있는 길상사는 산문집 '무소유' 로 잘 알려진 법정스님이 1997년 12월 창건해 2003년까지 법회를 주관하는 '회주'를 맡아왔던 곳입니다.

법정스님은 이 사찰에서 1년에 몇 차례씩 대중법문을 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길상사는 한때 밀실 정치의 현장이었던 요정 '대원각'이 그 전신입니다.

법정스님의 산문집 '무소유'로 인해 길상사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대원각의 소유주가 법정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겠다며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송광사]

다비식이 열릴 송광사는 전남 순천 송광면에 있는 사찰입니다.

우리나라 3대 사찰이며, 순천 2대 사찰입니다.

송광사의 원래 이름도 '길상'이었다고 하는데요, 7세기 혜린 스님이 지은 절입니다.

법정스님은 지난 1975년 10월부터 17년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면서 1976년 바로 이곳에서 무소유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송광사 관계자는 신도와 비신도 누구든지 참석해 다비식을 지켜볼 수 있다며 특별하게 행사를 치르지 말라는 법정의 평소 가르침에 따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입은 그대로 다비, 사리도 찾지 말라”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2005년 4월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법회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법문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무소유 정신과 삶'을 상징하는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산문집 < 무소유 > 에서 이렇게 밝혔다. 스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은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보니 불행해진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또 소유에 대한 집착은 지구환경을 망가뜨리고, 인간의 가치마저 떨어뜨려 '모든 존재가 도구화'되는 현대의 병폐를 낳는다고 말했다.

스님의 '조금 아쉬운 듯 가지는' 무소유의 철학은 '단순하고 간소한 삶' '절제의 미덕에 기반을 둔 검소한 생활습관'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갖고 결국 조화로운 삶을 꾸리게 한다. 스님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삶"이라며 "우리의 삶마저도 '소유'가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의 '있음'이기에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라'"고 설파했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은 스스로의 말과 글처럼 일생을 청빈한 무소유,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살았다.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이유다.

불일암과 강원도 산골짝 화전민이 남긴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며 수도해온 스님의 삶은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고, 더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우리 모두에게 매서운 죽비 그 자체였다. 현란한 말이 넘치는 세상에서 스님의 가난한 삶은 종교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라는 감로수였다.

스님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진리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출가에 대해선 "나답게 살기 위해, 내 식대로 살기 위해,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 추구로 집을 떠났다"며 "소설 < 광장 > 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내 의지로써 내 삶을 재구성하려 했다"고 말했다.

쌍계사·해인사·송광사 등의 강원·선원에서 수행을 한 스님은 탄탄한 경전 공부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동국역경원 역경위원·불교신문사 주필·송광사 수련원장·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의 소임을 맡았다. 서울 봉은사에 주석하던 75년에는 군사 독재정권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에 충격을 받고 전남 순천 송광사로 내려간다. 그리고 송광사 뒤편에 불일암을 짓고, '이 시대 삶의 교과서'라 불리는 < 무소유 > 를 펴냈다. 잇단 저서들이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자주 찾아들자 스님은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문명의 이기가 없는 강원도 산골오지로 떠나 홀로 수행자로서의 삶을 꾸린다.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청정한 글은 수행과 깨달음의 결과물이었다. 스님에게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 방편이자, 석가모니 부처의 사상을 살아있는 언어로 전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펴낸 < 무소유 > 와 산문선집 < 맑고 향기롭게 > , <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 산에는 꽃이 피네 > , 법문집 < 일기일회 >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등 20여권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치열한 경쟁과 팍팍한 일상생활에 찌든 현대인들은 정신적 휴식에 목말라했고, 스님의 글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법정 스님은 세상나들이 때마다 마음과 세상,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뜻을 강조했고, 시민운동단체인 '맑고향기롭게'가 결성됐다. 김영한 여사로부터는 요정으로 유명했던 '대원각'을 시주받아 97년 길상사로 개산을 했다. 스님은 길상사에서 정기적으로 대중법회를 가졌고, 종교간 화합에도 관심을 둬 명동성당 등에서도 강연했다.

'다비준비위원회' 측은 이날 "스님께서는 번거롭고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말라"며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평소 승복을 입은 그대로 다비하고, 사리도 찾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또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간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셨다"고 덧붙였다.

법정 스님은 떠났지만 가장 본질적인 삶을 살며, 수행의 결정체로 남긴 맑고 향기로운 법문과 글은 영원할 것이다. 스님의 말처럼 글은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자, 누구나 글을 통해 자신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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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적한 법정스님의 삶
"종교계 담장 허무는데 앞장
글·정기 법문 통해 시대모순 지적하며 대중과 소통"


11일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은 탁월한 글솜씨와 깊고 넓은 성찰에 바탕한 사유를 담은 글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수행자였다. 1993년 열반에 든 성철 스님이 치열한 선 수행의 정신으로 산문을 지키면서 불교 신자는 물론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면 법정 스님은 글을 통해 대중을 만나고 소통했다. 그래서 수많은 팬을 거느린 '스타 스님'이었지만 평생 수행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스스로 실천했다.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던 게 그의 이런 면모를 짐작케 한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직면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섰다.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이던 효봉 스님(1888~1966년,조계종 초대 종정)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은 그는 다음 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59년 양산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공부했으며 《불교사전》 편찬,불경 번역에도 참여하며 4 · 19와 5 · 16을 겪었다.

또 함석헌 · 장준하 ·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 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을 계기로 다시 걸망을 짊어졌다.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내려간 그는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17년간의 불일암 생활을 정리하고 1992년부터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왔다.

주로 책을 통해 대중을 만나오던 법정 스님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김영한 할머니(법명 길상화 · 1999년 별세)로부터 기부받으면서였다. 스님은 이듬해 12월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회주를 맡았고 1년에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법문을 들려줬다. 2003년 말 길상사 회주를 내놓은 뒤에도 정기법문을 계속하면서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고 대중들을 위로했다.

특히 숱한 베스트셀러를 양산하며 '무소유'의 사상을 전파한 것은 법정 스님의 최대 공적이다. 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라고 설파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그의 이런 생각과 가르침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스님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5년) 《오두막 편지》(1996년)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소욕지족(少慾知足 ·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것)'하며 살 것을 강조했다. 또 2008년 11월에 내놓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선 삶의 마지막 길에 선 마음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2007년 이래 건강이 나빠진 법정 스님은 폐암을 앓는 중에도 지난해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 등을 내놓으며 대중들에게 '맑고 향기로움'을 선사했다.

법정 스님의 평소 뜻에 따라 별도의 장례행사는 치르지 않고 오는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키로 했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불..."

12일 오전 11시 22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행지실 앞. 행지실 쪽에서 목탁 소리와 요령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합장한 채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는 신자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듯 행지실 주변의 대나무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두 번 거세게 불었다.

4분 후 위패와 영정을 든 스님들이 차례로 행지실 밖으로 나오고 뒤이어 법정스님의 법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자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시민ㆍ불자들의 염불 소리에는 울음소리가 섞여들었다.

법정스님이 이날 대중에게 보여준 마지막 육신의 모습은 스님이 평소에 말했던 '무소유' 그 자체였다.

'강원도 오두막에서 평소에 사용하던 대나무 평상에 올려서 화장하라'던 스님의 평소 뜻을 받들어 다비준비위원회는 강원도 오두막에서 평상을 가져오려 했지만, 눈이 내려 접근이 불가능해지자 똑같은 모양의 평상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누우면 꼭 맞는 좁은 평상 위에 모셔진 법정스님의 법구는 갈색 가사 한 장으로 온몸을 감싼 모습이었다. 근사한 관도, 꽃 장식도 없었다.

매서운 봄바람 속에 입던 승복 그대로 가사 한 장을 덮은 법정스님의 마지막 모습에 여성 신도들은 "스님 추우시겠다"고 안타까워하며 흐느꼈다.

성북동 골짜기 길상사에 이날 모인 인원은 8천여 명.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스님의 법구가 극락전을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시민이 속출했고,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나무아미타불" 소리는 점점 커졌다.

법정스님의 법구를 멘 스님 10명이 극락전 앞에서 무릎을 세 번 구부렸다 펴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것을 끝으로, 법정스님의 법구는 곧바로 영구차에 모셔졌다.

많은 시민이 법구가 모셔진 영구차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영구차는 곧바로 길상사 산문을 통과했고, 신도들과 인사를 나누는 듯 잠깐 멈춰 섰다가 이날 낮 12시께 곧바로 송광사로 향했다. 신도들은 줄지어 큰길까지 영구차를 뒤따랐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송광사에서도 13일 조촐한 다비를 치를 예정이다. 다비식에서는 큰스님들의 장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만장도 사용하지 않는다. 법정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절 길상사를 나서던 모습 그대로 불 속에 몸을 맡기게 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