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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바의 백인 엄마는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 NY 타임스

천하한량 2008. 3. 15. 16:24
스탠리 앤 던햄 소에토로. 아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됐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흑인 최초의 대통령을 꿈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백인 어머니를 뉴욕 타임스가 장문의 기사로 집중 소개해 관심이 일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4일(현지시간) 오바마 의원이 유세 중 자신의 어머니를 ‘싱글 맘(홀로 자녀를 키운 엄마)’으로 소개했지만 막상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캔자스 출신의 백인 여성으로 케냐 유학생과 결혼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타임스는 오늘의 오바마를 일군 것은 세계인으로서의 열린 시각과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어머니의 덕이라면서 그를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라고 묘사했다.
▲ 뉴시스
오바마 어머니의 처녀 시절 이름은 스탠리 앤 던햄이다. 소에토로는 나중에 재혼한 인도네시아인 남편의 성이다.

그가 스탠리라는 남자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들을 바랬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2차대전 기간 중 캔사스 엘도라도 출신의 아버지와 오거스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탠리는 캘리포니아와 캔자스, 텍사스, 워싱턴을 거쳐 60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하와이 대학에 갓 입학한 그는 러시아 수업 시간에 케냐에서 온 오바마의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시절만 해도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의 부모는 당황했지만 결국 허락했다. 수년 전 오바마의 할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딸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것이 그 때는 불안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듬해 오바마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오바마의 아버지가 하버드대에 진학한다면서 떠났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하와이에서 만난 롤로 소에토로라는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했다. 1966년 수하르토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소에토로가 귀국할 때 오바마 모자도 따라갔다.

스탠리의 어린 시절 친구인 수자 블레이크는 “스탠리가 아주 똑똑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짧은 머리의 백인 남자 아이들과는 한번도 데이트한 적이 없다”면서 “그는 꼬마 때부터 세상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다. 같은 인종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포옹했다”고 술회했다.

스탠리는 어린 오바마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새벽 4시부터 깨워서 공부를 시킬 정도였다.

딸 마야를 낳았지만 두 번째 결혼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 했고 남편은 아이를 더 낳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가까운 친구였던 니나 나야르는 “스탠리는 하나의 제도로서의 결혼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74년 말 스탠리는 오바마와 9살 어린 동생 마야를 데리고 호놀룰루로 돌아갔다. 오바마는 비싼 사립학교에 진학했지만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스탠리는 3년 후 인도네시아에 일자리가 생겨 돌아갔지만 오바마는 공부를 위해 남기로 했다.

마야는 “오빠를 남겨둔 것이 엄마로선 가장 힘든 결정이었다.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며 뜨거운 아들 사랑을 돌이켰다.

스탠리의 친구인 조지아 맥컬리는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스탠리는 항상 아들을 그리워 했다”고 말했다. 두 모자는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여름방학과 크리스마스 때는 오바마가 인도네시아로 왔다.

스탠리는 자바의 포드재단에서 일하며 빈민들을 돕는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국제개발재단의 컨설턴트로도 활동했다. 스탠리는 아들에게 정직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독립적인 판단을 하라고 가르치곤 했다.

문화인류학자가 된 마야는 “그 시절 엄마와 철학과 정치, 독서에 관한 폭넓은 주제로 많은 대화를 했다. 엄마는 독선을 싫어 했고 내게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게 해 줬다”고 말했다.

난소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스탠리는 생의 마지막 몇 달을 그의 사랑이 싹튼 하와이에서 보냈다. 오바마의 외할머니도 그 곳에 있었다.

스탠리는 아들이 공직 선거 캠페인을 시작한 1995년 11월 숨졌다. 오바마는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내 생애 최대의 실수”라며 지금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장례를 치른 후 오바마와 동생 마야는 오하우의 남쪽 해변으로 가서 한 줌 재로 변한 유해를 태평양 앞바다에 뿌렸다. 엄마가 여생을 보냈던 인도네시아까지 흘러갈 것이라고 믿으면서.

노창현특파원 robi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