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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표'를 아십니까?

천하한량 2007. 11. 13. 20:26
▲ 어릴 때, 기차를 타고 차창 밖 풍경을 보는 재미는 매우 남달랐지요. 철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풍경이 멋스러웠어요.
ⓒ2007 손현희
초등학교 때, 두어 달에 한 번쯤은 기차를 탔지요. 고모님 댁이 경북 상주시 청리면이라서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거의 거기에 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어릴 때 살던 김천에서 청리역까지는 아천, 두원, 옥산, 세 군데 역을 지나야 하지요.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기차를 타고 차창 밖 풍경을 보는 재미는 어린 눈으로 봐도 퍽 신나고 아름다웠어요.

철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자연이 아름다웠어요. 경북선을 타고 지나갈 때면 언제나 부지런히 땀 흘리며 일하는 농사꾼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봄철이면 여러 사람이 줄지어 서서 모심기를 하거나 논둑에 앉아 새참을 먹는 모습도 참 정겨웠지요. 여름이면, 냇물에서 발가벗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가을엔 들판을 가득 메운 누런 곡식들을 보며 마음이 저절로 넉넉해지고요. 겨울엔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빈 들판을 보면서, 쓸쓸해졌지만 나름대로 멋스런 풍경을 보는 재미가 매우 남달랐어요. 아마 어릴 때부터 내가 시를 즐겨 쓴 것도 철 따라 빛깔이 다른 차창 밖 구경하는 재미도 한 몫을 했을 거예요.

▲ 어릴 때, 두어 달에 한 번쯤은 기차를 타고 청리역에 꼭 갔지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어요. 사진은 지난해 갔을 때 찍은 겁니다.
ⓒ2007 손현희
기차를 타고 갈 때 냇물이 흐르는 철다리에 들어서면, 그 소리도 퍽 재미있었지요. 툭구다닥…. 투구다닥…. 하면서 재미난 소리를 내면, 나도 따라 흉내를 내기도 했어요. 소리뿐 아니라, 시커먼 굴속을 지날 때엔 갑자기 캄캄해진 기차 안에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빨리 벗어나기를 기다리기도 했고요. 어쩌면 고모님 댁에 가는 설렘보다도 갖가지 구경거리가 많은 기차 타는 일이 더욱 즐거웠는지도 모르겠어요.

신기하기만 했던 기관사 아저씨의 묘기

▲ 철길에 가까이 다가가니,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났어요.
ⓒ2007 손현희
그런데 한 가지, 기차를 탈 때마다 봤던 아주 신기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역마다 기차가 멈출 때쯤이면, 기관사 아저씨가 기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둥글게 생긴 무언가를 휙~하고 바깥 기둥에 정확하게 걸어두고, 다시 똑같이 생긴 물건을 낚아채듯이 되가져 가는 모습인데요.

그 몸짓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역에 닿을 때마다 그걸 보려고 나도 덩달아 차창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기다리곤 했어요. 그 둥근 고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그렇게 기둥에 걸어두고 또 다른 고리를 가져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번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똑바로 던지는 걸 보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어요.

▲ 탑리역, 이름난 탑이 많아 탑리역! 마을 이름을 본떠 만든 기차역이 매우 남달라요. 멋지죠?
ⓒ2007 손현희
지난 5월 27일 경북 의성에 자전거 나들이를 갔을 때, 역 모양이 하도 남달라 보여서 들어갔던 '탑리역'에 들렀을 때 일이에요. 작은 시골마을 기차역인데, 바깥에서 보면 마치 자그마한 성처럼 보여요. 마을 이름처럼 탑 모양을 본떠 만들었나 봐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이런 멋진 역을 본 적이 없어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지요.

역 안 맞이방(지난날에는 대합실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기차역마다 모두 '맞이방'이라고 하네요. 이 말도 퍽 살갑지요?)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 청리역에서 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때에 견주면 훨씬 더 깔끔해요. 그렇지만,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런 모습은 오간 데 없어요. 저마다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기차표를 사려고 줄지어 선 사람도 없고, 어쩌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두 사람이 와서 표를 끊거나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뿐이에요.

▲ 지난날, 기차역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지요. 시끌벅적하던 풍경은 다 어디로 가고...
ⓒ2007 손현희
▲ 기차에서 내려 보따리를 들고 오는 아저씨가 퍽 정겨웠어요. 지난날에는 이런 풍경이 매우 흔했지요.
ⓒ2007 손현희
마침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서 플랫폼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맘씨 좋게 생긴 역무원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매우 반가운 듯 사무실로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기차역에서 일하는 분과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먼저 아는 체하며 부르니 퍽 고마웠어요. 의성에 우리 문화재가 많다고 해서 이틀 동안 자전거로 나들이를 한다고 얘기하니 매우 놀라워하세요.

우리가 갔을 때는 두 분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김철, 김영모 열차운용원이에요. 요즘은 기차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지난날에 하나하나 사람 손을 거쳐 하던 일을 거의 기계가 하고 있대요. 그러다 보니, 모두 여섯 사람이 둘씩 짝을 지어 삼교대로 일을 한다고 해요.

이참에 잘됐다!... 드디어 궁금증을 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매우 궁금했던 걸 아저씨한테 여쭈었어요. 기관사 아저씨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묘기(?)를 부리던 그게 무언지 물었더니, '젊은 사람이 어찌 그런 걸 다 아느냐'고 하시며 자세하게 알려주었어요.

그건 바로 '통표'라고 하는 건데, 쉽게 말하면 '운전 허가증'과 마찬가지래요. 그러니까 기관사가 어느 역에 가더라도 그 통표를 돌려주고 새로 가져가지 않으면 열차를 움직일 수 없다고 해요.

▲ 탑리역 열차운용원 김철 씨, 퍽 자상하고 따듯한 분이세요. 요즘은 기차역에서 사람구경 하기가 쉽지 않다고 우리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셨지요.
ⓒ2007 손현희
"요즘도 그게 있어야만 하나요?"

"아니요.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1987년 때쯤 없어졌으니까 벌써 꽤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도 다 있네요. 하하하(웃음) 요즘은 모두 기계가 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요."

"그때엔 그 거 없으면 간첩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혹시 그걸 떨어뜨리면 어떻게 하나요? 어렸을 땐 한 번도 떨어뜨리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어요."

"만약에 떨어뜨리면 열차가 갈 수가 없지요. 내려서 다시 주워 들고 가야 합니다."

"아, 그럼 옛날에 봤던 그 통표가 지금도 있나요? 있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저씨는 안 쓴 지 하도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는데 한 번 찾아보겠다고 하시며 어디론가 가셨다가 다시 오셨어요.

"아이고, 이거 속 알맹이는 어디로 가고 없고, 통표를 넣어 뒀던 껍데기만 하나 있네요"하시면서 건네주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였지만 오랫동안 손때가 묻은 물건이라 참 정겨웠어요. 지난날 차창 밖으로 멀리서 보기만 했던 그 물건이 눈앞에 있는 걸 보니 가슴마저 뭉클했지요.

▲ '통표'를 아세요? 이게 바로 기관사 아저씨가 무척 신기한 묘기를 부리던 그 물건이에요. '운전 허가증'
ⓒ2007 손현희
"기계에 밀려 일손이 줄어들어 안타까워요"

 
▲ 어쩌면 고모님 댁에 가는 설렘보다도 갖가지 구경거리가 많은 기차 타는 일이 더욱 즐거웠는지도 모르겠어요.
ⓒ2007 손현희
"요즘은 옛날처럼 개찰구에 서서 하는 표 검사도 없어진 지 오래되었답니다."

"참 아쉽네요. 기계가 대신하니까 몸은 편하겠지만 지난날에 봤던 그런 기차역 풍경이 사라지는 건 왠지 씁쓸하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사진 찍는다고 플랫폼으로 갈 때 아무런 차례를 밟지 않고도 불쑥 들어올 수 있었던 게 기억났어요. 옛날에는 기차를 타지 않고 배웅만 해도 먼저 표를 끊어서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말이에요.

"그렇지요. 저희도 사실은 그때에 비하면 하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방 철도청에서 나누어서 맡아 하던 일을 서울 '구로통제관제실'에서 모두 합니다. 전국에 있는 철길을 한눈에 보면서 관리하고 있지요. 그리고 기차 타는 손님이 줄어드니까, 자연히 수익도 줄고 또 그러다 보니, 일손도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이제는 무인역도 많고요. 시골 간이역은 차츰 문 닫는 곳이 늘어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면 무엇이든 편해지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에요."

안타까운 낯빛으로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척 애틋하기까지 했어요.

"요즘 하루 동안 손님이 많아야 20명쯤 되어요. 저도 33년 동안, 이 일을 해 왔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답니다. 그땐 바쁘기는 했어도 기차역에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많이 모였고, 거의 아는 사람이라서 집안 사정까지도 서로 알고 지냈지요. 그땐 속 깊은 정도 많았지요.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이 속정이 매우 깊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이 안에 온종일 있으면 사람구경 하기도 쉽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역에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갑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탑리역에서 만난 두 분, 김철·김영모 열차운용원 아저씨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느낀 게 많아요.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고, 무엇이든 좋아지고 있지만, 어렸을 때 보고 자랐던 아름다운 풍경과 기억들은 이제 참말로 옛 기억 속에서만 간직하게 되었지 싶어요.

모든 게 빨라지고 돈만 있으면 마음먹은 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아름다운 모습들이 차츰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건 퍽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따뜻한 맘씨를 지닌 탑리역 열차운용원 아저씨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추억도 들춰보고 하니, 정겨운 마음에 다시 한 번 꼭 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적에 봤던 기차역 풍경은 차츰 사라지고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꿈을 실어 나르던 아름다운 추억은 끝없이 이어질 거라 믿어요.

▲ 저 철길 위로 달리고 싶다! 곧게 뻗은 철길 위로 지난날 추억과 아름다운 꿈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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