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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보 중의 국보 구경하기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천하한량 2007. 8. 31. 23:10
 

 

2006년 까지 진시황능 주변의 지하 갱(坑)은 모두 7개가 있으며
그중 최초로 발견된 1호,2호, 3호 갱이 있는 곳에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이라고
건물을 지어서 손님들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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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1호갱은 길이 230미터, 넓이 62미터, 총 면족 1만7천 40 평방미터로
거대한 돔으로 덮어져 있고, 발굴된 그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
이 돔이 지금의 기술로써 만들수있는 세계최대의 돔이라고 합니다...
 요즘 말이 많은 진시황능을 발굴 할려면 이것보다

 최소 1.5배나 2배 정도 더 큰 돔이 필요한데..

 이는 지금 상태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군요...]


지금까지 발굴된 병마용은 8000개가 약간 넘는 정도인데
이 1호갱에는 6000개 정도의 병마용이 있습니다.
1호갱의 병마용들은 '실전에 임하는 자세' 그대로의 대열로
진시황을 지키는 근위군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40여 승의 목조전차도 같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들 병마용은 갑옷을 입은 채로... 

손에 각종 무기들을 들고 있어
중장비한 주력 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은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던 진짜 무기들로
세월 흐름속에서 나무로 만든 부분은 다 썩어 없어졌지만
철로 만든 부분은 상당수 남아..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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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을 그러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병마용의 재료는 병마용에서 멀지 않은

여산(驪山, 화청지 뒷산) 북쪽에서 나는 석영(石英)이라고 합니다.
이 석영을 곱게 갈아 적당한 비율로 흙과 혼합하고  물을 넣은 다음
몇번 이런 식으로 되풀이하면 반죽이 되는데...
이 반죽으로 성형(成形)을 하게되고
여기에  색깔을 넣고 섭씨 900도의 불로 구워 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몸통과 사지(四肢), 얼굴은 따로 따로 구운 다음..

나중에 결합시켰다고 합니다.


완성된 병마용의 경우...

그 키가 178~187Cm 정도이고...

하나의 무게가 200kg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정황을 근거로 해서 보았을때
이 병마용 제작에는 80명 정도의

황실의 일급 장인들이 동원되어서 얼굴을 만들었고...
[
얼굴 제작 초기에는 분명 모델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합니다
]
몸통과 사지의 제작에는 일반 동원된 일꾼들이

소정의 교육을 받은 뒤 만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 병마용 제작자들은

병마용 곳곳에 자기의 이름을 '낙관'처럼 남겨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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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 내부에는 파다 그만둔 곳이 이곳저곳 보였습니다.

파다가 깨어진 곳은 그냥 천으로 덮어 놓기도 하였고..

병마용 하나를 완전히 복원하는데

발굴에서부터 보통 10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애길 들을 적이 있습니다.

특히 병마용의 색깔 복원이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합니다.

색 복원을 위해 독일과 기술을 합작하고 있지만

아직 이부분은 전세계적인 난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능을 빼놓고 능주변(50만 평방미터)만 발굴하는데

앞으로 100년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안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뭐가 나올지..아무도 모르는거죠..

옆에 있던 일본인 친구가 혀를 차더군요..

자기네 나라 조상은 여기서 저런 병마용을 만들고 있을때...

밭에다가 씨를 뿌려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야오이시대가 시작된거죠

당시 우리 조상들은 위대한 고조선 시대였으니...

뭐 병마용보고 꿀릴 것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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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하군단의 창설은 전혀 비밀이었기에
그 꼼꼼하기로 유명한 '사기'는 물론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벽돌이나 무기에 새겨진 연호를 보아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하고 죽을때까지(BC 221~210)으로

조성연대를 추정해 왔었는데
여기에 한분이 태클을 걸어오셨으니...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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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자 진경원(陳景元.70)씨 입니다.
이분은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도
30년간을 이 병마용...한 주제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건축전문가로써 역사학자와는

다른 시각에서 병마용을 바라 볼 수 있었겠죠
그 30년간 노력의  결과는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입니다
이 분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있게 들리자
(작년 연말쯤에) 중국언론에 소개되었고 ...

국내에도 알려진 분입니다.

 

천 할아버지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진시황이

병마용의 주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1, 병마용이 있는 곳이 진시황릉에서

   무려 1.5㎞나 떨어져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병마용이 죽은 진시황의 호위병이라면

   당연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또, 능 동쪽에 병마용들이 위치하는 것도

   풍수지리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대 제왕의 능묘는 대부분 남북방향이었고...

   능의 배장품이라면 당연히 능묘의 중추선상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군요.

2, 진시황은 전차와 마차 등의

   모든 바퀴 규격을  통일시키는 개혁을 하였는데
   병마용 부장품 가운데 보이는 전차 바퀴는

   규격이 제각각이라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3,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도 보았지만
   진시황대의 무사들은 모두 검은 색 옷을 입었는데
   병마용은  채색 복장[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 자주빛 청색의 바지]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천 할아버지는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병마용 발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모택동의 마누라, 강청때문이라고 합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당시 통치자를 연계할 필요를 느낀
문화계의 여자 깡패 강청이 의도적으로  진시황을 부각시키려 했고,
부장품 역시 진시황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됐다고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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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할아버지는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시황에 비해 100여 년 앞선
진시황의 고조모이자.....

소양(昭襄)왕의 생모인 진선태후(秦宣太后)인 미氏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기'에 의하면

진선태후는 소양왕24년(BC 283년) 10월에

바로 현재의 '병마용'의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나와있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닌 '초나라'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병마용의 헤어 스타일과 옷색깔 등이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BC 306년에 선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소양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했을 정도로 정치 감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태후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신하들에게 순장을 지시했으나
아들인 소양왕은 자기 어머니의 그런 말씀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대신 생각해낸것이....
실제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병용을 만들어서
이를 대신 묻는 순용(殉俑)을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최근에 이르러 점점 주변의 동의와 관심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진선태후의 능은 과연 존재할까요?

능이 병마용주변에서 발견된다면 천할아버지의 주장이 맞을테니까요

공교롭게도 올 여름에 병마용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대형 능원(陵園)이 발견되었습니다.

관계자들은 이 능이 진시황능에 필적할 정도로

가치와 규모면에서 대단하다고 합니다.

 

능의 남북길이는 550미터, 동서길이는 310미터 정도이며

지금 서안재경학원의 신 교사(校舍)자리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이 능은 아쉽게도(?) 진시황이 20살때 죽은

진시황의 할머니인 하태후(夏太后)의 묘라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지금도 이런 발견이 되는 것으로 보아

전선태후의 능이 있다면 언젠가는 밝혀질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천할아버지의 주장을 놓고 할아버지의 주도하에

인테넷상에서 열띤 공방이 붙었는데

[http://blog.sina.com.cn/m/chenjingyuan.천할아버지의 개인 블로그입니다]

이때 천할아버지의 상대역으로

병마용박물관의 전임 관장이자

"중국병마용의 아버지"인 원중일(袁仲一) 박사가 출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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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분은 30년지기 친구로써 평소에 서로 거리낌없이

지내시고 계시지만 일단 병마용 애기만 나오면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논쟁과 설전을 펼치고 계십니다...

 

두 분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바퀴의 규격 문제

 

원중일; 용갱(俑坑)안에 있는 차 바퀴의 폭은 일반적으로 1.9미터이다

        진나라 당시 나라에는

        황제가 타는 마차, 전차, 각종 수레 등등 수레의 종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것들의 바퀴폭을 일률적으로 다 같게 할수가 없었으며

        그대신 같은 종류의 수레끼리는 폭을 같게 하여 법으로 실시하였다

        차동궤(車同軌 = 차의 궤는 같아야 한다)는 바로 이런 걸 말한다.

 

진경원; 병마용안에서 겨우 한 승의 전치만 그 폭이 1.8미터 였다

        나머지는 하도 들쑥날쑥해서 측량자체가 어려웠는데

        1.9미터라는 말은 어디서 뛰어나온 말인가?

 

2,검은 의상 문제

 

원중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같은 색깔의 옷을 입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도 안된다

 

진경원; '사기'의 기록을 보면 진나라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개상흑(皆尙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진나라에서 모두 검은색을 숭상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는말로써..

        나라의 색이 검은색이었고

        무사들이 검은 색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3백장 문제

 

문헌에 따르면 진시황이 자기 무덤의 공사상황을 점검하러 왔다가
재상 이사에게 능묘의 범위를 바깥으로 3백장(丈)을 확대하라고
명령를 내렸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원중일; 진시황능에서 병마용까지의 거리가 삼백장의 안에 있다.

 

진경원; 1척이 현재의 23센티미터라고 하더라도,

        진나라때 삼백장은 현재의 길이로 환산하면 단지 690미터에 불과하다,

        이는 진시황능 동쪽 벽에서부터 병마용 서쪽끝까지 거리인

        1225미터와 부합하지 않는다

 

4,진시황능의 면적 문제

 

원중일; 진시황능의 면적은 56만 평방미터라는 것을 누구든지 알고있다

        이 면적안에 병마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병마용은 진시황의 부장품이다

진경원; 56만 평방미터라는 것은 한번도 과학적인 논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5,병마용내에서 진시황의 생부인 '여불위'라고 쓰여져있는

  창(戈)이 발견된 문제

 

원중일; 이거 이상 확실한 증거가 없다

 

진경원; 그 창은 병마용이 있던 저층이 아니라 중층에서 나왔고

        이는 후대에 퇴적된 것일 수 있다

        아마도 후세인들이 가지고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진경원 할아버지의 주장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일단 역사학자가 아니시니...

이쪽 방면으로 할아버지의 문하(門下)가 없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만 알고 있는 한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연구와 조사를 거듭해오신 진 할아버지가 존경스럽습니다.

그러고..이런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방법이 부럽고, 풍토가 부럽내요.

남의 말은 안듣고..자기 말만 늘어놓고 끝내진 않았으니까요..

 

 

중국 국보 중의 국보 구경하기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병마용(兵馬俑)은 모두 6천 점 가량인데 그 중에서도 채색(彩色) 병마용은 10점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 산시성(陝西省)-한국 합작주 기념사업 일환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31일 개막한‘중국 산시성 문물정화특별전’에 출품된 91점 중 앉은 자세로 활을 쏘는 병사를 형상화한‘궤사용’(궤<足+危>士俑) 도용(陶俑.높이 114㎝) 앞에서 한자오(韓釗) 산시성문물교류중심 부주임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 부주임은 전시실을 안내하면서“다른 유물은 (촬영 때) 플래시를 사용해도 상관없으나 이 채색 도용과 당대(唐代) 벽화만큼은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에서도 국보 중의 국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전시실 첫 머리를 장식한 이 도용은 그의 설명에 의하면 1998년 제2호 진시황 병마용갱 서북쪽 귀퉁이에서 출토됐다. 그 바로 옆에는 진시황릉 배장갱(陪葬坑.K0007호)에서 2001년에 출토된‘청동아’(靑銅鵝)라고 하는 청동으로 만든 오리모양 조각상(높이 40㎝, 길이 약 70㎝)이 자리잡았다.

한 부주임은“병마용갱이면 도용만 생각하기 쉽지만 K0007호만 해도 이런 청동유물이 모두 46점 출토됐다”며“진시황제는 자신이 묻힐 무덤을 살아있을 때의 궁전과 똑같이 꾸미기 위해 오리 등이 노니는 정원 겸 연못인‘원유’(苑유<口안에 有>)를 만들면서 이런 유물도 만들어 넣었다”고 설명했다.


한나라 시대 문물을 집중 전시한 코너에 들어서자 한 부주임은 병마갱 도용과 함께 오는 9일까지 계속될 이번 특별전의‘공동 마스코트’로 선택된 전한(前漢) 경제(景帝. 재위 BC 156-141) 무덤인 양릉(陽陵) 배장(陪葬) 구역(신하들이 묻힌 곳) 출토 채색 도용(높이 63㎝)을 같은 공간에 진열된 양릉 출토 다른 도용들과 비교하면서 한국 취재진들에게“어떤 것이 더 멋있게 보이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곱게 채색으로 단장하고 신체를 온전하게 갖춘 배장구역 출토 도용이 두 팔도 떨어져 나가고 벌거벗은 모습인 다른 도용들보다 격이 한참 높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오산”이라면서“채색도용은 신하들이 묻힌 곳에서 출토된 것이며, 팔 없고 벌거벗은 도용은 경제 무덤 출토품”이라고 설명했다.

팔도 없고 성기까지 드러낸 양릉 출토‘나체’도용은 원래는 비단옷에 곱게 싸고 치장해 무덤에 넣었으나 장구한 세월에 옷이 삭아 없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특별전의 또다른 명품으로‘삼채기타재악용’(三彩騎駝載樂俑)도 소개됐다. 세가지 채색을 넣은 당삼채(唐三彩) 일종으로, 낙타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했다.

1959년 시안시(西安市) 서교중보촌(西郊中堡村)에서 출토된 이 당삼채는 목을 길게 늘어뜨린 채 우는 낙타 등의 선반 위에 오색찬란한 양탄자를 깔고 각종 악기를연주하는 악사 8명을 표현했다.

산시성 인민정부 량허핑(梁和平) 부(副)비서장은“산시성을 찾는 한국 관광객 규모는 미국, 일본에 이어 3위이며 교역 규모로는 한국이 세계 10위”라면서“한국과산시성 합작주를 기념해 열리고 있는 각종 교류행사 중 이번 특별전이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