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자료실 ▒

4.19

천하한량 2007. 8. 10. 00:40

사진으로 보는 광복 60년 

자유당 독재 몰아낸 4.19

[국정브리핑] 2005/04/16 08:53
올해는 일제 36년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국정브리핑>은 광복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사진을 통해 돌아본다. 사진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록이다. 대한민국 발전 과정과 국민들 삶의 변화상이 고스란히 담긴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이 땅위에 펼쳐질 미래 ‘선진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가늠해 본다.<편집자주>


자유를 찾는 갈증은 / 대지에 축축히 번져 / 참다참다 터져나올 울분 / 피가 뒤끓고 / 젊음은 불의에 굴하지 않았다 / 자유를 다오 / 다른 생명이 또 필요하다면 / 나도 여기 가슴을 벌리고 있노라 / 백의의 정신 불꽃처럼 뜨거워 / 넓단 길가에서 부인은 치마를 / 찢고 피흘리는 힘찬 팔뚝에 붕대를 감는다 / 죽은듯 잠잠하던 너와 내가 / 부드러운 대지에 힘차게 서서 / 이것이 자유다 / 횃불을 들고 / 피를 태워 날은 밝았다. (유창범 ‘피 를 태워 날은 밝았다’ 전문)

종신집권을 위한 이승만대통령의 독재, 자유당의 부패정치가 이어지면서 누적된 국민들의 불만은 사상 유래 없는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1960년 2월 28일, 4.19혁명의 도화선은 대구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야당 정·부통령후보 유세일이었던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학생들이 야당 선거유세장에 갈 것을 우려하여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교에 강제 등교를 지시하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후 학생데모는 서울, 대전, 수원, 부산 등지에서 잇따라 일어나면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는 4할 사전투표, 3·5·9인조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종류의 부정선거가 행해졌다. 심지어 유권자수보다 자유당 득표수가 많이 나오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날 마산에서 첫 번째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과 자유당의 부정을 목격한 시민들이 “협잡선거 물리치자”며 시위를 벌이자 이를 제지하던 경찰들이 총격을 가하면서 7명이 죽고, 123명이 다치고, 4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행방불명된 4명 가운데 1명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된 마산상고생 김주열(17)군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8일 고대생 3000여명이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던 중 정치폭력배의 습격으로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날 학생들은 총궐기를 선언한다.

4월 19일, 아침부터 선언문을 읽고 거리로 나온 대학생들과 이에 동조한 중·고교생 그리고 시민들로 시위대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향했고, 효자동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급기야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장갑차를 동원한 진압이 이뤄지면서 이날 하루만 18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국민들은 다시 분노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수들도 4월 25일 “3부요인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기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이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에 의한 7.29총선으로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를 축으로 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부정축재자 처리,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등 민주적 요구들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장면 정부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다. 이는 결국 5.16군사쿠데타의 빌미가 되어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선거는 온갖 방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4.19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투표를 마치고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의하며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왼쪽)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투쟁을 벌이고 있는 시민들.(1960.4.20)

시위대에 의해 화분이 깨지는 등 어수선한 자유당의 한 사무실(왼쪽)과 창과 출입문이 파손되고 그을린 자유당 중앙당부.

4월 19일 시위로 파손된 차량과 가옥. 격렬했던 당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12년간의 경무대 생활을 청산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1960.4.28)

이기붕 국회의장은 4월 28일 일가족이 모두 죽음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쳤다. 운구차량이 경무대를 나서고 있다.

4.19혁명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서 통곡하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60.4.24)

4.19혁명 이후 구속된 정치깡패들이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재판 장면.(60.7.6) 4·18 고대생 피습 사건으로 동대문사단의 보스 이정재는 사형을 당한다.

4.19혁명 당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한 경무대 앞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됐다.(60.7.20)

서울지법이 4.18발포명령사건 등에서 검찰 공소를 사실상 전면 파기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열렸다.(60.10.11) 이는 사회질서 회복이라는 5.16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된다.


글:박미영(mypark@news.go.kr)
사진정리:장명섭(jms1101@allim.go.kr)
사진편집:이정운(woddnsl@new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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