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國 漢 詩 鑑 賞
[詩 題 一 覽]
1. 遺隋將于仲文(乙支文德)…(유수장우중문-을지문덕)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다-----2
2. 詠孤石(定法師)…(영고석-정법사) 고고(孤高)한 바위를 읊다---------------------2
3. 聞漢僧客死有感(慧超)…(문한승객사유감-혜초) 중국의 승려가 객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느껴워서------------------------------------------------------------2
4. 逢漢入蕃使有感(慧超)…(봉한입번사유감)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 느껴워서----3
5. 送童子下山(金地藏)…(송동자하산-김지장)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송별하다---3
6. 怨憤詩(王巨仁)…(원분시-왕거인) 원망스럽고 분해서---------------------------4
7.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朴仁範)…(경주용삭사각 겸간운서상인-박인범) 중국 경주 용삭사의 절집에서 시를 지어 감상한 뒤, 다시 이를 운서상인(雲栖上人)에게 보내다------- 4
8. 秋夜雨中(崔致遠)…(추야우중-최치원) 가을밤 비 내리는 속에서-------------------5
9. 送友人(鄭知常)…(송우인-정지상) 벗을 보내며--------------------------------5
10.夏日卽事(李奎報)…(하일즉사-이규보) 여름날의 눈앞의 풍경들--------------------5
11.奉使入金(陳澕)…(봉사입금-진화) 사명(使命)을 받들고 금나라에 가다---------------6
12.山中雪夜(李齊賢)…(산중설야-이제현) 산중의 눈 내린 밤------------------------6
13.濟危寶(李齊賢)…(제위보) 제위보(임 생각)---------------------------------- 6
14.浮碧樓(李穡)…(부벽루-이색) 부벽루에 올라서--------------------------------7
15.使日本旅懷(鄭夢周)…(사일본여회-정몽주) 일본에 사신 가서----------------------8
16.述志(吉再)…(술지-길재) 뜻을 말하다--------------------------------------8
17.流民歎(魚無迹)…(유민탄-어무적) 유민(流民)에 대한 탄식-----------------------8
18.福靈寺(朴誾)…(복령사-박은) 복령사에서----------------------------------- 9
19.盤陀石(李滉)…(반타석-이황) 반타석(너럭바위)-------------------------------10
20.步自溪上踰山至書堂(李滉)…(보자계상유산지서당) 계상에서 걸어서 산을 넘어 서당에 이르러서------------------------------------------------------------10
21.別蘇陽谷(黃眞伊)…(별소양곡-황진이) 소양곡을 보내며------------------------11
22.山寺夜吟(鄭澈)…(산사야음-정철) 산사에서 밤에 읊다-------------------------11
23.閨怨(林悌)…(규원-임제) 규방의 원한(말없이 임을 보내고)----------------------12
24.孀婦詞(柳夢寅)…(상부사-유몽인) 홀어미의 노래-----------------------------13
25.雜詩(許楚姬)…(잡시-허초희) 임에게--------------------------------------14
26.過松江墓有感(權韠)…(과송강묘유감-권필) 송강의 무덤을 지나다가----------------14
27.傷春(鄭之升)…(상춘-정지승) 봄날이 아파서--------------------------------15
28.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金澤榮)…(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김택영)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는 소식을 듣고---------------------------------------15
29.此夜寒(柳寅植)…(차야한-유인식) 이 밤 춥구나------------------------------15
30.威如霜雪…(위여상설-젊고 예쁜 여자 종) 강물에 몸을 던지며--------------------16
한문학자 연민 이가원(淵民李家源)은 한중(韓中) 고금의 저적(著籍)들을 통섭(通涉)하여 뽑아 엮은 그의 선본(選本)에서, 중국의 한문에서는 웅혼(雄渾) 광막(廣漠)한 경지를 보았으며 한국의 그것에서는 청아(淸雅) 천면(芊眠-빛깔이 화려한 모양-문채가 찬란한 모양)한 정서를 느꼈다고 했다. 전적으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 600년 무렵)은 전쟁터에서 수(隋)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한가롭게도 다음과 같이 오언시(五言詩)를 읊어서 보냈는데, 겉으로는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시제(詩題)는 보통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 또는 〈유우중문(遺于仲文)〉이라 한다.
신통한 전략은 천문을 연구하였고 神策究天文
오묘한 작전은 지리에 통달했구나 妙算窮地理
싸움에 이겨서 공이 이미 높으니 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거든 그만 둠이 어떠리 知足願云止
이에 대하여 백운거사 이규보(白雲居士李奎報)는 그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구법(句法)이 기고(奇古)하고 기려(綺麗)와 조식(彫飾)의 습기(習氣)가 없어 후세의 위미(萎靡)한 자가 따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云’이 ‘言’으로 된 곳도 있다.
다음은 고구려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인데, 자신을 외로이 하늘에 치솟은 바위 봉우리에다 비유하여 읊은 오언고시(五言古詩-律詩와 비슷하나 시기적으로 이르고 平仄이 맞지 않는다)이다. 대우법(對偶法) 등 세련된 구법(句法)이 비슷한 시기인 중국의 초당시(初唐詩)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일찍이 중국 후주(後周 557-581)에 건너가서 표법사(標法師)를 종유(從遊)했다고 한다. ‘根’이 ‘隈’로, ‘漬’가 ‘淸’으로 된 곳도 있다.
멀리 바위가 곧추 반공에 치솟았는데 逈石直生空
펀한 못물이 퀭하니 사방으로 틔었네 平湖四望通
바위 뿌리는 항상 물결에 씻기우고 巖根恒灑浪
나무 끝은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려라 樹杪鎭搖風
물 위에 거꾸러져 그림자를 적시다가 偃流還漬影
노을을 뚫고 올라 불그레 물들었구나 侵霞更上紅
뭇 봉우리 바깥으로 홀로 벗어나가서 獨拔群峰外
하얀 구름 속으로 외로이 치솟았구려 孤秀白雲中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의 오천축국(五天竺國-印度)을 여행하던 신라의 승려(僧侶) 혜초(慧超 704-787)는 인도의 나게라타나(那揭羅駄娜)라는 절에 들렀다가, 어떤 중국 승려(僧侶)가 그 곳에 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려다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아파서, 그를 애도(哀悼)하는 다음과 같은 오언시(五言詩)를 남겼다. 보수(寶樹)는 한승(漢僧)의 육신(肉身)을 말한다.
고국의 불등(佛燈)은 주인도 없는데 故里燈無主
보수가 타방(他方)에서 꺾이었구려 他方寶樹摧
혼령은 그래 어디로 가시었는고 神靈去何處
옥같은 모습이 재가 되고 말았구나 玉貌已成灰
생각건대 슬픈 정이 얼마나 간절했겠나 憶想哀情切
원을 못 푼 그대가 마음에 애처롭다네 悲君願不隨
고국으로 가는 길을 아는 이 누구이던가 孰知鄕國路
부질없이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아라 空見白雲歸
또 토화라국(吐火羅國)이란 곳에서 서번(西蕃)으로 가는 중국 사신(使臣)을 만나서는 이렇게 읊었다.
그대는 서번 길이 먼 것을 한탄하네만 君恨西蕃遠
나는 야 동쪽 길이 길다고 차탄한다네 余嗟東路長
거친 길에 눈 쌓인 잿마루가 까마득한데 道荒宏雪嶺
험한 골짜기에는 도둑떼가 들끓는다네 險澗賊途倡
새가 날다가 깎아지른 봉우리에 놀라는데 鳥飛驚峭嶷
사람은 가다가 외나무다리가 난감하구나 人去難偏樑
평생에 한번도 눈물을 훔친 적이 없건만 平生不捫淚
오늘은 주룩주룩 한도 없이 흘러내리네 今日灑千行
초등학교 4학년 때 김성칠(金聖七)이란 분이 쓴 《조선통사》를 친구에게서 노상 빌려 보았는데, 이 책의 문장이 너무도 아름다운 데다 특히 여러 편 옮겨 실은 한시의 번역문이 더욱 사랑스러워서 달달 외웠었다. 물론 이 혜초(慧超)의 시편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다가 그 뒤 증보(增補) 개판(改版)한 《한국통사》를 샀었는데, 지금은 책도 간 곳이 없고 외우던 번역들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김성칠 선생 또한 6.25 뒤인 1951년 10월 8일 밤에 고향 영천에서 괴한(怪漢)의 저격을 받아 작고하고 말았다니,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학계(學界)에서조차 그 분의 이름이 지워져버린 것 같아서 너무 서운하다.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추억의 한 장면이 이렇게도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가 보다.
신라인 김지장(金地藏)은 왕자(王子)의 몸으로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 곳에 지장신앙(地藏信仰)을 펼친 뒤, 원성왕(元聖王) 10년(794)에 99세로 입적(入寂)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현(化現)으로 믿었다고 한다. 중국 구화산(九華山)에 있을 때 산을 내려가겠다는 동자(童子) 아이를 보내면서 지은, 그의 유일하게 남은 작품인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은 다음과 같다.
절간이 쓸쓸하여 집 생각이 나는가 보다 空門寂寞汝思家
운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내려가겠다네 禮別雲房下九華
언덕길을 내달리며 죽마나 타고 싶었지 愛向竹欄騎竹馬
절에서 도 닦는 일이야 재미가 있었겠나 懶於金地聚金沙
이제 누가 물 길어다 붇고 달맞이 하랴 添甁澗屋休招月
차 끓이며 하던 장난도 다시는 그만이지 烹茗甌中罷弄花
그럼 잘 가거라 가서 부디 울지나 말고 好去不須頻下淚
늙은 내가 벗할 자는 놀과 이내가 있단다 老僧相伴有煙霞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때 왕거인(王巨仁)은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 다음과 같은 〈원분시(怨憤詩)〉를 지었다. 왕거인이 이 시를 지어서 감옥 벽에 써 붙였더니,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치면서 우박(雨雹)이 쏟아졌다. 이에 왕이 크게 놀라 왕거인을 석방했다고 한다. 진성여왕 2년(888)에 시정(時政)을 비방(誹謗)하는 글을 대로변(大路邊)에 써 붙인 자가 있었는데, 왕은 이를 은자(隱者) 왕거인의 소행(所行)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를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
우공이 통곡하니 삼년이 가물었고 于公慟哭三年旱
추연이 비분하자 오월에 서리가 쳤다네 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이 시름이 이들과 같다만 今我幽愁還似古
하늘은 말이 없이 푸르기만 하구나 皇天無語但蒼蒼
신라 말엽 당(唐)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문인(文人) 중의 한 사람인 박인범(朴仁範 900년무렵)은 다음과 같이 〈경주용삭사 각 겸간운서상인(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이란 칠률(七律)을 지었는데, 이규보는 그의 〈白雲小說〉에서 이를 화국(華國-나라를 빛냄)의 명수(名手)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3,4구는 경구(警句)로 평하여진다. 제목의 뜻은 “중국 경주 용삭사의 절집에서 시를 지어서 감상한 뒤, 다시 이를 운서상인(雲栖上人)에게 보낸다.”는 말이다. 경주(涇州)는 지금 감숙성의 경주현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잔치를 벌였다는 요지(瑤池)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到’가 ‘倒’로, ‘理’가 ‘裡’로 나와 있다.
나는 듯한 절간이 하늘에 치솟았구나 翬飛仙閣在靑冥
월궁의 피리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네 月殿笙歌歷歷聽
등불이 한들한들 오솔길을 밝히네 燈撼螢光明鳥道
무지개다리를 돌아 바위 문에 이르러라 梯回虹影到巖扃
오가는 사람 행렬 어느 제나 다하리 人隨流水何時盡
산을 에운 대수풀은 만고에 푸르구나 竹帶寒山萬古靑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 듣다가 보니 試問是非空色理
지금껏 쌓인 번뇌가 금방 활짝 깨이네 百年愁醉坐來醒
다음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鼻祖)라고 일컬어지는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 857-?)의 오절(五絶)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그는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뒤,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천하(天下)에 문명(文名)을 날렸다. 글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황소가 이를 읽다가 정신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하며, 졸병들도 하나둘씩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고 한다. 당이 차츰 쇠망(衰亡)의 길을 걷자 28세(혹은 29세)에 귀국하였는데, 돌아온 신라의 형편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가야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世路’가 ‘擧世’로 되어 있는 판본(板本)도 있다.
가을바람에 괴로이 시 구절을 읊조린다만 秋風唯苦吟
세상의 어디에도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世路少知音
창밖에선 삼경의 밤비가 내리는데 窓外三更雨
방안의 마음은 일만 리 고국 땅을 내달리네 燈前萬里心
고려의 천재시인 남호 정지상(南湖鄭知常 ?-1135)의 〈送友人-送人-大同江〉은 중국 당(唐)나라 왕유(王維)의 절창(絶唱)인 〈위성사첩(渭城三疊)〉과 병칭(竝稱)되는 〈해동삼첩(海東三疊)〉으로 일컬어지는, 번화 고도(繁華古都)의 이정(離情)을 읊은 천년절조(千年絶調)이다. 후래(後來)의 많은 시인(詩人)들이 수없이 차운(次韻)하고 모습(模襲)했지만 모두 모방(模倣)에 그치고 말았다. 이 번역은 앞에서 말한 김성칠 선생의 것인데, 유일하게 잊어버리지 않고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기적 같은 글이다.
비 개인 후 언덕엔 풀빛 새론데 雨歇長堤草色多
임 여의고 이 가슴 애 끊는도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흐르는 물 어이 다 하리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예는 눈물 이에 지우네 別淚年年添綠波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이 시에 대한 서수생(徐首生)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앞의 것이 뒤의 것에 비하여 역문(譯文)이 훨씬 유려(流麗)하고 산뜻하며, 원시(原詩)의 운률(韻律)과 정서(情緖) 또한 훨씬 더 절실하게 옮기고 있는 것 같다.
비 갠 긴 강둑엔 풀잎이 이들이들
남포에 임 보내니 슬픈 노래 북받치네
어느 제 마르오리 대동강 푸른 물
해마다 저 강물에 이별 눈물 더 보태네
고려 무신정권 때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하일즉사(夏日卽事)〉는 특히 그 3,4구(句)가 진화(陳澕)의 ‘一江春雨碧絲絲’란 일구(一句)와 함께 제명(齊名)하여, 자하 신위(紫霞申緯)는 그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齊名陳李有誰知 片羽零金恰小詩 密葉翳花雲漏日 一江春雨碧絲絲”란 멋진 말로 이를 칭송하였다. “진(陳)과 이(李)가 이름이 나란한 줄을 누가 알던가. 그들이 남긴 훌륭한 솜씨가 짧은 시편에도 충분하다네. 밴 잎에 가린 꽃과 구름 틈으로 새는 햇빛이여! 푸른 실오리 같이 강물 위에 뿌리는 봄비로구나!”의 뜻이다. 〈夏日卽事〉는 이렇다.
대자리 홑적삼으로 마루에 누웠다가 輕衫小簟臥風欞
울어대는 꾀꼬리 노래에 꿈을 깨니 夢斷啼鶯三兩聲
밴 잎에 가린 꽃이 늦게야 피었는데 密葉翳花春後在
옅은 구름 비 뿌리다가 여우볕 나네 薄雲漏日雨中明
고려 가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나오는 “이 정언(李正言) 진 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의 이(李)와 진(陳)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한다. 그러면 다음에서 진화(陳澕 1220년무렵)의 〈奉使入金〉을 읽어보자.
서쪽 중국은 이미 시들었구나 西華已蕭索
북쪽 오랑캐도 아직 희미하다네 北塞尙昏濛
앉아서 밝은 아침을 기다리노라니 坐待文明旦
동쪽 하늘에 불그레 해가 솟는다 東天日欲紅
은근히 민족의 웅비(雄飛)를 기대하면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지긋이 감상(鑑賞)하고 있는 모습이다. 서쪽 중국은 이미 시들었고, 북쪽 오랑캐도 아직 희미한데, 바라보니 조국(祖國) 고려가 있는 동쪽 하늘에서 불그레 문명(文明)의 태양(太陽)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때까지는 아직 우리 겨레의 기상이 굳건하여, 그렇게 화이관(華夷觀)에만 찌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塞’가 ‘寨’로, ‘東天’이 ‘天東’으로 된 곳도 있다.
다음은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우리나라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라고 추숭(追崇)한 익재 이제현(益齋李齊賢 1287-1367)의 〈산중설야(山中雪夜)〉이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그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이 시를, “산가(山家) 설야(雪夜)의 기취(奇趣)를 기가 막히게 사출(寫出)하여, 읽으면 마치 입안에서 시원한 이슬 기운이 도는 것 같다. 최졸옹(崔拙翁-최해(崔瀣))은 말하기를, ‘익재의 시법(詩法)이 모두 이 시에 있다’ 하였다.” 했다.
종이이불에 한기가 일고 등불은 흐린데 紙被生寒佛燈暗
사미 아이 날이 밝도록 종을 안 치네 沙彌一夜不鳴鍾
손님이 문을 너무 일찍 연다 꾸짖겠지만 應嗔宿客開門早
눈덩이에 짓눌린 저 건너 솔 좀 보구려 要看菴前雪壓松
이제현은 당시에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들을 〈소악부(小樂府)〉란 이름으로 한시 절구(絶句)로 옮겨 놓았다. 대역(對譯)이 아니라 시역(詩譯)이어서 원의(原義)가 얼마나 옮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여향(餘香)은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 중의 하나인 〈제위보(濟危寶)〉란 제목의 것인데, 《고려사 악지(高麗史樂志)》는, 이에 대하여, “어떤 부인이 죄를 짓고 제위보(濟危寶-빈민 구제와 여행자의 구호를 맡은 관청)에서 복역(服役)하다가 남자에게 손을 잡히는 봉변을 당했다. 그러나 분풀이를 할 길이 없어 이와 같이 노래를 지어서 한탄했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한역(漢譯)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옮기고 있는 것이라면, 가당찮은 소리다. 이야말로 사무치는 연정(戀情)을 쥐어짜는 한 여인의 단장(斷腸)의 토로(吐露)이다. 한시(漢詩) 특유의 춘정(春情)이 행간(行間)에서 배어나온다. 본래의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수양버들 냇가에서 빨래 하다가 浣紗溪上傍垂楊
백마 타신 도련님께 손목 잡혔지 執手論心白馬郞
아무리 석 달 열흘 비 내린대도 縱有連簷三月雨
손끝에 밴 임의 내음 어이 지우랴 指頭何忍洗餘香
고등학교 《漢文Ⅱ》(동아출판사)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옮겨 싣고 있다.
실버들 늘어진 시냇물 가에서
비단옷 빨래를 멈추고
백마(白馬) 타고 온 도련님과 마음을 속삭이며 잡았던 손목,
추녀에 퍼붓는 석 달 열흘의 장맛비라도
어찌 차마 손끝의 여향(餘香)을 씻으리오.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시인 자하 신위(紫霞申緯)는 이를 본떠 시조(時調)를 번역해서 〈小樂府〉를 만들었는데, 그 중 〈나비야 청산가자〉를 옮긴 〈호접청산거(胡蝶靑山去)〉는 다음과 같다.
白胡蝶汝靑山去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다음은 여말(麗末)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李穡 1328-1396)의 〈부벽루(浮碧樓)〉란 오율(五律)인데, 실로 웅위(雄偉)한 작품이다. 교산 허균(蛟山許筠)은, 이를, “조식(彫飾)하거나 탐색(探索)함이 없이 저절로 운율(韻律)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 했으며, 자하 신위(紫霞申緯)는, “풍등(風磴)에서 휘파람 부는 목옹(牧翁)과 녹파(綠波) 위에 눈물을 뿌리는 정지상(鄭知常)이 실로 그 웅호(雄豪)와 염일(艶逸)이 막상막하이다. 참으로 위장부(偉丈夫) 앞에 요조랑(窈窕娘)이라 하겠다.” 하였다. 녹파첨루(綠波添淚)의 정지상을 아름다운 아가씨에, 장소풍등(長嘯風磴)의 이색을 헌걸찬 대장부에 각각 비유한 것이다. 서도(西都-平壤)를 읊은 시로 이 두 편을 따를 자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다고 평하여지고 있다. 고사(故事)의 의미에 대해서는 《해뜨는 언덕에서》라는 이름의 나의 책 28쪽에 설명이 나온다.
그저께 영명사 절을 지나다 昨過永明寺
부벽루 다락에 잠깐 올랐다네 暫登浮碧樓
빈 성에 한 조각 달이 밝은데 城空月一片
천년 세월에 조천석도 늙었구나 石老雲千秋
기린마 떠나간 뒤 소식 없으니 麟馬去不返
임이여 어느 곳에 노니십니까 天孫何處遊
바람 찬 돌계단에서 휘파람 부니 長嘯依風磴
산은 푸르고 강물이 흘러가노라 山靑江自流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1337-1392)가 일본에 사신(使臣) 갔다가 그 곳 객관(客館)에서 지은 오율(五律) 〈旅寓-旅懷-使日本旅懷-洪武丁巳奉使日本作其四〉는 애틋하고도 간절한 작품이다. 만리타국에 사신 가서 장기간 지체하면서 목적한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객관(客館)에서 봄비에 갇혀 국사(國事)와 집안일을 생각하며 쓸쓸하고 지루한 시간을 무료히 보내노라면, 시(詩)라도 한 수 짓지 않고 어떻게 이를 달랠 수 있었으랴?
한 평생 남쪽 북쪽 떠돌다 보니 生平南與北
세상 일 마음과는 어긋나더라 心事轉蹉跎
고국은 바다 서쪽 까마득한데 故國海西岸
쪽배 타고 하늘 끝 예까지 왔구나 孤舟天一涯
매화 핀 창 가에 봄이 이른데 梅牕春色早
판자 쪽 지붕엔 빗소리가 요란하다네 板屋雨聲多
긴 날을 홀로 앉아 보내노라니 獨坐消長日
애 끊이는 집 생각을 어이 견디랴 那堪苦憶家
다음은 야은 길재(冶隱吉再 1353-1419)의 칠절(七絶) 〈述志-閑居〉이다. 세상을 숨어 사는 사람의 담박(淡泊)하고 자족(自足)한 풍모(風貌)가 넉넉하다. 여기에 무슨 다툼이 있으며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그는 고려에 충절을 지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영남(嶺南)에서 그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학맥(學脈)을 전하였는데, 이후 이들 영남의 사림파(士林派)들은 학계(學界)와 정계(政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홀로 사는 띠집이 개울 가이라 臨溪茅屋獨閑居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이 절로 인다네 月白風淸興有餘
사람은 오지 않고 산새만 조잘대는데 外客不來山鳥語
대숲에 평상을 놓고 책을 누워 보노라 移床竹塢臥看書
조선 전기(前期) 연산군 무렵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경상도 김해(金海) 출신의 낭선 어무적(浪仙魚無迹)은, 아버지는 엄연한 사대부(士大夫)였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 출신이어서 법에 따라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나중에 아마도 어떤 방법으로 속량(贖良)하여 면천(免賤)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이다. 그는 연산군 7년(1501)에 상소(上疏)를 올려서, “나는 천민출신(賤民出身)으로 벼슬 할 생각은 없지만, 옛말에 ‘집이 위에서 새는 것을 밑에서 가장 잘 안다’고 했듯이 지금 이처럼 밑에 있으면서 세상의 새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들어서 밝혔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살던 고을에서 백성의 매화(梅花)나무에다 세금(稅金)을 부과한 일이 있어, 백성이 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렸는데, 이를 보고 관장(官長)의 횡포를 규탄하는 〈작매부(斫梅賦)〉를 지었다가 체포령이 내려, 도망하여 유랑(流浪)하던 중 어느 역사(驛舍)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의 〈유민탄(流民歎)〉과 〈신력탄(新曆歎)〉은 뛰어난 명작(名作)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과 《국조시산(國朝詩刪)》에까지 올라 있으며, 특히 허균(許筠)은 그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다음의 〈유민탄〉을 당시의 대표적 걸작(傑作)으로 평가하고 있다.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백성들아 蒼生難蒼生難
흉년이 들었으니 먹을 것이 없구나 年貧爾無食
나야 너를 돕고 싶다만 我有濟爾心
도울 힘이 있느냐 而無濟爾力
괴로운 백성들아 괴로운 백성들아 蒼生苦蒼生苦
날씨가 추워 와도 덮을 이불이 없구나 天寒爾無衾
저들이야 너를 도울 힘이 있지만 彼有濟爾力
어디 도울 마음이 있느냐 而無濟爾心
원컨대 저들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 願回小人腹
잠시라도 군자의 마음을 만들고 暫爲君子慮
잠시라도 군자의 귀를 빌려서 暫借君子耳
불쌍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소 試聽小民語
백성들이 하소연해도 임금은 알지 못하니 小民有語君不知
세상의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今世蒼生皆失所
대궐에서 아무리 백성들 걱정하는 글을 내려도 北闕雖下憂民詔
고을에만 내려오면 한 장의 휴지 쪽이 되고 만다네 州縣傳看一虛紙
특별히 경관을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본다고 特遣京官問民瘼
역마는 하루에도 삼백 리를 달린다만 馹騎日馳三百里
백성들 힘이 없어 문지방을 넘지 못하니 吾民無力出門限
어느 제 얼굴을 쳐다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랴 何暇面陳心內事
설사 고을마다 한 사람씩 경관을 보낸다 해도 縱使一郡一京官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으니 京官無耳民無口
차라리 급회양 같은 착한 원을 보내어서 不如喚起汲淮陽
죽다 남은 이 백성이라도 살려야 하리 未死孑遺猶可救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날이 추워도 입을 것이 없는 백성들. 백성들이 하소연한다고 임금이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대궐 앞에 달아 놓은 신문고(申聞鼓)를 치니 치라고 달아놓고는 쳤다고 잡아넣지 않았더냐? 어사(御使)니 경관(京官)이니 하는 이름들을 아무리 내려 보낸들, 내려오는 사람은 귀가 없고 쳐다보는 백성은 입이 없으니, 결국은 모두 하나의 민폐(民弊), 민막(民瘼)만 더 보태는 꼴이 되고 말지 않던가? 너무도 가슴이 저리고 너무나 공감이 가는 시편이다. 표현은 아주 평이(平易)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하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동래(東萊)에 유배되어 처형당한, 조선조 5백 년의 으뜸가는 시인(詩人)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읍취헌 박은(挹翠軒朴誾 1479-1504)은 다음과 같이 그의 유명한 〈복령사(福靈寺)〉를 칠률(七律)로 읊었는데, 특히 5,6구는 자연의 기미(幾微)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잔잔하게 영혼에 파동을 일게 하는, 경절(警絶)하기 짝이 없는 일련(一聯)이다.
시에 나오는 ‘신인(神人)’과 ‘대외(大隗)’는 《莊子 徐无鬼》에 나오는 말이다. 대외는 ‘대도(大道)를 체현(體現)한 자’를 뜻하며, 신인은 황제(黃帝)가 대외를 만나기 위하여 데리고 갔던 수행자들이다. 황제가 일곱 사람의 신인(《장자》 원문에는 ‘神’이 아니고 ‘聖’으로 나온다)의 안내를 받아 구자산(具茨山)으로 대외를 찾아갔는데, 양성(襄城)이란 들판에 이르러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목동(牧童)을 만나 길을 물었다고 한다. 천태산(天台山)은 중국 절강성에 있는데, 불교의 천태종(天台宗)이 발원(發源)한 곳이다.
가람은 모두 신라 때의 절들인데 伽藍却是新羅舊
부처님은 하나같이 천축에서 왔다네 千佛皆從西竺來
옛날에도 신인이 대외를 못 찾았다지 終古神人迷大隗
지금 여기 이 복지가 천태산과 같구나 至今福地似天台
봄날이 비를 머금어 새들이 조잘대는데 春陰欲雨鳥相語
시들은 고목나무엔 바람만 윙윙거리네 老樹無情風自哀
세상일이야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되거니 萬事不堪供一笑
청산도 세월에 찌들어 티끌만 뽀얗구나 靑山閱世只浮埃
퇴계 이황(退溪李滉)은 학자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도 뛰어난 분이다. 그의 〈도산잡영(陶山雜詠)〉 중의 〈반타석(盤陀石)〉은 도학정신(道學精神)의 확고함과 삶의 모습의 유연함을 냇물 가운데 버티고 선 너럭바위에다 탁의(託意)하여 표현한 것인데, 자주 인용되는 그의 시이다.
황류가 몰아칠 때는 숨어 있다가 黃濁滔滔便隱形
맑은 물이 졸졸대면 나타난다네 安流帖帖始分明
어여쁘다 저같이 부대끼는 속에서 可憐如許奔衝裏
천년을 반타석은 꿈쩍도 않는다네 千古盤陀不轉傾
또 그의 〈보자계상유산지서당(步自溪上踰山至書堂)〉은 인간의 자연과의 합일(合一)의 경지를 가장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퇴계 만년(晩年)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벼랑에 꽃이 피어 봄날은 고요한데 花發巖崖春寂寂
시내 숲에 새 울고 물소리 졸졸 鳥鳴澗樹水潺潺
우연히 산 뒤에서 아이 어른 손잡고 偶從山後携童冠
한가로이 산 넘어 와서 집터를 본다 閒到山前問考槃
학인(學人) 송재소(宋載邵)는 그의 《다산시연구(茶山詩硏究)》에서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 시의 요점은 ‘우연히(偶)’와 ‘한가로이(閒)’라는 두 낱말에 있다. ‘우연히’와 ‘한가로이’는 무작위적(無作爲的)인 의미를 가진 말들이다. 벼랑에 꽃이 피고 나무에 새가 울고 시냇물이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이것은 마치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과 같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천리가 유행하는 자연 속에서 전혀 무작위적으로 ‘우연히’ 산 뒤로부터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르는 것은 자연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자연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다는 뜻이다. 산 뒤로부터 산 앞으로 넘어오는 동작은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시냇물이 흐르는 현상과 같다. ‘같다’는 말은 자연과 합일되었다는 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리에 순응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지(境地)가 성리학적(性理學的) 수양(修養)의 최고의 경지이다.”
그는 또 이 시를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벼랑에 꽃이 피어 봄날은 고요하고
시내 숲에 새 울어라 냇물은 잔잔한데
우연히 산 뒤에서 童子 冠者 이끌고
한가로이 산 앞에 와서 考槃을 묻노라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한 개성(開城)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는 시조(時調)는 물론이고 한시(漢詩)에도 달인(達人)이었다. 당시 호걸 남아(男兒)이던 양곡 소세양(陽谷蘇世讓 1486-1562)은 젊은 시절 꿋꿋한 의지(意志)를 자부하여, “여색에 빠지는 자는 남자가 아니다” 하였다. 황진이가 재색(才色)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 여자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0일만 동숙(同宿)하고 깨끗이 돌아오겠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더 미적거리는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 하였다. 송도(松都)에 가서 진이(眞伊)를 만나보니 과연 미인이었다. 정이 들어 같이 지냈다. 드디어 내일이면 30일이다. 그는 진이를 데리고 남루(南樓)에 올라가서 술을 마셨다. 진이는 조금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하나 청하기를,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찌 한 말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변변치 못한 시나 한 수 읊어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오율(五律) 〈別蘇陽谷-奉別蘇判書世讓〉을 읊어서 주는 것이었다. 양곡이 받아서 읊고 탄식하기를, “내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이런 여인을 어떻게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하였다. 드디어 주저앉아버렸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 5백 년 간에 규방시인(閨房詩人)의 대표로는 허초희(許楚姬)를, 기류시인(妓流詩人)의 대표로는 황진이를 꼽는데, 특히 황진이는 한시보다 시조가 장기(長技)였다. 그의 주옥(珠玉) 같은 몇 편의 시조는 우리 시조문학사(時調文學史)에서 샛별처럼 빛나고 있다. “梅花入笛香”은 젓대로 〈매화락(梅花落)〉, 〈매화타령(梅花打令)〉을 연주한다는 말이다. 〈매화락〉은 젓대로 취주(吹奏)하던 옛날 악부(樂府)의 곡명(曲名)이다.
오동 잎 달 아래 지고 月下梧桐盡
서리 속 들국화 피었는데 霜中野菊黃
하늘에 닿은 다락 위에서 樓高天一尺
천 잔 술에 취하였구나 人醉酒千觴
거문고 소리 물처럼 맑고 流水和琴冷
꽃향기 은은한 저[笛] 피리 가락 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헤어진 후면 明朝相別後
그리운 정 강물처럼 흐르리 情與碧波長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제일인자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은 시조(時調)와 한시(漢詩)에도 역시 더할 수 없는 천재(天才)였다. 다음은 그의 〈秋夜-秋月-山寺夜吟〉인데, 매우 재치 있는 작품이다.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 蕭蕭落葉聲
후두들기는 빗소리 같아 錯認爲疎雨
중을 불러 나가보랬더니 呼僧出門看
앞개울 나무 끝에 달이 걸렸더라고 月掛溪南樹
호남 출신의 대가(大家)인 백호 임제(白湖林悌1549-1587)는 절륜(絶倫)한 천재(天才)로 호탕불기(浩蕩不羈)하여 사람들이 글은 취하면서도 교제는 멀리 하였다. 대곡 성운(大谷成運 1497-1579)이 유일하게 그를 인정하므로, 속리산으로 찾아가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서도병마사(西道兵馬使)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시조를 지어 읊으면서 제사(祭祀)를 지내주었다가 임지(任地)에 부임하기도 전에 파면을 당하는 등, 숱한 화제를 뿌리고 일화(逸話)를 남겼다. 39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운명(殞命)하기 전에 처자(妻子)에게 말하기를, “사이팔만(四夷八蠻)이 모두 제국(帝國)을 세워서 천자(天子)를 일컫는데, 유독 우리 조선만 자립(自立)을 못하여 중국을 종주(宗主)로 모시고 있으니,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면 무엇 하며 죽는다고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곡을 하지 말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서 읊은 시조는 이렇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그러면 다음에서 그의 〈규원(閨怨)-무어별(無語別)〉을 읽어보자. 중국의 심덕잠(沈德潛)은 《明詩別裁》에서, 이 시를 보고, “마치 최국보(崔國輔-최호(崔顥))의 소시(小詩)를 읽는 것 같다.” 하였다. 최국보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으로, 특히 여인(女人)의 한을 읊은 소품(小品)인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여러 편 남겼다.
열다섯 살 어여쁜 월계의 아가씨 十五越溪女
부끄러워 잘 가란 말도 못하고 羞人無語別
돌아와선 꽈당 안방 문 닫고 歸來掩重門
배꽃 달만 쳐다보며 홀짝거리네 泣向梨花月
학인(學人) 미승우(米昇右)의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들》에 이 시의 번역에 대한 시비(是非)가 나온다. 시중의 각종 번역본들이 첫 구절의 ‘越溪女’를 “아리따운 아가씨”(李丙疇-韓國漢詩選), “아가씨 냇물을 건너서”(曺斗鉉-漢詩의 理解), “시냇물을 건너간…어린 처녀”(李又載-韓國漢詩論) 등으로 옮기고 있는데, 모두 적절치 못한 것 같고, “(열다섯 살을) 넘은 개울가의 여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더구나 문법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越溪’는 말하자면 ‘일종의 대표적인 미인(美人)의 산지(産地)’라는 말과도 같다. 중국 춘추시대의 불세출(不世出)의 미인 서시(西施)가 빨래하다가 월왕(越王)에게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월계’이다. 그래서 후래(後來)의 시인(詩人)이나 묵객(墨客)들은 흔히 ‘미인’이나 ‘미인과의 관계’ 등을 말할 때 ‘완사(浣紗)’니 ‘월계(越溪)’니 하는 등의 말들을 썼다. ‘완사’는 앞의 이제현의 〈소악부〉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서시가 빨래하던 ‘것’을, ‘월계’는 서시가 빨래하던 ‘곳’을 상징하여 하는 말이다. 그래서 왕유(王維)의 〈서시영(西施詠)〉에는 “朝爲越溪女 暮作吳宮妃”라 했으며, 이태백(李太白)의 〈송축팔지강동(送祝八之江東)〉에는 “西施越溪女 明豔光雲海”라 했고, 백낙천(白樂天-白居易)의 〈요릉(繚綾-월에서 나는 곱고 아름다운 비단)〉에는 “織者何人衣者誰 越溪寒女漢宮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서시는 원래 월나라 저라산(苧羅山)의 땔나무 장수의 딸로, 약야계(若耶溪-완사계(浣紗溪))에서 빨래를 하다가 월왕의 신하인 범려(范蠡)에게 발견되어 왕에게 바쳐져서 다시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뇌물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이 약야계를 월(越)나라의 개울이라 하여 월계라고 하는 것이다. 서시를 선물로 받은 오왕 부차는 과연 삼백장(三百丈) 높이의 2백 리를 조망(眺望)하는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밤낮없이 그 위에서 서시를 데리고 놀이판을 벌였는데, 그러다가 드디어 월나라에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글짓기의 재료가 되어 왔다. 그래서 오희월녀(吳姬越女)니, 오왜월염(吳娃越豔)이니, 월녀(越女)니, 월염(越豔)이니, 월계(越溪)니 하는 등등의 말들은, 중국은 물론이고,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는,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 사랑의 대상, 사랑의 장소, 사랑의 이야기, 아름다운 여인, 강남(江南)의 미인(美人) 등의 의미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다음은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인 어우당 유몽인(於于堂柳夢寅 1559-1623)의 〈상부사(孀婦詞)-제보개산사벽(題寶蓋山寺壁)〉인데, 보개사 절에 놀러 갔다가 지어서 절 벽에다 써 붙인 시이다. 그는 타고 난 천재로 일대(一代)를 오시(傲視)하여, 친구 이정귀(李廷龜)가 대제학(大提學)에 천거했을 때는 “군아(群兒)로 더불어 코 묻은 떡을 다투고 싶지 않다”는 말로 거절했던 사람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이른바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는데, 장국대신(掌鞠大臣) 이원익(李元翼)이 이 시를 보고 의롭게 여겨서 석방하려 했으나 훈신(勳臣) 김류(金瑬)의 강력한 반대로 처형되고 말았다.
훗날 정조(正祖)는 이 시를 보고 “〈이소(離騷)〉의 유의(遺意)를 깊이 체득하여 김시습(金時習)의 시와 백중(伯仲)하니, 이심(二心)을 품은 신하나 여자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한다.” 하였다. 드디어 신원(伸寃)되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여사(女史)’는 옛날 여관(女官)의 하나인데, 글을 아는 여자로 임명하여 왕후(王后)의 예의(禮儀)에 관한 업무 등을 관장시키거나, 세부(世婦)의 하속(下屬)으로 두어서 문건(文件)의 서사(書寫)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여관(女官)’은 궁중(宮中)에서 대전(大殿)과 내전(內殿)을 가까이서 모시던 내명부(內命婦), 곧 궁녀(宮女)를 말한다. 이들은 그 법도나 규율이 지극히 까다롭고 엄하였다.
일흔 살 늙은 홀어미가 七十老孀婦
외로이 홀로 산다네 單居守空壼
항상 여관(女官)의 글을 읽어서 慣讀女史詩
여자의 도리를 잘 안다오 頗知妊姒訓
멋진 사내가 꽃 같다며 傍人勸之嫁
남들은 시집을 가라지만 善男顔如槿
백발 머리에 단장을 하는 게 白首作春容
연지와 분에 부끄럽지 않으랴 寧不愧脂粉
다음은 국문 소설《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許筠)의 누나 허초희(許楚姬-許蘭雪軒 1563-1589)의 〈잡시(雜詩)〉이다. 이가원(李家源)은 이 시를 “여성의 다정다감한 심경을 섬세(纖細)하고 완곡(婉曲)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하여, 비록 소시(小詩)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여인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는 작품이다.” 하였다. 허초희는 조선시대 규방시인(閨房詩人)의 제일인자로, 그의 시집은 중국에서도 애독되어 적선(謫仙)으로까지 일컬어졌다고 한다.
중국인 난공(蘭公)이 묻기를, “귀국의 경번당(景樊堂-허초희의 字)은 허봉(許篈)의 누이동생으로, 시로 이름이 나서 중국의 선시(選詩) 속에 들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담헌(湛軒)이 대답하기를, “그 부인은 시는 높으나 덕행은 그 시를 멀리 따르지 못합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이 재모(才貌)가 시원찮았는데, 그래서 시를 짓기를, ‘원컨대 인간세상에서 김성립과 헤어져서, 저승에 가서 길이 두목지를 따르고저.[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從杜牧之]’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난공이 다시 말하기를, “가인(佳人)이 졸부(拙夫)를 만났으니 어찌 여한(餘恨)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한다. 두목지는 당말(唐末)의 이름난 시인인데, 한편 미남(美男)으로도 유명하다.
이 예쁜 명월주를 精金明月珠
그대 몸에 차고 다니세요 贈君爲雜佩
길가에 혹 버린대도 아깝진 않지만 不惜棄道傍
제발 새 여자에겐 달아주지 말아요 莫結新人帶
난설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名馬常駄癡漢走 好妻多伴拙夫眠”이란 소어(笑語) 구절이 생각난다. 그의 시는 그 유명한 동생 허균이나 오라버니 허봉까지도 따를 수 없었다고 극찬을 받고 있으니, 혹시 이것이, 그 철저하던 남존여비 사회에서, 여자란, ‘오직 밥 바라지 술 바라지나 하고 바깥으로 사화(詞華)를 구해서는 안 된다.[唯酒食是議 不當外求詞華]’고 하던 그 때에 그처럼 재색(才色)이 형절(逈絶)한 여인을 보고 창자가 편치 않았을 사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그는 결국 가혹한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감내(堪耐)하지 못하고, 27세의 앳된 나이로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다음은 일대의 방랑시인 석주 권필(石洲權韠 1569~1612)이 일대의 풍류 재상 송강 정철(松江鄭澈)의 무덤에 들러서 읊은, 진정 비량(悲凉)하고 감개(感慨)로운,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이다.
잎 진 산에 우수수 비 듣는 소리 空山木落雨蕭蕭
정승의 옛 풍류가 쓸쓸하구려 相國風流此寂寥
슬프다 이 술잔을 어이 올릴꼬 惆悵一杯難更進
당신의 장진주 가락 그대로일세 昔年歌曲卽今朝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는 다음과 같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 혀 메여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萬人)이 울어 예나
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白楊) 속에 가기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고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제야
뉘우친들 어쩌리
이백(李白)의 〈將進酒辭〉는 너무 정신적이고 공허한 느낌이 들어 별로 재미가 없고, 이하(李賀)의 그것은 보다 육감적(肉感的)이고 박진(迫眞)하여 맛이 있는데, 송강의 것은 대단히 비량(悲凉) 강개(慷慨)하여 읽는 이의 가슴을 흔든다.
다음은 총계당 정지승(叢桂堂鄭之升 1580년무렵)의 〈상춘(傷春)〉이다. 오절(五絶)의 절창(絶唱)으로 영재(英才)가 환발(渙發)한 작품이다. 이 시를 당시집(唐詩集)에 넣어 최경창(崔慶昌) 등에게 보였더니 분간을 못 했다고 한다. 임제(林悌)는 이를 근세(近世)의 절창이라고 했다. 정지승은 재기(才氣)가 탕일(蕩逸)했으나 일찍 죽어 크게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이별의 한이련 듯 새파란 풀밭 草入王孫恨
고향 시름 더 하는 빨간 진달래 花添杜宇愁
나루터에 사람은 안 보이고 汀洲人不見
바람에 일렁이는 거룻배 하나 風動木蘭舟
다음은 창강 김택영(滄江金澤榮 1850-1927)의 〈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세 수 중 두 수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 격살(擊殺)만큼이나 시도 호쾌(豪快)하고 시원스럽다. 그 거들먹거리던 왜추(倭酋)를 마치 양 새끼처럼 처치해버렸으니, 세상의 내로라하는 자들도 경악(驚愕)할 밖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反共捕虜)를 석방했을 때 영국의 처칠 수상은 면도기를 떨어뜨렸다던가?
평안도 장사님 두 눈 홉뜨고 平安壯士目雙張
나라의 원수를 간단히 처치했다네 快殺邦讎似殺羊
죽지 않고 이 좋은 소식을 듣다니 未死得聞消息好
미친 듯 노래하며 마구 춤춘다 狂歌亂舞菊花傍
송골매 해삼위 항구를 누비다 海蔘港裏鶻摩空
하얼빈 역두에서 번개가 번쩍 哈爾濱頭霹火紅
오대양 육대주의 내로라는 치들이 多少六洲豪健客
한꺼번에 쩔그렁 수저를 떨어뜨리네 一時匙箸落秋風
다음은 동산 유인식(東山柳寅植 1865-1928)의 〈차야한(此夜寒)〉 십절(十絶) 중 세 편이다.
판자 집 바람 치니 이 밤 춥구나 板屋風鳴此夜寒
장엄한 기운이 가을 하늘 덮는고야 莊嚴奇氣薄秋旻
애국 청년 끓는 피 뜨겁잖으냐 定知愛國靑年血
감옥에서 얼굶어 죽은 넋 될 수는 없어 不作囹圄凍餒魂
노동하는 여러 분 이 밤 춥구나 勞動諸君此夜寒
얼음 길 눈 바다를 총알 달리듯 氷程雪海走如丸
사천 년을 이어 온 신명한 겨레 四千餘載神明族
엉뚱한 놈 채찍 아래 신음만 하랴 何忍呻吟異種鞭
이 밤 춥다 움집에서 한탄치 말라 莫恨窮廬此夜寒
땅 속에서 봄기운 차츰 스민다 地中陽復已經旬
봄바람이 이 땅을 솔솔 불오면 次第東風煽大地
마른 나무 시든 뿌리에 물이 오르리 死根枯木向欣榮
이는 지금까지의 한시(漢詩)와는 전연 그 주제(主題)가 다르다. 그는 경상도 안동(安東)의 선비로 처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나, 서울에서 신채호(申采浩)와 교유(交遊)하는 사이 눈을 뜨게 되어 삭발(削髮)하고 양복 입고 고향에 돌아가 노비(奴婢)를 해방시키고 신식 학교를 세웠다. 1913년 유교(儒敎)를 버리고 대종교(大倧敎)로 개종(改宗). 왕조(王朝)의 유민(遺民) 의식에서 탈피하여 유구(悠久)한 민족사(民族史)를 계승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고, 과거와는 전연 다른 방향에서 역사와 문학에 접근한 《大東史》와 《大東詩史》 등의 저술을 남겼다. 당시의 한문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사회주의를 고창(高唱)한 자이다.
위세는 추상같고 은의(恩義)는 태산 같으니 威如霜雪重如山
가기도 어렵고 안 가기도 어려우이 欲去爲難不去難
돌아보니 낙동강 강물이 푸르구나 回首洛東江水碧
이 몸이 위험한 곳이 이 마음은 편하리 此身危處此心安
서울의 어떤 양반이 영남의 외거 노비(外居奴婢)의 집을 찾아갔다가 젊고 예쁜 여종을 보고 흑심(黑心)이 생겨서 강제로 데리고 오다가, 낙동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종의 남편이 계속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드디어 여종은 이와 같이 시를 지어서 남편에게 주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서 이 난제(難題)를 해결하였다. 조물주는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 이 글 한학자 홍승균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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