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충무공 이순신

천하한량 2007. 6. 4. 02:56

 

 

이순신 [, 1545~1598]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본관 덕수
별칭 자 여해. 시호 충무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서울 건천동
주요저서 《난중일기》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제목 : 이순신장군 묘
사진크기 : 731*6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충남 아산시 음봉면.
관련항목 : 이순신

 

제목 : 이순신
사진크기 : 376*6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조선 중기의 무신.
관련항목 : 이순신

제목 : 이충무공신도비
사진크기 : 557*60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관련항목 : 현충사, 신도비, 이순신

 

제목 : 거북선 모형
사진크기 : 800*600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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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의 모형.
관련항목 : 전선, 거북선, 이순신, 전쟁기념관, 나대용, 한국의 조선업, 조선의 과학기술, 임진왜란

 

 

 

 

 

 

 

 

 

제목 : 명량대첩 해전도
사진크기 : 800*256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명량해전은 해상권을 상실한 칠천량해전 이후 남해안에서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린 해전으로,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명량)이 수로가 협소하고 조류가 국내에서 가장 빠른 점을 이용하였다.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하고 일자진을 펴서 왜군을 유인하여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이는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승리였다.
관련항목 : 임진왜란, 이순신, 명량대첩
제목 : 노량 해전도
사진크기 : 800*257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종결되었다. 왜장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이 철군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의 협공으로 왜군을 관음포로 유도 및 항로를 차단하여 결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전사한 이순신의 소식을 숨기고 결전한 결과 왜군은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고 도망침으로 임진왜란은 종결되었다.
관련항목 :

이순신, 임진왜란, 노량해전

 

 

 

 

 

제목 : 부산포해전
사진크기 : 800*257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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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부산포해전은 왜군의 수상 활동을 위축시키고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해전이다. 이때 전력은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한 상황이었고, 지리적 조건 역시 높은 언덕을 점유하고 있는 왜군에 비해 조선 수군은 바다에 완전히 노출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짜고 유인전술이 아닌 정공법으로 진군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꺽고 승리로 이끌었다.
관련항목 : 이순신, 임진왜란, 부산포해전

 

 

 

제목 : 사천포해전도
사진크기 : 800*256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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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사천해전은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최전방 돌격선인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하여 그 성능을 확인한 해전이었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으로 들여보내 각종 화포를 집중 발사하여 왜군을 분산시키고 사천 포구 쪽으로 몰아간 후, 만조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관련항목 : 임진왜란, 사천포해전, 이순신

 

 

제목 : 옥포 해전도
사진크기 : 800*256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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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참전한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해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한 이순신은 자신의 기함을 중심으로 횡렬로 늘어서서 왜군의 중심부를 공격하여 결국 일본의 도도다카토라의 함대 26척을 격침하여 최초의 승리를 장식하였다.
관련항목 : 임진왜란, 이순신, 옥포해전

 

 

제목 : 일자진
사진크기 : 800*259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해상 전술로 횡렬 일자로 늘어선 진형을 말한다.
관련항목 : 이순신, 명량대첩

 

 

제목 : 첨자찰진
사진크기 : 800*261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해상전술로 많은 배들이 이동하거나 적군을 공격하기에 용이한 형태의 진형이다.
관련항목 : 이순신

 

 

제목 : 학익진
사진크기 : 800*250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조선 수군이 즐겨 쓰던 정(丁)자 타법을 개량한 것으로 학이 날개를 펴듯 적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진형이다.
관련항목 : 한산도대첩, 이순신

 

제목 : 한산도대첩 해전도
사진크기 : 800*257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3대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 이를 통해 왜의 수륙병진정책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견내량이 협소하여 해전에 적합하지 않음을 파악하고,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치며 왜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관련항목 : 이순신,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제목 : 이순신동상
사진크기 : 800*533 (원본사진보기)
출처 : © ys
설명 :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관련항목 : 이순신

 

 

제목 : 사제문
사진크기 : 800*533 (원본사진보기)
출처 : © encyber.com
설명 : 경남 통영시 충렬사. 사제는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주는 것이다. 정조가 1795년에 하사한 제문.
관련항목 : 이순신, 정조, 통영 충렬사

 

 

제목 : 충무공전서
사진크기 : 800*533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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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경남 통영시 충렬사. 1795년 정조가 발간하였다.
관련항목 : 통영 충렬사, 이순신

 

 

제목 : 이충무공전진도
사진크기 : 800*219 (원본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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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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