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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녹이는 마음

천하한량 2007. 5. 29. 14:59




인과를 믿고
업보를 믿는 수행자라면
삶의 경계를 대하는 방식이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불교를 믿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만큼 나의 삶이 변해야 하고,
또한 내가 공부한 만큼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의 믿음이란
첫째가 내 근본자리, 자성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며,
또 한가지는 인과에 대한 굳음 믿음입니다.

인과에 대한 믿음은
현상세계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며,
자성불에 대한 믿음은
근본세계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생활속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생활수행자라면
마땅히 인과를 그리고 업보를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쉽게 인과를 업보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은 드문 듯 합니다.
굳게 믿는다면 확고히 실천할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과를 실천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실천을 해야 한다는 말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인과를 믿는 수행자의 실천에 대해서 말입니다.

[잡아함경] 권13에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루나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
민심이 몹시 흉악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들로 득실대는
수나파란타카 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쪽 지방 사람들은 사나우니, 욕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때린다면 어찌하겠느냐?”
“몽둥이나 돌로 치지 않음을 다행으로 알고 감사하겠습니다.”
“몽둥이나 돌로 친다면 어찌 하겠느냐?”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감사하겠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어찌 하겠느냐?”
“열반에 들게 해주는 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부루나 존자가 포교의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부루나 존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때리고 설령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성을 내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감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과를 믿는 수행자의 실천행인 것입니다.
나를 욕하고 해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행위는 내 안에 있는 업식의 나툼일 것입니다.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악업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나에게 욕을 하고 때림으로써
내 안에 있던 악업을 소멸시켜 준 고마운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맞대응하고 함께 욕하고 싸운다면
그것은 내 안의 업식을 오히려 더욱 키우는 꼴이 되고 말지만,
상대방의 욕과 폭력에 응대하지 않고 마음을 놓아버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내 안에 있던 업은 그 자리에서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또 다른 업을 지은 것이 됩니다.
상대방은 자신이 욕과 폭력이라는 구업과 신업을 지으면서까지
나의 업을 녹여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상대방에게 오히려 고마워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인과를 바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
상대방은 그런 행위, 업을 저질렀으니
상대방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 수행자라면
거칠고 괴로운 경계, 즉 역경을 대할 때
바로 이 두 가지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자비로운 마음이며,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참으로 수행자라면
그 어떤 사람이 그 어떤 욕설을 하던지,
육신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던지
설령 죽이려고 달려든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그 사람을 측은한 마음을 내고 자비심을 일으키며,
또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수행자를 죽이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과보를 받겠습니까.
지옥에 빠지는 과보를 받으면서까지
나의 업보를 녹여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내 앞에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이렇게 돌릴 수 있어야 참으로 수행자입니다.
그래야 업을 녹이며 사는 수행자인 것입니다.

역경이 다가온다는 것은
내 업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업의 과보를 받을 때는 괴롭게 마련입니다.

괴로움을 당함으로써 악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괴로움의 과보를 받으면서
인과를 모르다보니 괴로움을 준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상대방과 욕하고 싸움으로써
또다른 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괴로움의 과보를 받을 때
그 때 그 과보를 온전히 받고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
그 자리에서 온전히 업을 녹이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업을 녹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한 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의업이 되어 또다른 업을 만들 것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 자리에서 업을 녹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상대방의 거친 행위에
흔들림이 없으며 평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악업의 과보를 받는 순간 녹일 수 있게 되며,
또한 상대방에게 감사하고 자비심을 일으킴으로써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는 큰 복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업을 자꾸 짓고 사는 사람이고,
수행자란 업을 녹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중생이란 역경에 닥쳐 그로인해 또 다른 업을 짓는 사람이며,
수행자란 역경을 통해 업을 녹이고 복을 짓는 사람입니다.
중생에게 역경은 괴로움이지만,
수행자에게 역경은 참으로 고마운 경계가 됩니다.

마음 닦는 수행자의 마음은
이렇듯 감사하는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이 근본입니다.
역경이 이와 같이 감사한 경계일진데
순경과 범사(凡事)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대를 대할 때,
경계를 대할 때,
늘 감사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경계를 대하는 이 두 가지 마음이
온갖 업장을 녹이는 수행자의 닦는마음이며 밝은마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갈 때
내 마음 속의 업식이 하나 하나 닦이고
마음 속의 번뇌와 집착이 하나 하나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텅 비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목탁소리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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