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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을 꺾는 뜻은, 漢詩의 情韻味

천하한량 2007. 5. 15. 16:56
버들을 꺾는 뜻은, 漢詩의 情韻味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南浦의 비밀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을 보태나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너무나도 유명한 鄭知常의 〈送人〉이란 작품이다. 필자는 이 시만 보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첫 시간에 배웠던 이수복 시인의 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를 외우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동강 가 練光亭에는 고금의 시인들이 지은 題詠詩가 수없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오면 모두 걷어 치우고 정지상의 이 작품만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보이기가 마땅치 않았지만, 이 작품만은 중국에 내 놔도 손색이 없겠다는 자신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과연 이 시를 본 중국 사신들은 하나 같이 神韻이라는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정지상의 〈送人〉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떠난 이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는 엄살은 허풍스럽기는 커녕 그 곡진한 마음새가 콧날을 찡하게 한다. 이 섬세한 詩心만으로도 과연 神韻絶唱의 감탄은 있음직 하다. 그러나 중국 사신들이 결정적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2구의 '送君南浦'라는 표현에 있었다. 이 구절은 흔히 님을 南浦로 떠나 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해석하여, 남포를 대동강이 황해와 서로 만나는 진남포 쯤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그런 것이 아니라 南浦는 현재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소이다.

南浦란 단어에는 유장한 연원이 있다. 屈原은 일찍이 〈九歌〉 중 〈河伯〉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사랑하는 님을 남포에서 보내네. 子交手兮東行, 送美人兮南浦"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뒤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東浦이든 西浦이든 北浦이든 간에 南浦라고 말하곤 했으므로,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南浦'란 말은 중국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情韻이 담긴 말이 되었다.

江淹은 그의 〈別賦〉에서 "봄 풀은 푸른 빛, 봄 물은 초록 물결,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픔을 어이 하나. 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라 했고, 武元衡은 〈鄂渚送友〉에서 "강 위 매화는 무수히 떠지는데, 南浦서 그대 보내니 안타까워라. 江上梅花無數落, 送君南浦不勝情"라고 노래하였다. 두 작품 모두에서 '送君南浦'라는 넉 자를 찾아 볼 수 있다. 또 孟郊는 〈別妻家〉에서 "부용꽃은 새벽 이슬에 함초롬 젖었는데, 가을 날 南浦에서 헤어지누나. 芙蓉濕曉露, 秋別南浦中"라고 했고, 白居易도 〈南浦別〉에서 "南浦의 구슬픈 이별, 서풍에 나부끼는 가을. 南浦凄凄別, 西風婣婣秋"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정지상의 '送君南浦'라는 표현이 중국 사신들에게 일으켰을 정서적 換起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杜甫는 일찍이 〈奉寄高常侍〉에서, "하늘 가 봄 빛은 저물기를 재촉는데, 이별 눈물 아득히 비단 물결에 보태지네. 天涯春色催遲暮, 別淚遙添錦水波"라고 노래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제 4구의 '別淚年年添綠波'도 또한 두보의 구절을 換骨脫胎한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1구에서는 비가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곱다고 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긴 둑에 봄비가 내리자, 그 아래 어느 새 파릇파릇 돋아난 봄 풀이 마치 갑자기 땅을 헤집고 나온 것처럼 제 빛을 찾았던 것이다. 지루했던 겨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리는 봄비를 맞는 마음은 설레이는 흥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으니, 그 悽愴한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김동환은 〈강이 풀리면〉에서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님도 탔겠지. 님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라고 노래한 바 있다. 봄이 오면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이 풀리듯 내 마음의 시름이 풀려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나는 거꾸로 님을 떠나 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시 고려가요 〈動動〉의 제 2연을 떠올린다. "正月걁 나릿 므른 아으 어져 녹져 폁논韡, 누릿 가운韡 나곤 몸하 폁올로 녈셔. 아으 動動다리." 정월의 강물은 녹으려 하는데, 그와 같이 내 시름을 녹여줄 님은 오실 줄 모르고 나는 어이해 한 세상을 홀로 살아가느냐는 탄식이다.

대동강 물이 어느 때 마르겠느냐는 3구는 좀 엉뚱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강물 마르는 이야기냐 말이다. 한시의 起承轉結 구성이 갖는 묘미가 바로 이 대목에서 한껏 드러난다. '起'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承'은 이를 이어 받아 보충하는 것이다. '轉'에서는 詩想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는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 할 때, 4구 結에 가서 그 단절을 메워 묶어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게 된다. 3구에서 강물 타령으로 화제를 돌려 놓고, 4구에 가서 설사 강물이 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다 마를지라도, 강가에서 이별하며 흘리는 눈물이 마르기 전에는 강물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앞서 '白髮三千丈'과 같은 詩歌 언어의 과장을 말한 바 있지만, 눈물을 제 아무리 많이 흘린다 한들 도대체 그것이 대동강의 流量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를 두고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과장은 시인의 슬픔이 그만큼 엄청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이 시는 下平聲인 歌韻을 쓰고 있다. 이 韻目에는 '歌て多て羅て河て戈て波て荷て過' 등 시에서 자주 쓰이는 韻字가 많이 포진하고 있어, 고금의 시인 치고 이 韻으로 작시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으니, 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얻어 내기란 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 작품 뒤로도 아예 '多て歌て波'의 운을 그대로 써서 차운한 시가 적지 않으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얻기 어렵다. 이제 와서 韻字는 한시 감상에 있어 고려의 대상이 안되게 되었지만, 중국 사신의 찬탄 속에는 앞서 南浦가 주는 神韻 위에, 이러한 韻字 사용의 산뜻함도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필시 뒷 사람의 부회일 듯 싶지만, 정지상이 紅粉이란 기생과 헤어지며 지었다는 이 시는 뒷 날까지 재미 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조선 시대 어떤 서울 나그네가 평양감사로 있던 친구를 찾아가 노니는데, 기대에 비해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 술맛은 꼭 맹물 맛인데다가 수청하는 기생은 이별의 즈음에도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이래저래 서운했던 그는 감사를 향해 다짜고짜 "대동강 물이 며칠 못 가서 마르겠네."라고 하였다. 감사가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인가?"하고 되묻자, 서울 나그네 왈, "술잔에는 添酒의 물이 있는데, 사람은 添波의 눈물이 없으니 어찌 강물이 마르지 않겠는가?" 참으로 야무진 독설이다. 친구 대접하는 감사의 눈치가 빤하니 기생인들 무슨 애틋한 정이 있었으랴 만은, 술에 타느라고 강물은 소모하면서 계집은 이별의 눈물이 말랐으니, 과연 대동강 물은 여태도 마르지 않고 잘 흐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古今笑叢》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후대의 기림도 자못 떠들썩하다. 申光洙는 "그때 南浦서 님 보내던 그 노래, 천년 절창 鄭知常이라. 當日送君南浦曲, 千年絶唱鄭知常"이라고 했고, 申緯는 〈論詩絶句〉에서 李穡의 〈浮碧樓〉시와 함께 나란히 세워 이렇게 기리었다.

바람 부는 산비탈서 휘파람 불던 牧隱翁
푸른 물결 위에다 눈물 보태던 鄭知常.
호방함과 아름다움 우열 가리기 어려워라
늠름한 장부 앞에 정숙한 아가씨라.
長嘯牧翁依風岉
綠波添淚鄭知常
雄豪艶逸難上下
偉丈夫前窈窕娘

1구는 牧隱이 "길게 휘파람 불며 산비탈에 기대었자니, 산은 푸르고 강은 홀로 흐르도다. 長嘯依風岉, 山淸江自流"라 한 데서 따온 것이다. 목은의 웅장하고 호방한 기상과, 정지상의 艶麗하고 飄逸한 풍격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가늠키는 어려우니, 비유하자면 헌헌장부 앞에 요조숙녀가 수줍게 서 있는 격이라는 기림이겠다.

버들을 꺾는 마음

金萬重도 《西浦漫筆》에서 정지상의 위 작품을 두고 우리나라의 '陽關三疊'이라 하였다. '陽關三疊'이란 저 유명한 王維의 〈送元二使之安西〉가 널리 喧傳되어 樂曲으로 편입된 뒤의 이름이니, 결국 이에 버금가는 이별 노래의 절창이란 뜻이다.

渭城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 적시니
객사엔 파릇파릇 버들빛이 새롭고야.
그대에게 다시금 한 잔 술 권하노라
陽關을 나서면 아는 이 없을지니.
渭城朝雨湎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安西 땅으로 사신 가는 벗 元二를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渭城은 당나라 때 수도인 長安의 서쪽,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편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이른바 실크로드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당나라 때 長安에는 동쪽에는 硴橋가 있고 서쪽에는 渭橋가 있어, 동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硴橋에서, 서쪽으로 길 떠나는 나그네는 渭橋에서 전별의 자리를 가졌다. 陽關은 지금의 甘肅省 敦煌縣에 있다. 당시에는 西域과 수 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황량한 사막 길을 오가는 발걸음이 끊일 새 없었다. 시인들은 이 길을 오가며 悲愴한 塞下의 노래를 불러 오늘까지 전하는 名篇이 적지 않다.

그러면 이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역시 여기서도 새봄을 재촉하는 비 속에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아침부터 내린 보슬비로 사람이 지날 때마다 길 위로 풀풀 날리던 먼지도 차분히 가라 앉았다. 그러나 실제로 촉촉히 젖은 것은, 흙먼지이기 보다 사랑하는 벗을 멀리 떠나 보내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비에 씻기어진 버들 잎은 아연 푸르다. 버들을 보면서 시인은 이별을 예감하고, 다시금 한 잔 술을 권하고 있다. '다시금(更進)'이라 했으니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거나해질 만큼의 대작이 오갔을 것은 揚言이 부질 없다.

척박한 땅, 인적도 없는 사막을 지나 아득한 安西 땅까지 가야 할 벗이 이제 말에 오르려 한다. 이별이 아쉬운 시인은 "내 잔 한잔 더 받고 가게." 하면서 소매를 잡아 끈다. 陽關 땅을 나서고 보면 이제 다시는 한 잔 술을 권해 줄 벗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붙잡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우리 옛 시조에,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란 것이 있다. 바로 이 정황에 꼭 맞을 듯 하다.

2구에서 파릇파릇한 버들빛을 헤아리며 이별을 예감했다 하였는데, 당나라 때 벗과 헤어질 때는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折柳', 즉 '버들 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南浦'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므로,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 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던 것이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홍랑의 시조에,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계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당나라 때 시인 儲嗣宗은 〈贈別〉에서, "東城엔 봄 풀이 푸르다지만, 南浦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 東城草雖綠, 南浦柳無枝"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南浦'와 '버들'이 모두 이별을 상징하는 어휘로 동시에 쓰이고 있다. 봄이 와서 풀은 푸른데,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려 해도 이미 하많은 사람들이 죄다 꺾어 버려 남은 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내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이별의 징표로 꺾이어짐 얼마던고.
숲 아래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듯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烟楊有地拂金絲
幾被行人贈別離
林下一蟬椛別恨
曳聲來上夕陽枝

고려 때 시인 金克己의 <通達驛>이란 작품이다. 역시 버들가지가 이별의 징표로 쓰이고 있는 예이다. 1구에서 '烟楊'이라 했으니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봄날임을 알겠다. 파릇파릇 물 오른 버들개지의 여린 초록 빛을 '金絲'로 표현한데서 이점은 더 분명해진다. 그 여린 가지는 푸른 잎을 달아 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의 손에 수도 없이 꺾이었다. 헤어지는 장소가 驛站이고 보니, 으레 수많은 이별을 이 수양버들은 지켜 보았을 게고, 그 많은 사람마다 한 두 가지씩 꺾어 재회에의 바램을 실어 보냈을 것이다.

3구에 가서 시인은 갑자기 매미를 등장시킨다. 매미란 본시 버들가지에 물 오르는 아지랑이 봄날에 우는 곤충이 아니다. 春蝶秋蟬이란 말이 있듯, 봄날의 꽃밭을 넘나드는 것이 나비라면, 매미는 여름도 깊어 가을이 오는 어스름께에야 비로소 목청이 훤히 트이는 법이다. 이로 보아 1.2구와 3.4구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단절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봄날 아지랑이 속에 한번 떠난 님은 매미가 목청을 틔우는 여름이 다 가도록 돌아올줄 모르고, 그녀는 부질 없이 이렇게 날마다 驛站에 홀로 나와 하릴 없는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3구에서 '林下'라 했으니,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이 저 아래로 숲이 내려다 보이는 꽤 높은 곳임을 알겠다. 하루 종일 덧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이제 누가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숲 저편으로 기다리는 님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해만 속절 없이 뉘엿뉘엿 지려 하고 있다. 바로 이때, 아래 숲에서 울던 한 마리 매미가 상향 곡선을 그으면서 그녀가 서 있는 나무 위로 날아든다. 마치 매미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잘 알겠다는 듯이, 그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다. 숲 아래에 있던 매미가 위로 올라온 것에서 시인은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가 더 멀리 바라보고픈 그녀의 마음을 포착한다. 그녀는 지금 저렇듯 해가 지고 마는 것이 원망스럽고 아쉽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님은 영영 안오고, 내 청춘의 때도 그렇듯 한숨 속에 시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이제 매미의 목청 푸른 울음소리만 아무도 오지 않는 적막한 허공 위로 가득히 메아리치고 있다. 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님은 들으시는가, 듣지 못하시는가. 청마 유치환의 <待人>이란 시에, "나날은 훠언히 하늘만 뜨는 것, 재 너머도 뱃길로도 아무도 안 오는 것. 한 잎 두 잎 젊음만 꽃잎지는 것"이라 하였는데, 古今의 詩想이 한 솜씨 같다.

지난 해에 신문에서 어느 조경학자가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草木의 빈도수를 조사하여 통계낸 결과를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소나무도 국화도 아닌, 바로 버드나무였다. 그분은 이 결과를 놓고 결국 버드나무가 우리 생활 공간 가까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시인들이 친근하게 여겨 빈번하게 시의 제재로 쓰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비전문가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시에서 버드나무가 빈도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봄날의 서정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제일 많았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된다. 다음 林悌의 시를 보면 이점은 더욱 확연해진다.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님 못 잡았네.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탓이런가
부연 물결 지는 해도 수심에 겨워 있네.
離人日日折楊柳
折盡千枝人莫留
紅袖翠娥多少淚
烟波落日古今愁

제목이 〈浿江曲〉이니, 쉽게 말해 '대동강 노래'이다. 모두 10수의 연작인데, 윗 시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별하는 사람들은 재회에의 염원 때문에 날마다 대동강변에 나와서 떠나는 님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보낸다. 허구 헌 날 꺾다 보니 대동강 버드나무는 아예 대머리가 될 지경이다. 그래 보았자 떠나려는 님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신 님이 돌아오는 것도 못 보았다. 보내는 사람은 이별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님이 오지 않아서 눈물을 떨군다. 그러고 보면 앞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던 정지상의 말은 빈 말이 아닐 터이다. 그녀들의 하염 없는 기다림이 안스러워, 강물 위엔 한숨인 양 안개가 짙어 있고 눈물인 듯 강물은 넘실거린다.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마저도 수심을 보태고 있다.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이왕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시에서 사랑과 연관되어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어휘를 더 살펴 보자. '秋扇' 즉 가을 부채가 그것이다. 예전에도 한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은촉불 가을 빛은 병풍에 찬데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銀燭秋光冷畵屛
輕羅小扇搏流螢
天際夜色凉如水
坐看牽牛織女星

杜牧의 〈秋夕〉이란 시이다. 가을 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방 안에는 은촉불이 타고 있고, 방에는 화사한 그림 병풍이 둘려 있다. 그녀의 손에는 가벼운 비단 부채가 쥐어져 있다. 한 눈에도 매우 넉넉한 귀족풍의 규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제목을 '가을 저녁'이라 하고, 3구에서 밤빛이 물처럼 싸늘하다 해 놓고서,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고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 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는 없지 못할 소중한 물건이다. 그러나 더위가 물러가고 소매가 선듯한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 하며 손에서 놓지 않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혀져 버려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때 나를 너무도 다정하게 사랑해주던 그 님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서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님에게 버림 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홀로 지새는 깊은 가을 밤, 달마저 져 버린 창 가로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옛 사람은 풀이 냣어서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은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것인데, 그 반딧불이 그녀의 창가를 날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딧불을 부채로 후려 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 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 가!" 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엄연한 현실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처럼 싸늘한 하늘은 밤이 어느덧 깊었음을 말하며, 앉아서 별을 바라 본다 함은 아예 그녀가 잠 잘 생각을 버리고 근심에 겨워 긴긴 가을 밤을 새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는 별은 무엇인가. 견우와 직녀성이다. 그들은 그래도 일년에 칠월 칠석 하루는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는 어떠한가. 님은 한 번 떠나신 뒤로 돌아올 줄 모르고, 이 기나긴 기다림이 끝없이 이어져도 다시 님을 만날 날은 영영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러한 초조감과 절망감이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위에 서리어 있다.

가을 부채가 버림 받은 여인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것은, 한 나라 때 班疃樶가 지은 〈怨歌行〉이란 작품 때문이다.

제나라 고운 비단 새로 자르니
깨끗하기 마치 눈 서리 같구나.
말라서 합환선을 만들었는데
밝은 달 모습처럼 둥그렇구나.
님께서 출입할 제 손에 들고서
흔들흔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네.
언제나 근심키는 가을이 와서
싸늘한 바람이 무더위 앗아가면,
고리 속에 깊숙히 내던져 져서
사랑하심 중도에 끊어질까 함일세.

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棄捐笆擞中
恩情中道絶

제나라의 질 좋은 흰 비단을 잘 말라서 둥근 合歡扇을 만들었다. 이를 님께 드리니 님은 늘 품 속에 지니시며 더울 때마다 부치신다. 그러나 혹 가을이 되어 더위가 수그러 들면 님께서 이를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이다.

이 밖에 王昌齡은 〈西宮秋怨〉에서 "누가 울음 삼키며 가을 부채로 얼굴 가리고, 허전히 걸린 달빛 아래 임금을 기다리나. 誰分含啼掩秋扇, 空懸明月待君王"라 하였고, 당나라 때 어느 궁녀는 〈題洛苑梧葉上〉, 즉 洛陽 宮苑 오동잎 위에다 쓴 시에서 "묵은 총애는 가을 부채를 슬퍼하고, 새로운 은총은 이른 봄에 부치었네. 舊寵悲秋扇, 新恩寄早春"라 하여 잊혀진 자신과, 새로 총애받는 여인을 대비하여 노래하였다. 劉雲은 또 〈班疃樶〉에서 "임금 은혜는 볼 수 없으니, 첩의 신세 가을 부채만도 못해요. 가을 부채는 오히려 다시 찾을 날 있겠지만, 첩의 몸은 영영 잊혀 졌으니. 君恩不可見, 妾豈如秋扇. 秋扇尙有時, 妾身永微賤"라고 하였다. 모두 '秋扇' 즉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에 견준 예들이다.

그때에 괴임 받음 말하지 마오
가을 들어 영락하니 시든 연잎 같구려.
뜰 가득한 서리 이슬 칩기가 이러한데
맑은 바람 있다 한들 어찌 하리오.
莫道當時恩愛多
秋來零落似殘荷
滿庭霜露寒如許
縱有淸風可奈何

權擘의 〈題秋扇〉이다. 가을 부채가 갖는 정운의를 십분 활용하였다. 그러나 행간에 담긴 뜻은 염정이 아니라 풍자다. 지금은 서리 이슬 내리는 추운 가을 날이다. 설사 맑은 바람을 지녔다 한들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서리 맞아 시든 연잎 같은 한 때의 恩愛는 말하지 말라. 인간의 부귀영화도 그렇듯 하릴 없는 것이다.

우리 고려가요 〈動動〉에 보면, "六月걁 보로매, 아으 별해 ꟁ룐 빗 다호라. 도라 보실 니믈 륢곰 좃니노이다. 아으 動動다리."라 한 것이 있다. 머리를 많이 빗어 이빨이 빠진 빗, 쓸모 없어 버린 그 빗처럼 님이 나를 버리셔도, 나는 님이 나를 돌아보실 때까지 언제나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그러고 보면 가을 부채만이 버림 받은 여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난간에 기대어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중에 하나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댄다는 표현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登樓', '倚樓', '倚欄' 혹은 '憑欄' 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난간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곳에 올라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李璟이 〈탄破浣溪沙〉에서 "보슬비에 꿈을 깨니 닭울음 소리 아득하고, 작은 누대 위에서 부는 젓대 소리 서늘해라. 구슬처럼 지는 눈물에 恨은 끝이 없어, 난간에 기대이네. 細雨夢回鷄塞遠, 小樓吹徹玉笙寒. 多少淚珠無限恨, 倚欄杆."이라 한 것이나, 李煜이 〈浪淘沙令〉에서 "홀로 난간엘랑 기대질 마오. 끝없는 강산, 헤어지긴 쉬워도 만나보긴 어렵나니. 獨自莫憑欄, 無限江山, 別時容易見時難."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松江 鄭澈이 〈思美人曲〉에서 "폁鿁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醉제, 危樓에 혼자 올나 水晶簾 거든 말이, 東山의 달이 나고 北極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그동안 소식은 어떠하온지
하루 밤 그리움에 머리가 다 쇠겠네.
난간에 홀로 기대 잠 못 드는데
주렴 밖엔 성근 댓닢 치는 빗소리.
向來消息問如何
一夜相思撗似華
獨倚雕欄眠不得
隔簾疎竹雨聲多

金堉의 딸이 지은 〈相思〉란 작품이다. 님께 소식이나 전하려고 '그간 어떠하신지요'라고 말하고 나자 그만 목이 메이고 만다. 창 밖에선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주렴 밖 대 숲에선 빗 줄기가 댓닢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비 오는 밤 님을 향한 하염 없는 그리움은 그녀의 머리칼을 하루 밤 사이에 백발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다. 깊은 밤 그녀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예 누각 위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다. 댓닢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도 님의 발자욱 소리인 것만 같다. 혹시나 싶어 발을 걷어 보지만, 댓닢에선 빗물만 눈물인양 뚜욱 뚝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검은 머리 곱게 빗고 누각에 기대
쇠 피리 빗겨 부는 부드러운 손.
관산월 한 가락에 그대 그리워
두 줄기 맑은 눈물 떨구었다오.
雲簠梳罷倚高樓
鐵笛橫吹玉指柔
萬里關山一輪月
數行淸淚落伊州

姜渾이 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준 〈呈星州妓〉란 작품이다. '關山月' 구슬픈 피리 곡조에 얼음 같이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가녀린 손가락도 아지못할 슬픔에 하릴 없이 곡조 속으로 잠겨만 간다. 윤기 나는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서 누각에 기대 앉아 피리 부는 여인. 피리 소리는 달에까지 사무치고, 그 소리에 달빛 조차 흐느끼며 서쪽 나라로 떠내려 간다. 네째 구의 '落伊州'는 당나라 때 어느 여인이 멀리 벼슬살이 가서 소식조차 없는 님을 그리며 지었다는 〈伊州令〉이란 노래에 출전을 둔 말이다. 여기서도 '倚樓'는 그리움의 情韻을 담고 있다.

그대는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날마다 그댈 그리며 翠樓에 오릅니다.
芳草 우거질수록 버들은 늙어가고
석양엔 쓸쓸히 흐르는 강물 뿐이어요.
君居京邑妾楊州
日日思君上翠樓
芳草漸多楊柳老
夕陽空見水西流

조선 중기의 시인 崔慶昌의 〈無題〉란 작품이다. 대개 한시에서 '無題'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讀詩를 요구하기 위함이다. 또한 無題詩는 李商隱 이래로 艶情風의 분위기를 담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 계신 님을 그리며 날마다 부질 없이 누각에 오르는 여인의 하소연을 담았다. 누각에서 내려다 보면 芳草는 날마다 더욱 푸르러 가는데, 님과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가지를 꺾어 주었던 버드나무는 날로 늙어만 간다. 즉 꽃다운 봄날은 어느덧 가버리고, 계절은 여름의 繁華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님은 오실 줄 모르니, 이 아니 안타까우랴. 그녀는 날마다 누각 위에 올라 목을 빼어 님 계신 곳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날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길로 뚜벅 뚜벅 걸어오시는 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슬픔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물 뿐이다. 또한 한시에서 '가는 봄'은 아름다운 청춘의 때가 스러짐을, 좋은 시절이 다 가버림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못 가엔 芳草가 우거져 푸르르니
이별의 恨, 심란하여 길 잃어 버리겠네.
생각하매 洞房은 봄에 적막했었지
살구꽃 떨어지고 소쩍샌 울었었지.
江潭芳草綠瓩瓩
別恨幹人路欲迷
想得洞房春寂寞
杏花零落子規啼

역시 〈無題〉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지은이는 權禝이다. 이 작품에서도 무성하게 짙어오는 芳草가 이별의 한과 맞물려 노래되고 있다. 기억 속의 희미한 봄날에도 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살구꽃은 뜨락에서 적막하게 꽃잎을 떨구고, 소쩍새는 밤마다 피를 토하듯 울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봄이 가기 전에 님이 내 곁으로 돌아오시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님은 봄이 다 가고, 초록이 짙어오는 여름이 되도록 돌아올 줄 모르고, 상심한 그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들길을 헤매이고 있다. 여기서도 '가버린 봄'은 실제로는 스러져 버린 그녀의 청춘의 때로 그려지고 있다.

저물녘의 피리 소리

예전 晉나라 때 向秀는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다. 뒤에 七賢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 후 예전 함께 노닐던 山陽 땅 옛 벗의 집을 지나다가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사무쳐 〈思舊賦〉를 지었다. 이후 석양 무렵의 피리 소리는 지나간 옛날을 그리워 함, 또는 가고 없는 벗을 그리워 함의 의미가 되었다.

그 때에 쫓겨간 이 몇 이나 남았던고
봄바람에 말 세우니 홀로 애가 끊는다.
안개 비 자욱한 개산 한식 길에서
저물녘 피리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當時逐客幾人存
立馬東風獨斷魂
烟雨介山寒食路
不堪聞笛夕陽村

申光漢이 참판 金世弼의 옛 집을 지나며 지었다는 시다. 김세필은 기묘사화 때 趙光祖를 賜死한 일의 부당함을 중종에게 간하다가 귀양 갔던 인물이다. 돌이켜 보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말 한 마디 거스르면 쫓겨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벅찬 세월이었다. 하나 둘 떠나가고, 새로 맞은 봄 바람 앞에 나 홀로 가슴 아프다. 介子推의 넋을 기려 찬 밥 먹는 한식 날, 문득 그대 그리워 그대 옛집 찾았으나 그대 자취 찾을 길 없고, 저물녘 피리 소리만 그리움의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玄湖朠談》에 보인다.

저물녘 강물 위엔 피리의 소리
보슬비 맞고서 강 건너는 이.
남은 소리 아득히 찾을 길 없네
나무마다 봄 맞아 강 꽃이 폈다.
夕陽江上笛
細雨渡江人
餘響杳無處
江花樹樹春

白光勳의 〈陵曨臺下聞笛〉이란 작품이다. 저물녘 피리 소리엔 그리움이 묻어 있다. 보슬비에 그리움을 묻혀 강을 건너 가는 사람.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 소릴까? 허공은 그 소리를 삼켜 버린다. 陵曨臺 위인가 올려다 보니 피리 부는 사람은 보이질 않고, 나무마다 강 꽃이 활짝 폈구나.

봄 바람에 옥피리 낙양성을 울리니
애 끊는 그 소리 차마 듣기 어려워라.
만발했던 매화도 다 떨어지고
강물 같은 푸른 하늘 달이 밝구나.
春風玉笛洛陽城
腸斷難堪聽一聲
滿樹梅花零落盡
碧天如水月輪明

權擘의 〈春夜聞笛〉이다. 삘릴리 피리 소리가 낙양 밤 하늘에 울려 퍼진다. 가고 없는 옛 친구가 문득 그립다. 그리움 담아 활짝 핀 매화꽃도 떨어지니 내 마음 허전하여 둘 데 없는데, 올려다 본 하늘엔 달이 떴구나. 그리운 벗의 얼굴이 거기 있구나.

봄 그늘 아득해라 해도 지려 하는 때
빈 골목 사람 없고 참새만 조잘댄다.
山陽 땅 옛 벗은 아무도 없어
피리 소리 없어도 애가 녹는다.
春陰漠漠向黃昏
空巷無人雀自喧
獨有山陽舊犾侶
不聞隣笛也消魂

權禝의 〈過城山具容宅〉 두 수의 둘째 수이다. 세상을 떠난 벗의 옛 집을 지나다가 앞서 向秀의 고사를 떠올린 것이다. 석양 무렵 쓸쓸히 가고 없는 벗의 옛 집을 찾았다. 주인 잃은 골목은 텅 비었고, 참새가 제 집처럼 떼를 지어 시끄럽다. 막막한 것은 봄 그늘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예전 같이 놀던 벗들은 어디 있는가? 나 홀로 여기 서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없어도 스산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앞서 어떤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 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情韻이 얹히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南浦'나 '折柳', 그리고 '秋扇'과 '倚樓'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한시에는 이런 情韻이 풍부한 어휘들이 유난히 많다. 한시의 언어 특성 상 이러한 어휘들은 詩歌 언어의 함축을 더욱 유장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시 감상에 있어 이러한 어휘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하게 읽어 시의 의미를 곡해할 염려가 크다.

대개 특정의 어휘가 情韻을 머금게 되는 과정에는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내적인 교감이 전제된다. 같은 어휘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혀지는데, 외국시를 읽을 때는 특히 이 점이 어렵다. 말하자면 이러한 어휘들은 詩歌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의 이해를 통해서만이 그 詩歌에 올바로 접근하는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시도 오늘의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는 詩歌 양식이 되고 말았다. 요즘 시인들이 번역서를 통해 한시에 접근해 보려 하다가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을 놓고 마는 것은, 번역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바로 이러한 정서 교감의 단절에서 기인한 바 크다.

예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불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시인에게 한국의 대표시라고 소개했더니,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菊花 하면 "桃李야 곶이온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나, "아마도 傲霜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등의 예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 왔다. 그러기에 "머나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자연스런 변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프랑스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는 언술이 "봄부터 죽으려고 작정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의미 쯤으로 접수되었을 법 하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죽지 못해 아우성이로군!"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감동이 피어나겠는가.

무궁화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궁화를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라고 하여, 저녁 때 졌는가 싶으면 다음 날 아침 어느새 나무 가득 꽃을 피우는 그 모습에서 '無窮'의 의미를 읽어, 나라꽃으로 기리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 사람들은 이를 '朝開暮落花', 즉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라 하여 인간의 덧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폄하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무궁화 운동가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무궁화 시가 별반 없음을 통탄하여, 중국 시인이 노래한 무궁화 시를 잔뜩 모아 보았자, 자신이 바라는 무궁화를 예찬한 노래는 한 수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孟郊가 〈審交〉에서, "소인배 같은 槿花의 마음, 아침엔 있다가도 저녁엔 없네. 小人槿花心, 朝在夕不存"라 한 것이나, 白樂天이 〈放言〉에서 "천년 사는 소나무도 종당에는 냣어지고, 무궁화는 단 하루 삶을 홀로 영화롭게 여기네. 松樹千年終是朽, 槿花一日自爲榮."라 한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금 딴 이야기지만, 무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둘 말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무궁화에다가 '눈에피꽃'이니 '개똥꽃'이니 '부스럼꽃'이니 하는 더러운 이름을 붙여 제 손으로 이를 뽑게 하고, 대신 그 자리에 사쿠라 꽃을 심어 놓았다. 3.1 운동 직후 사이또란 자가 총독이 되어 부임했을 때, 第一聲이 "사나이가 되려면 사무라이가 되고, 꽃이 되려면 사쿠라 꽃이 되라"는 것이었다던가. 그래서 昌慶宮에도 鎭海에도 忠武에도 사쿠라가 잔뜩 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충무공의 호국얼을 선양한다는 단체의 주관으로 해마다 ꓹ꽃 축제가 열리고, 신문은 아무 생각 없이 "충무공의 얼이 깃든 진해시에 벗꽃 축제 만발"을 헤드라인으로 뽑고 오늘이다. 이것은 만발이 아닌 '망발'이다. 이제 와서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자는 것이 흠 될 것은 없겠다. 그렇기는 해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던 충무공의 얼이 깃든 그곳에, 누가 사쿠라를 그렇게 잔뜩 심어 놓았는지는 알아 두어야겠기에 하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면 꽃에 대한 관념도 이렇듯 희미한 기억 속으로 지워지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앞서의 조경학자가 버들의 은유를 이해 못하는 것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 말이 조금 옆길로 가고 말았다.

이상 살펴 보았듯이 한시에는 한시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어휘들이 많이 있다. 앞서 살펴 본 '南浦'와 '折柳', '秋扇'과 '倚樓' 외에도 이런 예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다른 한 예로, 陶淵明이 〈飮酒〉에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 보노라.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 한 이래로, 隱士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의 집 울타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 있건 간에 모두 '東籬'라고 하였다. 덩달아 화가들이 '采菊東籬圖'를 다투어 그리게 되자, 이 말은 '세상을 피해 사는 고상한 선비의 거처'를 상징하는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특정 어휘가 특수한 情韻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死隱喩(dead metaphor)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感性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