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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일기장

천하한량 2007. 5. 11. 23:20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정이 일기로는 부족하셨던 모양이다.
따로 지면을 내어 <어머니>란 제목으로 글을 쓰셨다.
 
 
 
<뒷바라지 해 준 그놈이 출세하여 할머니 덕분이라고 인사듣는 그날이 기대된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학다리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사무친다.
 
 

 

1977년, 지금으로부터 28년전,

아버지는 당신의 결혼 23주년 기념일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셨다.

 




19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8년전,
우리지방 말로 하면 <놉>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1년동안 농사를 지으시면서 도움을 받은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내용을 또 꼼꼼히 기록하셨다.
그리고 어김없이 연인원과 함께 1년 통계를 내셨다.
당시 노임을 얼마씩 지불했는지는 아버지의 가계부를 살펴보면 알것이나
일부는그 집의 일을 해 주는 일명<품앗이>로써 갚았을것이다.
저기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 일부는 이미 아버지처럼 고인이 되셨고
일부는 아직 살아계신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보는 것도
흥미로울듯 하다.
 
 
 
 
당시 변견 강아지의 가격이 대략 1200원에서 1700원 사이.
일년 채 못키워 1800원의 이윤을 발생시켰다.
당시로서는 제법 짭잘했을 수 있었겠다.그래서 또 한마리를 구입했는데
채 한 달도 못 채우고 당시로서는 너무 흔한 일로 죽었다.
쥐잡기운동, 그에 따르는 일제 쥐약놓기 운동이 전국가적 행사였기에...
 
아버지는 다시 미련을 갖고 또 한마리를 사신다.
이번에도 쥐약으로 아버지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간다.
이번엔 정말 아깝다. 몇달만 더 키웠더라면 1800원정도의
이윤을 챙길 수 있었을텐데...
 
이후, 아버지는 개 키운 것에 대한 총평을 하셨는데
쥐약 때문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아버지경제학

                                                 (1956년, 아버지의 저서<인생독본,처세학>에서)

 

2006년 새해, 돈 많이 벌고 싶다구?

아버지께서 1956년에 이미 돈 버는 비법을 공개하셨다.

오늘날에도 그 비법은 유효하다. 새해, 이 방법을 꼭 시행해보라.

 

어느날 갑자기 그대들 앞에 돈벼락이 떨어질 것이라는 바램은 국회의원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진심으로 민생을 챙긴다거나  부시가 어느날 갑자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이라크 침공을 뉘우치는 일만큼이나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니, 애당초 기대도 하지 말아라. 차라리 구운 밤 닷 되를 자갈밭에 심어두고 싹나기를 기다리는것이 더 나을것이다.

 

전문해석

차용금의 원칙(5조목)

1조. 귀중한 남의 돈을 차용시는 반드시 가정경제에 유리하게 이용할일.

2조. 차용전에 반드시 상환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차용할일.

3조. 변제기일이 다다르면 기일 며칠전에 금액을 준비할일.

4조. 기일을 경과하면 나는 신용을 잃고 상대편은 지장이 된다.

5조. 차용금에 대해서는 신용이 제일이다.

 

경제학 1부

예금(저금)의 5원칙

1. 저금은 국부의 기초가 되며 출세의 기원이 된다.

2. 남는 돈을 저금하려 말고 저금하여 남기도록 하자

3. 저금은 자기의 힘이 될뿐더러 가족에 대한 의무이다.

4. 세금과 같이 생각하고 저금하되, 쓸 곳부터 미리 생각지 마라.

5. 저금은 시계와 같이 밤낮 끊임없이 이자가 늘어간다.

 

59년 결산

59년, 아버지는 한 해의 가계 수입과 지출을 결산하고 월평균과 각 항목별 지출 합계는 물론 작년과 비교하는 결론까지 내리셨습니다.

 

60년 가계부

그 가계부는 다시, 남서방댁 문상시 술값 150환으로 시작하는 60년의 가계부로 이어집니다. 전기도 TV도 컴퓨터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지출항목이 요즘과는 많이 다릅니다. 60년도 님들은 몇 살이었나요?

 

 

67년정치상67정치상167사회상

 

 

 

 

 

 

 

 

 

 

 

 

 

 

 

 

 

 

 

 

 

 

 

 

 

 

 

 

(67년 아버지의 일기장)

 

정치인은 치부와 영달에 급급하여 국민의 불신을 받고...

국회는 정쟁으로 공전을 하고 있는데...

물가는 오르고 사회는 혼란하며 살기 어려워 스스로 목숨을 끝는 사람들이...

직업없는 인간들이 많은...

 

세월이 흘러도 정치인과 국회의원의 속성은 불변이다.

사회의 모습도 지금과 별반 다를바 없다.

겉모양만 바뀌었다고 세상이 변한건 아니다.

 

40년 남짓, 우리는 진정 진보한 것이 맞는가?

 

 

 

 

 

59년 표지

 

 

단기 4292년이면

서기 1959년입니다.

아버지, 20대 후반의 기록이 될것이고 그때의 대학 노트가 이렇게 생겼었습니다.

 

 

 

 

 

 

 

 

 

 

 

 

 

 

 아버지는 내 나이에 어떤 철학으로 살았을까 비교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나이에 아버지는 5남매를 슬하에 두시고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30년전, 1976년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비록 이태백의 시를 인용하셨지만 아버지의 인생에 대한 비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인생이란게 홀치어진 실을 푸는 것과 같다. 한가닥을 풀면 또 다른 가닥이 헝클어지고

풀고 또 풀다가 끝끝내 다 풀지 못하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현재 학다리가 처한

상황들과 대입시켜 보면서 읽고 또 읽어보아도 참으로 기가 막힌 비유와 풀이다

 

                                                                               (1976년,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괜히 마누라 탓하지 말고

감히 부모님 원망하지 말고

애매하게 자식들 잡지 말고

가장으로서의 할 바를 다하면

가정은 그야말로 만사형통이란 말이다.

 

참으로 원론적인 말이긴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틀린 말이 아닌듯하다.


 

             (1976년 일기장 뒷표지)                                             (1971-72년 가계부 뒷표지)
 
 
요즘 모 카드사의 광고에서 말그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다.

 

 
                                                                            (1976년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학다리가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주 로또복권을 사고
아버지 산소에 갈때마다 그 복권이 당첨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으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떼를 쓴 꼴이 되었지 뭡니까?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분수를 지키며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는 바램은 변함이 없는데...
글쎄요.
아버지의 믿음과 철학처럼 세상이 그리되면 이 아들도 참 좋겠는데
30년이 흘러도 그 바램이 아직 유효한 걸 보면 아니, 오히려 자꾸만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아 학다리도 그 믿음을 폐기하고 싶을때가 있답니다.
이번 주도 학다리는 또 로또복권을 살겁니다.
이제, 아버지한테 당첨되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께요.ㅎㅎㅎ

 


                                                                      (1976년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자욱한 포연속, 사방엔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고요하다.
카메라는 비감하게 그장면을 펜한다. 순간 꿈틀거리는 한사람,
힘들게 총을 의지하여 일어선다. 비통한 얼굴로 사위를 향해 소리친다.
<살은자 없나? 살은자 없나?> 그때 시체더미속에서 신음처럼 또하나의 소리가
들린다.<소대장님!, 소대장님!>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학다리,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때 그 소대장, 라시찬, 학다리의 우상이 되고도 남았다. <전우>라는 그 드라마,
기억하는가? 화면속에는 불사신이었던 그 라시찬, 현실에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타잔의 어깨위에는 치타가 있고 그 치타는 바나나를 맛나게 먹는다.
한 번도 바나나를 먹어 본적 없었던 깐돌이, 그 맛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날밤, 학다리는 밀림에서 줄을 타고 바나나를 먹는 꿈을 꾼다.
그후로도 한참이나 지난 80년대로 넘어와서야 학다리는 그 꿈에도 그리던
바나나의 맛을 접하게 된다. 외갓집 큰 누나의 결혼식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나? 박근형이 나오던 <암행어사>가 있었고,
김자옥이 어린 신부로 나오던 <신부일기>를 의미도 모른채 보았고
최불암, 김상순,조경환, 남성훈의 <수사반장>, 전운의 <113수사본부>등등...
 
그 모든 재미난 것을 이제는 남의 집에서 그 집아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말한다. 그 기쁨을 어디에 비기리오. 그후 학다리는
테레비가 없는 집의 아이들을 한참이나 졸병으로 거느리며 <전우>놀이를 할 수 있었다.


 


1972년, 지금으로부터 34년전 양력 3월27일.
할머니는 환갑을 맞이하셨고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무사히 마친후 그 감상을 적어 두셨다.
요즘은 환갑(60세)잔치를 건너뛰고 칠순잔치가 일반적인데 당시는 환갑잔치가
집안은 물론 동네의 큰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겠다. 할머니 환갑 전후, 아버지의 일기를 보면
잔치 때문에 아버지는 염려와 준비를 많이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 해독>-세로쓰기가 읽기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어머의 갑일을 준비하면서 은근히 날씨가 좋아주기를 빌었던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불초자식으로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베풀게 될때 멀고 가까운 친지들과 마을 사람들을 맞아 크게 잘 차리지는 못하는 일이었지만 내집을 찾아와서 하루를 즐기시고 흥겹게 노시다가 돌아가시는 일을 염원한 나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헌데, 하늘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셨는지 의외로 쾌청한 당일의 날씨로 예상밖 손님이 많이 오셔서 그날의 하루는 잘 지낸 일이었다.
 
사실, 오늘날 이맘이때까지 없는 가정을 이룩하실려고 노고도 많았고 본 어머니로 그래도 그 공과로 자립자족의 환경이 이루어져 걱정 염려없는 생활되어 환갑을 맞으니 정말 나로서는 기뻤다. 나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기쁘신 것으로 보였다. 더욱 삼촌님과 숙모님들 고모님들과 제매들 모두가 축하의 물품을 많이 해 오시고 건실하게 한자리에 모인 일일때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기쁨에 넘쳐 눈물도 난 일이었지. 모두가 흥을 돋구고 밤이 모자라 닭이 우는 새벽까지 춤추고 노래하고 보메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이 심사 아니었던가.
 
정말 지난 세월을 회고하니 과연 성공한 오늘로서 영광인가 싶었다. 이런것이 살려고 온갖 몸부림 다 치고 고난의 고비에서 허덕일때 남의 정도 부러운것 많은 과정 아니었던가. 헌데 알뜰한 보람으로 지금의 오늘은 넉넉한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 고생끝애 영화라, 오늘의 형편은 노고겪은 대가이다. 이마음은 보다 더 돈독히 하여 어머니를 위로하는 자식 될것을 다짐한다.
 
헌데, 공교롭게도 어제날로 친지되는 손님들까지 모두 돌아가시고 집안에 어지럽혔던 뒷 설겆이 말끔히 하고본 오늘 새벽날에 비가 오는 날씨가 되니 정말 이번 날씨는 어머니 환갑을 위해 준 일인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아찔아찔한 생각도 들고 본 일이지. 그 당일이나 어젯날에 불순한 일기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일일까 말이다.
 
아~고맙기도 하신 하늘, 어머니는 복 받으실 일인가. 그렇다. 그 지극한 성실성만 봐도, 아니, 미운사람, 고운사람 가리지 않으신 넓은 마음만 봐도, 이뿐인가, 용기 가지신 의지만도 대단한 분이 아닌가. 살아나온 오늘날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어렵고 걱정되는 일을 당할적에 다른 사람들은 비관하고 낙심해도 오직 어머니만은 큰마음 그것으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일을 되도록 하신 어른 아닌가. 오늘따라 다시한번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잘 보낸 어머니 갑일을 다행케 여기는 바이다.



 

 
 
<본문해독>
1968년 6월 21일  비
이제 장마전선에 접어들어 비는 잦을것이라고 관상대는 전한다.오래도록 가뭄으로
비를 갈망했던 그것을 생각하면 이만하게도 다행한 일 아닌가. 하지만 우리들 인간이란
이래저래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야 하는 생리이지. 많이 오게 된다는 비에 수해걱정이
앞서지 않는가. 과연 무력하고 약한 것이 인생 아니냐. 어제와 오늘 비에 수해는 집집이 있어
또 근심하고 찡그리는 이가 비일비재한 일로 논밭간 일거리는 많이 생겨났다.
뿐인가 오늘 보니 담장이 허물어지고 하수구가 막히어 집에 따라 피해가 있고 보매
과연 매사는 미연에 대비하고 사전에 관심을 가져 조심이 요하다는 경각심이 솟는 일.
 
37년후
 
2006년 7월 1일 비
마찬가지로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모두 경각심을 가지고 수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하여
당한 후에 울고불며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즐 장마.
 
 
 
1979년 3월,
아버지 돌아가시기 10달전,
이때 이미 아버지는 판단력이 조금씩 흐려지고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하셨다.(필체가 심히 흔들리고 있다)
학다리 큰누나, 55년생이니 당시 스물넷이나 다섯의 나이.
당시의 아버지 연세와 지금의 누나 나이가 엇비슷할 것이다.
 
 학다리 누나 나이정도의 시골출신 여자라면,
직물공장이나 방직공장으로 돈 벌러 나가지 않았다면,
당시의 홀치기에 대한 기억이 있으리라.
 
맏딸이었던 누나는 밑으로 4명의 남동생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고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 더불어 집안의 믿음직한 농사꾼이었다.
 
이해 가을, 누나는 남의 가문으로 시집을 가지 가셨고
 아버지는 누나가 시집가는 것을 보시고 끝내 돌아가셨다
 
 

1977년이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돈다지만
당시만 해도 혼분식이 강제적으로 장려되고
쌀밥 한그릇 원없이 먹어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었던 시절이니
쌀로 막걸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이고
국가적인 단속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쌀막걸리가 천대받는 술이지만
저 당시 애주가들에겐 그야말로 엄청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경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한전의 직원도 아니면서 전기가 들어온 시간을 저리 46분이라는 식으로,
양조장을 경영하거나 담당 공무원도 아니면서 기간을
저리 13년간이란 식으로 표기한 것이다.ㅎㅎ
 
 
 
 
1977년 5월 7일,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무덤 앞에서
당신의 불효를 사죄드렸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묘 앞에서 떳떳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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