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목은 선생 이 문정공 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권근(權近)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字)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신데,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 사람이다. 공의 증조부는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추봉받았던 분으로 이름은 창세(昌世)이며, 할아버지는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선증(宣贈) 받았고, 본국에서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에 추봉받은 분으로 이름은 자성(自成)이며, 선친은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본국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匡正大夫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을 선수(宣授) 받고,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共)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 계유전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호는 가정(稼亭)이다.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져 있다. 비(?)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을 선봉(宣封) 받은 본국 함창군부인 김씨(咸昌郡夫人金氏)로서 천력(天曆) 무진 5월 신미에 공을 낳았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지혜는 보통 사람과 다르고 글 읽을 줄을 알면서부터 글을 보면 곧 암송하는지라 지정(至正) 신사년에 공의 나의 겨우 14세로,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우뚝하게 명성이 높았다. 비로소 20세가 되어 곧 혼사를 하려 하니 일시에 높은 가문과 명망 있는 족속들로 사위를 택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여 잔칫날 저녁까지도 다투고 있었다. 곧 안동 권씨에게 장가드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만호 본국 중대광 화원군(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本國重大匡花原君)을 선수 받은 중달(仲達)이란 분의 딸이고, 원조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본국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元朝朝列大夫太子左贊善本國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인 한공(漢功)의 손녀이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있을 때 공이 조관(朝官)의 아들로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보충되어 재학 3년에 중국의 연원(淵源 근본 내력) 있는 학문을 수업하여 익혔다. 갈고 닦으며 물들고 젖도록 익히고, 더욱 크게 나아가서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글을 더욱이 공부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 선생이 본국에 돌아와 돌아가니 분상(奔喪)하여 거상을 끝마쳤다. 계사년 여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科場)을 열어 선비를 시험할 때 공이 으뜸이 되어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 받고, 가을에 정동행성(征東行省) 해원(解元)에 합격하였으며 이내 진봉사(進奉使)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북경에 도착하여서 갑오년 2월에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丞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같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이 또 합격하게 되었다. 3월에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제이갑(第二甲)이 제2명에 뽑히었다. 독권관 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彛)와 한림승지 구양현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이 곧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동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同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하여 주었다. 을미년 봄에 왕부 필도치 장서 비목(王府必?赤掌書批目)이 되니 유림으로 명예로운 선발이었다. 봉선대부 시내사사인지 지제교 겸춘추관 편의관(奉善大夫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여름에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다. 8월에 한림원에 예사(禮仕)되었다. 겨울에 경력(經歷 지방 행정관)에 임시로 임명되었으나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까닭으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대개 또한 천하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을에 본국 관제(官制)가 행하여져서 중산대부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춘추관 편수관 겸병부낭중(中散大夫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으로 고치게 되어, 문무의 선임을 관장하였다. 처음에 공이 그때 정사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을 말씀하여 올렸던 바, 모두 시행되었다.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파하고 이부와 병부의 선거를 복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다. 정유년에 국자좨주 지각문 계중대부(國子祭酒知閣門階中大夫)에 시보(試補)하였다.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었으니, 이는 필도치(必?赤)의 장(長)이므로 거기 선발된 것은 더욱 영광스러웠다. 7월에 우간의대부로 승진되고 계급은 대중대부를 더하니, 이 뒤로부터는 무릇 벼슬을 제수하는 데는 모든 관직(館職 춘추관)을 띠게 되었다. 무술년에는 간한 말로 일이 생겨 권귀(權貴)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에 한때의 간관이 모두 좌천되었는데,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꾸려 가지고 새벽되기를 기다리던 중 그날밤에 명이 내려, 공만이 승진되어 통의대부 추밀원 우부승선지공부사(通議大夫樞密院右副丞宣知工部事)를 받았다. 왕이 재상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색은 재덕이 출중하여 보통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니 등용하고 버리는 것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따르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 가까이 후설(喉舌 목과 혀같이 가깝고 요긴한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장악한지 무려 7년 동안 좋은 계획을 진술하여, 임금에게 주입시키니 나라에 유익됨이 넓고 많았다. 신축년 11월에는 홍적(紅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임금이 피난하게 되자,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많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공은 왕을 따라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으로 호위하며 참모하고 협찬(協贊 협력하고)하여, 크게 많은 어려움을 건졌다. 모두 극복의 공을 이루니, 일등공훈에 책봉되고, 철권(鐵券 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을 기록한 문서)과 전지(田地) 1백 결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 정동행중서성 유학 제거(奉訓大夫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 단성보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本國端誠輔理功臣奉翊大夫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을 받으니, 이때부터 나라의 정사를 참여하며 듣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비록 벼슬을 내놓고 한가하게 있더라도 큰 정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의 시관)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아서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하니, 본국 판개성 겸성균대사성(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서이다. 처음 신축년에 병란을 겪은 뒤로 학교의 교육이 폐기되었으므로 임금께서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다시 지었다. 강의를 받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한때 경술(經術)의 선비를 가려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등과 같은 이가 모두 다른 관직으로서 학관을 겸하였고, 공은 그 장이 되었다. 대사성을 겸함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해 무신년 봄에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며, 여러 사람이 경서를 나누어 글을 가르치고 날마다 강의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것을 의논하여 각각 그 아는 것을 다하였다. 공은 즐거워하는 태도로 분석하고 절충하여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맞도록 힘썼는데, 저녁이 다 하도록 피곤함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되어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 학자들이 그 기송(記誦) 사장(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身心) 성명(性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유교를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의혹되지 않으며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공리(功利)는 꾀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기풍과 학술이 환하게 일신되었으니 모두 선생이 가르친 공이었다. 여름 4월 왕이 구제(九齋)에 행차하여 친히 여러 생도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고, 공에게 독권관(讀券官 답안을 읽는 관리)을 명하여, 이첨(李詹) 등 7명을 취하여 급제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 동지동거(同知貢擧)로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 과거제도의 역서통고(易書通考)의 법을 썼다. 처음에는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웠는데, 사치를 다하고 극진히 화려하게 하여 몇 해가 되어도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땅을 마암(馬巖)의 서쪽에 골라서 지었는데, 더욱 굉장함을 다하여 노력과 비용이 몇만 냥에 이르렀다. 시중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ㆍ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는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제물을 낭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술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집을 짓게 되면 나라에 불리하다’ 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 백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사직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간함이 옳겠소.” 하고 바로 글을 올려 불가함을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유탁을 옥에 가두었다. 이 일로 죄를 주려고 공에게 명하여 대중에 유시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공이 죄명을 물어보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수상으로 있으면서, 불의의 일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부른 것이 죄의 하나요, 연복사(演福寺) 전토를 빼앗은 것이 둘째요, 노국공주가 죽었을 적에 3일 동안 제사를 거른 것이 셋째요, 그 장사를 강등(降等)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 한 것이 넷째이니, 불충과 불의가 무엇이 이보다 크랴.”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근일에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의 역사를 그만 두기를 청함에 비록 네 가지 일로 그를 죄 주신다 하옵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상소 때문인 것으로 알 것이오며, 또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죽일만한 죄가 아니오니, 다시 한번 생각하옵기를 원하옵니다.” 하였다. 왕은 더 노하여 쓰라고 더욱 급하게 독촉하니, 공이 엎드려 말씀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 그 죄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상소의 사건은 영도첨의(領導僉議)께서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은 신하로 세력을 부렸는데 마침 임금 곁에 있었다. 신돈이 마지못하여 바로 말하기를, “노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노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옥새로 봉인하게 하니 춘부는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엎드려 감히 드리지 못했다. 신돈이 말하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이것을 봉인하게 하십시오.” 하여, 이내 공에게 명하니, 공은 임금이 노할까 두려웠으나, 바로 봉서하기를, “신 색(穡)은 삼가 봉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탓으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섬길지어다. 태조께서 어찌 처음부터 왕손이겠는가. 내가 임금의 자리를 피하겠노라.” 하고, 정비(定妃)의 궁으로 옮겨가 거처하면서 음식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임금에게 공을 옥에 가두어 문책하기로 하고,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에 처하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의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게 임금의 알아주심을 힘입사와 갑자기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사온데, 상감의 덕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오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애써 말씀드리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이제 유시중(柳侍中)이 구속되어 있사온데 신이 감히 무죄를 극진히 말하옴은 상감께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살펴 깨닫게 함으로써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함이옵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서가 아니오라, 다만 이 한번의 실수로 말미암아 상감의 이름이 뒷세상에 아름답지 못할까 두려워서이옵니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갖추어 상감에게 말씀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감동하고 깨달아 유탁들을 석방하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회에 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로서 김잠(金潛) 등 33명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 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이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다. 공민왕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여론이 어떠한고.”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나라에서 사람을 얻었다 하옵니다.” 하니, 왕은 웃으며 이르기를, “문관과 무관에서 모두 제 일류만 써서 재상을 삼았으니, 감히 의논하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이를 채용한 것을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왕은 매양 공과 성산(星山) 사람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며, 반드시 좌우로 하여금 깨끗이 쓸고 향을 피우게 하였으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데, 하필 공경을 드림이 이와 같사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알리요. 이 두 사람의 도덕이 평범한 선비가 아니요, 또 색(穡)의 학문은 피부를 넘어 골수에 들어간 자이다.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겨룰 자가 없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소홀하게 하겠느냐.” 하였다. 대체로 왕이 일찍이 황제의 뜰에 입시하였을 때 조정 안의 사대무들이 공을 칭찬하는 것이 그전부터임을 들었던 까닭으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9월에는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6월에는 왕께서 기복(起復) 하게 하여,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복직시켰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대광으로 계급을 주었다. 갑인년 가을에 공민왕이 흥서하였다. 공이 어머니인 요양현군의 서거(逝去)로부터 슬프고 상한 것이 병이 되어 구토 설사로 병들었는데, 임금의 서거를 듣고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어 문을 닫고 7ㆍ8년 동안 누워 있다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의 부도(浮屠)의 명을 지었다. 그 무리들이 그로 하여금 많이 문하에 왕래하게 되었고, 무릇 시문도 구하였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응대하니 부도(浮屠 불교)에 매우 아첨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복되게 한다 하니 나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노라.”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고,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를 관장하였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받았고,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으며, 갑자년에 한산 부원군(韓山府院君)을 더하여 봉하였다. 을축년에 벽상 삼한 삼중대광 검교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받았다. 병인년에 지공거로 맹사성(孟思誠) 등 33명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 나라)에서 철령위(鐵領衛)를 두고자 하니, 시중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고 정치를 하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요(遼)를 치려 하였다. 우리 태상왕이 거의(擧義 옳은 일을 주장함)하여 군사를 끌고 돌아와 집요하게 최영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공이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틈이 있어 왕과 집정(執政 정권 잡은 사람)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변명할 수가 없을 것인데, 상감께서 어리시어 능히 행하지 못하시니, 이것은 이 늙은 놈의 책임입니다.” 하고, 곧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므로 임금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심하다고 말리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로서 지위가 최상의 품질에 이르러, 항상 죽음으로 보답하려 하였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사옵니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로 왕명을 받들더라도 진실로 나라의 명을 천자에게 알리게 되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산 것에 진배 없사옵니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가 가상하게 여기어 상주는 것이 보통보다 더함이 있었고, 융숭하게 대우하여 보내었다. 기사년에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밀려났다. 5월에는 이초(彛初) 를 상국(上國)에 보냈다는 것으로 무함되어 공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청주에 가두고 고문하기를 매우 준엄하게 하니 일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생사는 하늘이다.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할 뿐이다.” 하고, 태연하게 자처하였다. 며칠 뒤 여명(黎明)에 시작한 비가 아직 한낮이 되지 못하여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오르게 되어 성문을 무너뜨리고 넘어오니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문사관(問事官 조사하던 관원)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가 나무를 붙들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마로 급하게 나라에 보고하니 풀어주고 책임을 묻지 아니하였다. 이 고을이 수재가 이와 같이 심한 일이 오로지 없었으므로 모두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왕은 본래부터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아는지라 누차 소환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사람의 탄핵을 받아 갑자기 쫓김을 당했다. 공이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고, 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서 병을 청탁하여 가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또 함창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돌아오니, 문인 권근(權近)이 또한 충주로 귀양가다가 길에서 공을 보고 남에게 들은 것을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사람의 신하된 도리가 임금께서 명하는 것에 따를 뿐이므로, 부르면 가고 가라 하시면 와서 죽어도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인데, 가고 오는 것을 어찌 생각할 것인가.” 하였다. 이미 오니, 다시 한산 부원군에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직되시고,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하지 아니하는데, 감히 거짓을 복종하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상감에게 들리니, 상감이 그 점을 살펴서 특별히 용서하여 장흥으로 옮겨 가게 하니, 오로지 공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겨울에 용서받아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 초년으로부터 기필코 꺼려하는 사람들이 누차 계교로써 공을 기필코 죽을 땅에 두려고 하였으나 왕이 문득 구하여 온전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공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그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가서 놀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대로 머물러 거처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불러 맞이하고 다시 한산에 봉하니, 나가 뵙고 물러나올 때는 중문까지 보내고 대접하기를 옛친구의 예로써 하였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가 되었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배에 오르려 하는데, 병이 들어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에 부르고 7일 날에는 병이 위중하자, 중이 불도를 말씀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손을 들어 휘두르며 말하기를, “생사의 이치를 나는 의심하지 않노라.” 하고, 말을 마치자 세상을 끝마쳤다. 부고가 보고되니, 임금이 대단히 슬퍼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지내고 부의금을 보내는 데 더함이 있었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내렸다. 10월에는 자손들이 영구를 모시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년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미롭고 넓어, 처사가 자세하고 밝으며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사정을 잘 이해하여 주었다. 의론할 때에 가부를 정함에 있어서 명백하고 간절하되 반드시 충후함을 주로 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에 겸손하고 공순하고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며, 단아하시어 화기가 유연화되, 늠름한 기상을 범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재상이 되자 힘써 이루어진 법을 좇아 복종하고 새로 고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대체를 가지도록 힘썼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생각이 늙도록 변하지 않아 매양 말과 얼굴빛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 나타났다. 후진들을 권면하여 진취시키되 반드시 윤리를 위주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게을리하지 않고 모든 책을 박람(博覽)하였지만 더욱 이학(理學)에 깊었다. 대개 문장을 짓기 위하여 붓을 잡으면 바로 써내려가는데 마치 바람이 가고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으면서도, 말뜻이 정도(精到)하고 격률(格律)이 높고 넓어 도도하기가 강하(江河)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문집이 있는데, 시 35권과 문 20권이 있다. 원 나라 말년 지정(至正) 계사년부터 황조(皇朝) 홍무 기사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에 나라의 문한을 장악한 사람이 많이 변경된 까닭으로, 험난한 즈음에 능히 사명(詞命)을 지어, 여러 번 감탄함을 받았고, 공이 폄직당하게 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글을 맡아 보게 되었는데, 비로소 표사(表辭) 문제로 황제에게 책망을 당하게 되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이 있음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이 한갓 공경만 다 할 줄 알고 그 말을 모두 쓰지 못하여 늦게 백료의 장이 되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파면되고 마침내는 헐뜯고 미워함을 당하게 되어서 경제(經濟) 의 학문을 끝내 크게 실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런 것이다. 집을 다스리는 데 비용의 유무를 묻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끼니꺼리가 없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빠르게 말하는 일도 없어, 집사람이나 하인들이 혹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천천히 타일러 일찍부터 노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연회 좌석에 참석하였을 때에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행동하여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마음이 소탈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기쁨과 노함이 외모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모가 나지 않아, 완전히 한 덩어리의 화한 기운으로 뭉쳐 있다. 오래도록 은총을 받고 이로운 자리에 교만하고 뽐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늘그막에 어려움을 만나서도, 기개가 떨어지고 줄어듦을 보지 못하였다. 옥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하여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의 타고난 천성과 지키고 실천해 나아감이 또한 확고하여 뽑을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종덕(種德)인데, 추성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推誠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이고, 둘째 아들은 종학(種學)인데,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이고, 병진의 진사로 무진년에 성균관 과거를 맡아 보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맡아 보던 주시관)가 되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 전교령 지제교(中正大夫典校令知製敎)가 되었으며, 임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장남인 밀직 종덕은 아들이 넷이 있는데, 맏아들 맹유(孟?)는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中顯大夫監門?大護軍)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맹균(孟畇)인데, 승봉랑 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이 되어 을축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셋째 아들은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넷째 아들 맹진(孟畛)은 인덕궁(仁德宮) 사연(司涓)이 되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통정대부 승추부 우부대언(通政大夫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중훈대부 종부령(中訓大夫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인 첨서(簽書) 종학은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조봉대부 사재소감(朝奉大夫司宰少監)이 되고, 둘째 아들 숙규(叔畦)는 성균관 생원이 되고, 셋째 아들 숙당(叔當)은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 되고, 넷째 아들 숙묘(叔畝)는 조산대부 사수소감(朝散大夫司水少監)이 되고, 다섯째 아들 숙복(叔福)은 성균관의 생원에 합격되었고, 여섯째 아들 숙치(叔?)는 아직도 어리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인 전교(典校) 종선의 아들은 하나인데, 계주(季疇)라 불렀다. 증손(曾孫)에 남자 일곱 사람과 여자 아홉 사람이 있다.
[주D-001]해원(解元) : 해(解)라는 말은 지방에서 실시하는 초급 시험이요, 원(元)은 장원이란 말이다.
[주D-002]기복(起復) : 예전에는 거상을 입고 있는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아니하므로 벼슬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 사람이 필요하면, 특명으로 그 사람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명한다. 그것을 기복이라 한다.
[주D-003]이초(彛初) : 이(彛)는 윤이(尹彛)요, 초는 이초(李初)이다. 이 두 사람이 명 나라 서울 북경에 가서 이성계(李成桂)가 왕씨는 아닌 사람인데, 자기의 친척이라 하여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을 동원하여 중국을 공격하려 한다고 고발하여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었다.
[주D-004]경제(經濟) :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준말인데,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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