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肅補 14卷 9年 2月 4日 (丙子) 001 / 행 사직 박세채가 조정에 나아가 세가지 조목을 차차로 아뢰다

천하한량 2007. 3. 23. 03:19

肅補 14卷 9年 2月 4日 (丙子) 001 / 행 사직 박세채가 조정에 나아가 세가지 조목을 차차로 아뢰다


○丙子/行司直朴世采造朝登筵啓箚, 其條有三。 其一, 引《易》乾之天行健曰:

天行一日一周, 非至健, 不能也。 君子法之, 不以人慾害天理之剛, 則自强而不息矣。 何則, 剛者, 陽之德而健之本, 惟人君爲能體之, 則道足以存天理, 不爲人慾所屈。 必須持之以堅, 行之以久, 遂至於以一心而正萬事, 以一身而正萬民, 則天德可執而至治可期矣。 然而人慾之害, 不一其端, 雖有聰明睿智之姿, 必須先立大志, 知止而進德, 然後乾剛始可得以體矣。 所謂知止而進德者, 亦無他術, 謹聖學之程度、玩微言之歸趣、會先王之德業, 辨之於心, 慮善惡之萠, 審之於人物、邪正之際; 驗之於事爲、是非之分, 終始孜孜, 靡有不至, 則知及仁守, 雖欲不逮乎乾剛, 自不能已。 以是推之, 人君之道, 只在乎體乾剛而不息, 體之之道, 亦只在乎知止而進德, 以收學聚問辨之功, 以盡中正純粹之盛。 其能如此而然且天理未明, 而人慾未祛者, 未之有也。 竊覵, 殿下英斷首出, 聰睿冠古, 以臣之憂慮, 猶有所恐者, 聖質雖高, 而主宰本源之功未盡立; 聖志雖大, 而提絜綱維之道未盡明。 是以, 見於事爲、發於政令者, 往往欠虛, 受裁擇之美, 致私吝撓改之端, 雖於公議國體之關係甚大, 如向時追錄勳籍者, 未嘗亟賜改正, 則其他可以數矣。 非王者奉三無私, 以勞天下之意, 雖謂以人欲而害天德之剛, 恐有未能辭者。 伏願殿下, 廓然大警。

其二, 引《洪範》無黨無偏之義曰:

夫皇極之道, 自人倫之大, 以至於事物云爲之間, 無不極其義理之中, 使天下四方之人, 有所取正, 如北極之居其所, 而衆星拱之, 其自庶民以及君子, 宜無有偏比不公之患。 我國東西之目, 始於宣廟朝, 然其初非甚有君子、小人之辨, 故先正臣李珥嘗以洗滌鎭定之意, 陳於宣廟, 今已百有餘年。 自後兩黨之失, 不復相掩, 較其大致, 則一敗於汝立之逆, 再敗於爾瞻之亂, 三敗於向日權奸之黨者, 皆出於東之一邊。 然其間所謂南人者稍別, 而亦多名儒碩輔。 至光海斁倫之日, 皆能屛退林野, 或多抗言直諫。 是以, 仁祖卽位, 登庸之盛, 與西人無別, 重以列聖御理有方, 所以久而後始壞者也。 粤自大獄完畢, 奸黨屛黜, 聖志堅定, 朝論洽然, 宜其邪正大明, 治化日升, 顧乃混同擾攘, 不免有危亂之兆。 蓋以世道交喪, 人心陷溺, 於其復入者, 固未能甄別賢否, 行之以至公之道, 於其已敗者, 亦涉乎刻核過濫之弊。 何者, 自夫權奸之被罪也, 所誅者只是黨與腹心而已。 今則不然, 色目所及, 殆擧一番人而疑之, 流竄罷削, 必以此爲口實, 在治國之道, 豈宜一向持是而無變轍耶? 臣請其係逆獄奸黨及他罪, 大段不容, 處之益加明白, 如鄭夢周所定五罪之例, 非在此類, 而賢能可用者, 固得蕩滌而拂拭之, 使之自新, 俾無抱冤遺才之嘆。 雖其復入者, 若有絲毫偏重之患, 益加懲艾而勉勵, 庶幾竝臻寅恭之美焉。 然其大體, 苟非殿下卓然自立, 察倫盡性, 有以建夫皇極之道而照臨之, 使是非淑慝, 莫逃於衡鑑之下, 勿論彼此, 賢者必進, 不肖者必退, 以昭平明之理焉。

其三, 引《春秋》華夷之辨曰:

南漢出城之恥, 迄未一灑, 玉帛之項背相望。 猶且因循恬憘, 視若常經之不可已, 是豈我臣民所得以安哉? 朱子隆興初載, 力言用兵之計, 及至《戊申封事》, 則數年以來, 綱紀解弛, 釁孽萠生, 區區東南事, 猶有不勝慮者, 何恢復之可圖? 遂以大本急務, 俾作滅讎虜、復中原之規模。 伏願殿下, 自玆以往, 惕然奮發, 一以孝廟之心爲心, 蓄力相機, 庶幾早昭明大義, 以善後策焉。

又於追錄勳籍下, 貼黃云:

中廟朝靖國功臣, 僞冒太甚, 文正公趙光祖以爲: “利源一開, 社稷將不可爲。” 遂與請改正, 奸臣南袞相乘此機, 讒殺光祖。 此事雖未知與靖國時事何如, 而實爲國朝所無之弊, 非但利源之可憂而已, 輿情愈鬱愈激, 況其略能周旋者, 尤豈無他酬勞賞功之路乎? 竊乞有所斟酌, 俾不至終累聖德。

於五罪之例下貼黃云:

恭讓朝, 鄭道傳欲殺李穡諸人, 流竄甚多, 國論多岐。 鄭夢周請王審錄竝加黜宥。 且請此後更擧前罪者, 論以重律。 蓋此雖與前朝事自別, 然其證定罪案之輕重, 以定國論, 收人心則伏乞聖照。

又於善後策下貼黃云:

臣之此說, 亦非敢望殿下遽然興師, 以當餓虎之蹊也。 我國家受皇朝之恩, 誠異於他邦, 若不能倡明大義, 以立此心, 是將擧天下, 皆爲夷狄矣。 伏乞聖照。

世采時方主張士論, 論追錄事, 辭嚴意正; 論朋黨事, 亦可見公心所發; 復雪事, 雖是儒者家計, 旣無深謨至計, 似未免套語矣。

숙보 14권 9년 2월 4일 (병자) 001 / 행 사직 박세채가 조정에 나아가 세가지 조목을 차차로 아뢰다


행 사직(行司直) 박세채(朴世采)가 조정에 나가 경연(經筵) 석상에서 차자(箚子)로 아뢰었는데, 그 조목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 첫째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하늘의 운행이 건전하다[天行健]’는 것을 인용(引用)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행이 하루 한 번 주회(周回)하는데, 지극히 건전(健全)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못합니다. 군자(君子)가 이것을 법받아 사람의 욕심으로 자연 이치의 강건(剛健)함를 해치지 아니하면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않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剛)이란 것은 양(陽)의 덕(德)이고 건(健)의 근본이니, 오직 임금이 그것을 잘 체득하면, 도(道)는 충족되고 천리(天理)는 보존되어 사람의 욕심에 굴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굳게 가지고 오래 행하면, 마침내는 한 마음으로 만사(萬事)를 바로잡고, 한 몸으로 만민(萬民)을 바로잡아, 곧 천덕(天德)을 잡을 수 있어 이상적인 정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 방해됨도 그 단서(端緖)가 하나뿐이 아니니, 아무리 총명하고 밝은 지혜의 자질이 있더라도 반드시 먼저 큰 뜻을 세워서 그칠 때를 알고 덕(德)에 나아간 뒤에야 건(乾)의 강건함을 비로소 알아 체득(體得)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그칠 데를 알아서 덕(德)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도 별다른 기술이 없습니다. 성학(聖學)의 정도(程度)를 삼가고 미언(微言)의 귀착점을 완미(玩味)하며, 선왕(先王)의 덕업(德業)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잘 분변하고 선악(善惡)의 시초[萌]를 우려할 때는 인물(人物)과 사정(邪正)의 찰나에서 살피고, 하는 일을 시비(是非)의 나뉨에서 징험하여, 마칠 때나 시작할 때나 부지런히 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으면, 지혜는 이르고 인(仁)은 지켜지게 되어 건강(乾剛)에 미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임금의 도리는 다만 건강(乾剛)을 체득하여 쉬지 않은 데 달려 있으며, 그것을 체득하는 방법도 다만 그칠 줄을 알고 덕(德)에 나아가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는 공부를 거둬들여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융성함을 다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렇게 하는데도 자연의 이치를 밝히지 못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없습니다. 가만히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영단(英斷)이 뛰어나고 총명과 예지가 옛사람보다 우뚝하신데, 신이 우려하면서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성상(聖上)의 자질이 비록 고매하시나 본원(本源)을 주재(主宰)하는 공이 완전히 수립되지 못했으며, 성상(聖上)의 뜻이 비록 크나 강유(綱維)를 잡아서 이끌 방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하시는 일에 나타나는 것과 정치 명령에 발로되는 것이 가끔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재단하여 채택하는 아름다움이 부족하고, 사사로이 아끼며 휘어서 고치는 단서를 이루게 되니, 비록 공론이라고는 하나 국가 체모가 관계됨이 매우 큽니다.

지난날 훈적(勳籍)에 추록(追錄)하는 일 같은 것은 일찍이 빨리 개정(改正)하도록 하지 않으셨으면, 그 밖에 다른 것은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삼무사(三無私)를 받들어 천하의 뜻을 위로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의 욕심으로 천덕(天德)의 강건(剛健)함을 해친다고 말하더라도 아마 사양 하지 못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확연(廓然)히 크게 깨우치소서.”

하였다. 그 둘째는 홍범(洪範)의 무당 무편(無黨無偏)의 뜻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대저 황극(皇極)의 도(道)는 인륜(人倫)같이 큰 것으로부터 사물(事物)의 소리와 동작에 이르기까지 그 의리(義理)의 중도(中道)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천하 사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취할 데가 있게 하면,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있으면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과 같이 서민으로부터 군자(君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 우리 나라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당목(黨目)은 선묘조(宣廟朝)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군자·소인의 분별이 심하게 있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세척(洗滌)하여 진정시키려는 생각에서 선조[宣廟]께 진달한 것이 지금 벌써 백여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 양당(兩黨)의 실수는 다시 서로 가리우지 못하여 사건만 꼽더라도 첫째는 정여립(鄭汝立)의 모역(謀逆)에 의한 패몰(敗沒)이고, 둘째는 이이첨(李爾瞻)의 난정(亂政)에 의한 패몰이며, 세째는 지난날 권간(權奸)의 당에 의한 패몰이니, 모두 동인(東人)의 일변(一邊)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남인(南人)이라고 일컫는 것은 조금 구별되어 역시 이름난 선비와 큰 보필(輔弼)이 많았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인륜을 무너뜨린 날에 이르러서는 모두 임야(林野)에 물러나거나 혹은 대항하여 말하거나 직간(直諫)하는 이도 많았습니다. 이러므로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등용(登庸)의 왕성함이 서인(西人)과 별다름이 없었으며, 거듭 열성(列聖)께서 다스리는 방도가 있어서 오래 지나간 뒤에야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대옥(大獄)이 완전히 마무리 되자 간당(奸黨)은 파출(罷黜)되고 성지(聖志)가 굳어져 조정 의논이 화목해지니, 사정(邪正)이 뚜렷이 밝혀지고 다스리는 교화가 날로 상승해야 하는데, 도리어 곧 혼동되고 시끄러워져서 위란(危亂)의 조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세상의 도덕이 타락하고 인심(人心)이 빠져들어, 다시 들어온 자는 실로 명확하게 현부(賢否)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공정한 도리를 행하다가 패몰한 자 역시 각박하고 지나친 폐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권간이 죄를 받았을 때는 주벌(誅罰)된 자는 당여(黨與)와 복심(腹心)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색목(色目)이 미친 한쪽 사람들을 거의 다 의심하며, 귀양보내고 파직 삭탈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구실을 삼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어찌 한결같이 이를 견지하면서 지난날의 잘못된 궤도를 변경하지 않음이 마땅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역옥(逆獄)의 간당(奸黨) 및 다른 죄에 관련되어 크게 용납하지 못할 것은 더욱 명백하게 처리하기를, 고려 말엽 정몽주(鄭夢周)가 정한 오죄(五罪)의 예(例)와 같이 하소서.

이러한 유에 해당되지 않고 어질고 능력이 있어 쓸만한 자는 실로 탕척(湯滌)하여 깨끗이 씻어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함으로써, 원통함을 품거나 인재를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합니다. 비록 다시 들어온 자가 털끝만큼이라도 편중(偏重)될 근심이 있을 경우 더욱 징계하고 격려한다면 거의 공경하는 아름다움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체는 참으로 전하께서 우뚝하게 자립하여 인륜을 살피시고 본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면, 황극(皇極)의 도를 세워 그것으로 비춰보며, 옳고 그름과 맑고 사특한 것으로 하여금 형감(衡鑑)의 아래에서 도망할 수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피차를 의논할 것 없이 어진 자는 반드시 나아가게 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반드시 물러나게 하여 평이하고 명확한 이치를 밝히소서.”

하였다. 그 세째는 《춘추(春秋)》에 화이지변(華夷之辨)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나온 수치를 지금껏 씻지 못하고, 옥백(玉帛) 바치기를 목덜미와 등을 서로 바라보듯 하고,오히려 또 그럭저럭 편안하고 기쁘게 여기며, 떳떳한 도리로 그만두지 못할 것같이 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신민(臣民)의 편안하게 여길 바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융흥(隆興) 초에 용병(用兵)의 계책을 역설하였고, 무신 봉사(戊申封事)에 이르러서는 수년 동안 내려오면서 기강이 해이해지고 재앙이 싹터서 구구한 동쪽 남쪽의 일도 오히려 이루 다 염려하지 못하는데 어찌 회복을 도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대본(大本)과 급무(急務)를 원수인 오랑캐를 멸망시켜 중원(中原)을 회복하는 규모(規模)로 만들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척연(惕然)히 분발하시어 한결같이 효묘(孝廟)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힘를 기르고 기미를 살펴서 거의 조만간에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니, 뒷날의 계책을 훌륭하게 하소서.”

하였고, 또 추록(追錄)한 훈신(勳臣)의 문적에 첩황(貼黃)을 내리라고 한 것에 대해서 이르기를,

“중묘조(中廟朝)에 정국 공신(靖國功臣)이 위훈(爲勳)이 너무 심해서, 문정공(文貞公) 조광조(趙光祖)가 ‘이익의 근원을 한 번 열면 사직(社稷)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개정을 청하자, 간신 남곤(南袞)이 이 기회를 틈타 조광조를 참소하여 죽였습니다. 이번 일이 비록 정국(靖國) 때의 일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알지 못하나, 실로 국조(國朝)에 없었던 폐단입니다. 다만 이익의 근원을 여는 근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 인정이 더욱 답답해 하고 격렬한데, 하물며 약간 주선한 자들에게 어찌 달리 그 공로에 상주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가만히 바라건대, 참작하시어 끝내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고, 오죄(五罪)의 예(例)에 의해 첩황(貼黃)을 내리라고 하는 것은 이르기를,

“공양조(恭讓朝)에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들을 죽이려고 귀양을 많이 보내자 국론이 분열되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임금에게 기록을 살펴서 아울러 내치거나 용서하되, 이 뒤에 다시 전일의 죄를 들추어 내는 자는 무거운 법으로 논죄(論罪)하도록 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번 일은 고려조[前朝]의 일과는 저절로 구별이 되나, 그 죄안(罪案)의 경중을 정하여 국론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수렴한 것은 증거나 되니, 성상께서 밝게 살피소서.”

하였고, 다시 뒤의 계책을 잘 하는 첩황(貼黃)을 내리라고 하는 것은 이르기를,

“신의 이 말도 전하께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주린 호랑이의 길목을 감당하도록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황조(皇朝)의 은혜를 받은 것이 참으로 다른 나라와 다르니, 대의(大義)를 밝혀서 이 마음을 확립할 수 없다면, 이는 천하가 모두 이적(夷狄)이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였다. 박세채가 당시 바야흐로 사론(士論)을 주장하여 공신 추록(追錄)한 일을 논하였는데, 말이 엄하고 뜻이 정당하였으며, 붕당(朋黨)을 의논한 것도 공정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수를 갚는 일은 비록 유자(儒者)의 계책이라 할지라도, 이미 심원한 계책이 없으니, 상투적인 말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원전】 38 집 642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