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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김인전 선생과 1921년5월 상해반송공원 한중호조사모임 사진

천하한량 2007. 3. 14. 20:28

 

1921년5월 상해반송공원 한중호조사모임

 

 

 

 

 

 

<경재 김인전 선생은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

 

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 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

 

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의 창립

 

 

금능대학 중어중문학부를 수료한 뒤 조동호는 황자오라는 중국사람을 소개받아 그가 발행하는 《구국일보》와 《중화신보》에 기자로 채용되어 상해지역에 있어서 한인의 반일 독립운동의식을 고취하였다.

유정이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많은 생각없이 결정하였다. 유정은 중국언론계의 중진 황자오를 존경하였는데 그는 상해지역 한국인의 반일독립운동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망명청년들의 중국무관학교에의 입학을 알선하는 등 한중 친선의 임무를 맡았다.

황자오는 조동호 등 한국인 기자와 망명지사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이고 제도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인과 손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이라는 사실을 충고해 준 바 있다.

1921년 태평양회의 소집 문제가 제창되면서 석오,백범 등 임정요인들은 이에 거는 기대가 매우 컸다. 그래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까지 결성한 바 있었다.

이때 한중학생이 중심이 되어 「한중국민호조사」가 조직되었다. 이에 조동호등이 참가하여 태평양회의에 제의할 여러 가지 안건들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조동호는 한국측에서 여운형, 윤기섭, 김홍서, 이유필, 김규식, 한진교, 서병호, 송병조, 윤현진, 김인전, 김병조, 이원익, 최창식, 도인권 등 10여명과 같이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측 인사로는 유종주, 주범추, 여곤, 적간, 혁조영, 손경아 등 18명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한중연합으로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축멸하자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하여 한중 양국대표 30여명이 1921년 5월에 모여 이 모임을 만든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19년 5월경 조동호는 중국인 황개민(黃介民)과 친분을 갖고 프랑스조계 하비로(현. 회해로)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 드나들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한중호조사발기의 모체가 되었다.

이기형이 쓴 《몽양 여운형》이라는 연구성과 속에서

「1919년 5월경부터 불란서조계 하비로(회해로)에 있는 중국인 황개민의 사무소에 한중인 몇몇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중호조사의 모체가 되었다. 처음 여기 에 조동호가 드나들었다. 참가자는 중국측에서 광동정부 사법차장 오산(吳山)을 비롯하여 황개민, 황흥의 미망인 황종한 등 다수의 중국인과 한국측에서는 조동호, 여운형, 김규식, 이유필, 여운홍 그밖의 2, 3인이었다. 목적은 한중친선,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 한국청년의 중국유학과 구미유학을 위한 여권 주선 등이었다.」

라고 하여 한중호조사는 1919년 5월경 상해에서 조직되었는데 1921년에 조직되었다는 것은 그뒤 한중국민호조총사의 조직으로 확대 발전하였을 때의 호조사인 것이 아닌가 싶다.

임정과 중국 민간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던 것은 한중호조사의 단체활동이었으므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임정과 중국인이 합작하여 한중호조사를 조직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임정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많은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동삼성과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국내 지하운동을 지원하거나, 한,중 양국 접경지역의 항일유격군사활동을 지원하였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세계 각국의 성원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중국정부로부터 얻고자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물론 임정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 세계 여러나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적인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임정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접했다.

당시 손문(1886~1925)의 호법정부의 상황을 보면 중국의 민족주의 혁명가들이 청조의 무능과 열강의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민족혁명의 지도자인 손문이 남경에서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손문이 임시 대총통으로 즉위하자 원세개(袁世凱)가 청제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총통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문은 원세개와 타협하여 즉시 청제퇴위와 공화정을 선포하는 조건으로 원세개를 제 2대 임시총통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손문의 기대와는 달리 정권탈취에만 급급한 원세개는 북경병변을 일으켜 북경에서 총통으로 취임한 뒤 제제(帝制)를 복구하고자 획책하여 1913년 3월 반원 세력의 주도급 인사인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세력강화를 위해서 차관을 도입하고 중국혁명과의 힘을 약화시키는 음모를 꾀함으로써 1913년 7월부터 원세개를 제거하는 운동인 2차혁명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자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중국 임시정부는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조동호가 망명초기에 참여했던 동제사의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를 통해서 중국인사들과 친분을 맺음으로써 한국독립운동에 협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1년 이후 임정대표가 광동에서 한중합작의 필요성을 선전하며 국민당의 중견인물들로부터 지원을 구한 결과 광동 각계는 한국독립에 대하여 동정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정황에서 한중호조사는 한중친선은 물론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 또한 일보 전진하여 경제,상업,교육방면에 대해 상호원조를 목적으로 1921년 가을 상해 프랑스조계 포석로 14호에서 조직되었다.

이때, 조동호는 여운형, 윤현진과 한국측 대표로 참가했고 중국측에서는 오산, 황종한, 주검추 등이 참여했다.

유정 조동호가 1921년 5월 실무적으로 수임을 맡아 기초한 「한중국민호조사 총사 임시 가규칙」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이는 한중 두나라의 공동의 적 일제를 타도하고 공동의 이익 증진을 도모하자는 한중친선의 모범적인 평화추구적 모임이었던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동호가 기초한 동 규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중국민호조사 총사 임시 가규칙

1. 명칭: 한중국민호조사총사 라 칭한다.
2. 주의: 호조 정신으로 한중양국 국민의 행복을 도모함으로써 주의로 한다.
3. 총사: 당분간 상해에 설치한다.
4. 조직: 한중양국민과 각지의 민의단체 대표자가 공동으로 조직하며 사내에 평의, 집행,
            2부를 둔다.
     갑: 평의부에는 평의원장1인 평의원 약간인을 두고 평의원은 대회에서 선출하고 평의원장은 
          평의원이 호선한다.
     을: 집행부에는 부장 1인을 두고 그 밑에 총무, 재무, 교제, 교육, 실업,출판의 6과를 부속하
          고 각과에 과장 1인 과원 약간인을 둔다. 그리고부장, 과장은 평의부에서 선출하고 과원
          은 부장, 각과장이 선임한다.
5. 직권: 평의부는 입법, 건의 및 결의 일체의 사의를 전가하고 만일집행부에서위 법한 행위가
           있을 때는 그 탄핵서를 제출할 수 있다. 집행부는 본사일체의 진행사의를 집행하며 아울
           러 본사를 대표하여 외부에 대해 책임을 진다.
6. 임기: 평의부 집행부의 임기는 다 같이 1년으로 하고 정기대회마다 그 2분의1 을 개선한다.
7. 회기:
     갑: 대회는 매반년 1차로 하고 6월, 12월에 개최한다. 만약 특별한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임시 이를 소집할 수 있다.
     을: 평의회는 매월 1차 개최한다. 만약 특별한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임시이를 소집할 수 있다.
8. 경비: 총사 경비는 상년연(常年捐),특별연의 2항으로 나눈다. 상년연은 사원이 부담하는 것으
           로 하고 매년 1원을 춘추 2계로 나누어 납부 한다.
           특별연은 평의부를 의결을 거쳐 각지사와 사내 사외에 향해 이를 모집한다.
9. 보고: 매년 말에 총사와 각지사의 경과 사적을 종합하여 보고하여서 참고에자 한다.
10. 부측: 본 가규칙중 만약 수정을 가할 사항이 있을 때는 대회출석 사원의 과 반수의 제의에
           의거하여 수정할 수 있다.

서기 1921년 5월

조동호, 여운형, 유종주, 여곤, 윤기섭, 손경아, 주검추, 김홍서, 적간, 혁조선, 김규식, 황경완, 황종한, 한진교, 서병호, 손양성, 두함장, 송병조, 윤현진, 왕길인, 보화인, 여붕, 유육지, 반혜제, 이대년, 김인전, 탕종유, 하구배, 김병조, 이원익, 최창식, 도인권

이를 통해 앞의 결사를 평가하건데 주의면에 있어서는 한중 양국 국민의 행복을 도모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제의 침략이 구축됨을 전제로 해야만 한중양국민의 행복이 증진 도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위치는 상해에 두며 평의부와 집행부의 2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의 직권을 보면 평의부는 입법, 건설, 결의의 일을 전담하게 되어 있다. 집행부는 이 조직의 일체의 진행을 집행하며 외부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경비는 두가지로 나누어 예산을 집행하되 매년 1원을 춘추 두 번 나누어 납부하며 평의부의 의결을 거쳐 각 지사와 사내에 향해 이를 모집하게 되어 있다는 것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한중호조사는 마침내 1921년 8월 15일자로 태평양회의에 대한 제안과 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경 워싱턴의 동회의장 미국 대통령 하딩에게 보낸 바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시 워싱턴에 있던 한인미국위원장 서재필을 태평양회의에 대한 정사로 하고 같은 화부에 있는 한인미국위원부의 유력자 정한경을 비서로 하기로 내정하고 있었으나, 당지에 있는 정부반대측 한인은 따로 전학무총장 김규식을 부사로 하고 태평양회의에 파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표자의 특파는 경비를 요하므로 과연 실행할 수 있느냐가 매우 의문이었다. 안창호는 「호노룰루」에서의 한인간의 알력,마찰을 진정시키고 또 태평양회의에 관한 운동비를 모집하기 위해 「호노룰루」로 갈 생각도 있는 듯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지 한인과 중국인의 일부 사이에 정치적 운동 호조의 취의로 조직된 한중국민호조총사는 이즈음 별지 한문의 선언서(태평양회의에 제출할 것이라고 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한국문제의 조항도 포함하였다)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영어로 번역하고 인쇄에 부쳐 미국방면으로 보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누차 국무원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던 바 이는 태평양회의에 관한 선전자료를 수집 토의한것이며, 약20항에 걸친 것이었다. 한인중 보수분자로 지목되는 신규식, 이시영, 이동녕 등은 태평양회의의 기회를 놓쳐서는 한국독립운동이 인정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품고 운동방법에 대해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비용의 마련이 어려웠기 때문에 유효한 활동은 매우 곤란한 실정이었다. 별지에 선명하고도 정성스럽게 초안, 수정해서 보낸 원문의 선언서는 다음과 같다.

한중국민호조총사의 태평양회의에 대한 제한과 선언

구주대전의 영향으로 하여 민족자결의 요구가 고창되고 러, 독, 양국이 서로 이어 혁명한 동시 폴란드, 체코 등은 일제히 독립하고 불란서 또한 「알사스」, 「로렌」의 2주를 회복하기에 이르러 착착 그 실현을 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미국 전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국제연맹의 정신은 관철되기에 이르지 못하고 세계 개조의 기운은 이에 일돈좌를 초래하였다.

무릇 현시의 세계정국에서 평화 파괴의 화기를 포장하기는 극동의 국세보다 심한 것은 없다. 서구 각국이 전후의 경제회복, 식민지의 정리 등 전후 건설의 제 문제에 몰두하여 동아문제에 용훼할 틈이 없음을 타고 일본은 착착 대륙 침략의 마수를 뻗치려 한다. 일본은 일찍이 대륙침략을 국시로 하여 저 일청 일로의 2역을 거쳐 대만을 점유하고 한국을 병합하고도 그 위에 싫증이 없는 낭심을 가지고 강제로 만봉 복건을 그 세력범위로 하여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구실로 하였다.

우리 한중양국의 인사는 일본이 자유 평등전애 호조의 정신으로 임할 것을 희망하고 우리 또한 이 정신으로 보답하려고 기념하나 어찌하랴. 일본은 그 전통적 침략주의를 버리지 않고 또 일청 일로 양역의 요행스런 전승에 익숙해 힐사불신하며 국제조약을 보기를 마치 폐지와 같은 태도로 나와 드디어는 1859년의 마관조약을 폐기하고 한국을 병탄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민은 절대로 그의 속박을 받기를 원치 않고 이미 1919년 3월 상해에서 독립을 선포하였음은 세인이 널리 지실하는 바이다.

앞서 구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일영동맹의 의무 이행을 성명하고 독일인의 세력을 구축하여 요주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초의 성명에 따라 이를 중국에 환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중국을 강박하여 21개조를 승인케하였다.

그리고 영국, 불란서, 이태리, 러시아의 제국이 전쟁 때문에 타를 돌볼 틈이 없음을 알고 이를 강박하여 밀약을 체결하고 강화회의에서는 이에 절구하여 독일이 산동에서 가지고 있던 이권을 그대로 계승할 것을 승인케 하였다.(중략)

한중호조사는 세계와 극동의 평화를 애호하는 까닭에 태평양회의에 대해 다음 조건을 제출하려고 하였다.  이는 모두 11가지이다.

1. 1905년과 1910년의 소위 합방조약의 전면무효선언인 것.
2.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상의 시설철거.
3. 한국과 극동공화국의 대표 파견을 주장할 것.
4. 한중 두나라의 주권과 동아평화를 방해하는 일영동맹의 취소.
5. 중일 21개조 등의 취소.
6. 중국은 요주만과 일본이 산동에서 점유하는 이권을 회수할 것.
7. 일본의 만주, 몽고 복건에서의 특수 세력을 취소할 것이다.
8. 중국은 대만을 회수할 것.
9. 중국은 영사재판권과 외국우편국의 철폐를 주장할 것.
10. 각국은 중국에서의 조계를 환부할 것.
11. 각국은 중국에 있는 주둔병을 철퇴할 것.

위의 제조건의 한중 양국이 일치하여 주장한 것으로, 다행히 그 목적을 다할 수 있다면 다만 본사 동인의 사행만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한중연합항일투쟁은 따지고 보면 자금문제가 가장 크게 신경써야 할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유정 조동호는 이를 다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경비조달을 염출하고자 고심하였다. 이에 참여한 인사는 한국인이 104명 중국인이 52명 합계 156명에 달하고 있는바 조동호는 필요한 경비를 모집하기 위해 유예대회(遊藝大會) 개최를 생각하였다.

한중호조사는 조동호를 비롯하여 경비조달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 하였다. 그리하여 이의 기금 모집의 목적으로 지난2일 상해 사천로 중국기독교청년회당에서 연예회를 개최하고 입장료로 해당하는 값을 충당할 목적하에 거행한 연예회는 아래와 같다. 그런데 신파극으로 안중근의사가 「하르빈」에서 이등방문을 총살한 장면은 너무나 잔인하여 그들의 독립운동사상 고취로서의 일반한인의 악랄한 수단에는 일반관객인 외국인에 이상한 모양의 감을 주어 그들을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기(記)

    장소: 사천로 중국기독교청년회당
    일시: 3월 2일 오후 7시 15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입장자: 약 400명
    입장료: 1인 1불

    연예순서

    군악개회: 혜아원
    주석보고: 중국인 오산
    축사: 중국신문기자 심탁오와 진유신의 간단한 축사가 있었다.
    무용: 한국부인 김현숙
    대소적벽가: 한국부인 김현숙
    한국가야금: 현인권
    한국승무: 김현숙
    하모니카: 최찬학
    신극: 1910년 하르빈에서 안중근의사가 이등방문을 총살한 광경 및 이등방문과 이완용의 조약 체결 장면
    추이, 연극중 교민단장 도인권은 기립하여 이완용이 이등에게 머리를 세우 고 굴복하는 장면이 있음을 보고 이 장면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분개하 였다.
    답사: 내빈 최준

    폐회

이같은 경비조달의 목적을 위한 공연은 성공리에 진행되어 상당액을 모금, 이 회합의 목적수행에 충당할 수 있었다.

조동호는 동지들과 같이 독립투쟁의 효과적인 방책을 이 한중호조사의 중국측 인사인 서겸, 오산 등과 제휴하여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조동호의 한중호조사 창립과 항일투쟁은 이처럼 눈부신 바 있었다. 이것은 31세 때부터 32세 때에 걸친 청년시절의 일이었다.

1922년 1월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 56인중의 한 명으로 참석하여  <한국의 경제,농민,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 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한국대표로는 김규식(金奎植)과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3인이 연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