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경오 2년(1390), 대명(大明) 홍무 23년
○ 봄 정월에 낭사 윤소종(尹紹宗)과 이첨(李詹) 등이 소를 올리기를, “변안열(邊安烈)이 신우(辛禑)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워 왕씨의 종사(宗祀)를 영원히 끊으려고 한 것은 실로 김저(金佇)가 명백하게 말한 바이오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오니, 청컨대, 헌사에 내려 형벌을 밝게 적용하고 가산을 적몰하소서." 하였다. 왕은 일이 사(赦)하기 전에 있었다 하여 그 관직만 파면시켰다. 소가 또 올라가니, 관직을 삭탈하고 한양(漢陽)으로 귀양보냈다.
○ 낭사에서 소를 올리기를,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영통(洪永通),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우현보(禹玄寶), 판삼사사 왕안덕(王安德), 찬성사(贊成事) 우인열(禹仁烈),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등은 실상 안열(安烈)의 역모에 참여하였으니, 왕씨의 신하들과는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안열과 함께 헌사에 내려 이들을 극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답이 없었다.
○ 낭사에서 다시 아뢰기를, “영통은 인임에게 편당하여 아부하고, 견미ㆍ흥방과 더불어 악한 일을 같이 하고 서로 도왔습니다. 여러 흉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영통만은 우의 인척인 관계로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현보는 벼슬이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잃을까 근심하였고, 재물에 염치가 없었으며 간사하고 아첨하여 우리의 예절과 풍속을 무너뜨렸습니다. 안덕은 장수란 명칭을 가지고서도 매양 패배하였으며, 남포(藍浦)의 전쟁에서는 전군이 크게 패하여 국가의 위엄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군법으로 죽음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인열은 도필리(刀筆吏)에서 출신(出身)하여 권세 있는 사람의 연줄을 타서 정부(政府)에 참여하였으나, 백성들에게 공덕을 끼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희계는 흥방과 인친(姻親)을 맺어 불의를 멋대로 행했으며, 또 우의 아내인 최천검(崔天儉)의 딸 덕으로 요행히 무진년의 난을 면하였습니다. 이 5명은 죄악이 천지 사이에 가득히 찼으니, 그것만으로도 반드시 목베어야 될 것이온데, 하물며 안열의 모의에 참여하여 신우를 추대하고자 하였으니, 이들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므로,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여 맡은 관사(官司)에 내려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소가 올라갔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간관이 대궐 문에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며 한낮이 되어도 물러가지 않으니, 왕이 심덕부와 우리 태조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고, 마침내 교지를 내리기를, “안열은 이미 관직을 삭탈하여 귀양보냈고, 영통ㆍ현보ㆍ희계 등은 김저의 진술에서 모두 관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고, 안덕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모의에 찬동하여 계책을 정하였으며, 인열은 설장수와 함께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 우의 광패(狂悖)한 형상를 아뢰었으므로, 김저의 모의에는 반드시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관직만 파면시킨다." 하고는 밀직 부사 유용생(柳龍生)을 몰래 보내어 영통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있으니 경 등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에 여우가 수창궁(壽昌宮) 서문에서 나와 달아나 효사관(孝思觀)의 서산으로 들어갔다. 낭사에서 다시 소를 올리기를, “여우는 음의 종류이며 구멍에 사는 짐승이니, 소인의 권세에 의탁해 있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전(傳)에 소인의 제거하기 어려움을 논하면서 '성에 구멍을 내고 있는 여우이니, 물을 부을 수도 없다.' 하였으니, 성은 권세를 비유한 것이며 여우는 소인을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신등이 대궐문에 엎드려 소인을 제거하기를 청하는데, 요망한 여우가 이에 나타났으니, 이는 소인이 모두 제거되지 않은 상이며 하늘이 경고한 것이 명백합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결단을 못 내리고 여우처럼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고 해치는 입을 초래한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위로는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고, 다음으로는 조종의 업을 생각하여 안열 등 6인의 죄를 다스려 조종에 사과한다면 하늘의 견책을 그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예조에서 적경원(積慶園) 세우기를 의논하여 청하기를, “지금 서원군(西原君) 이하의 4대를 봉하여 높이고 원(園)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는 일을 삼가 전대의 전고에 의거하여 이를 의논하겠습니다. 한(漢) 나라 말기에 왕망(王莽)이 제위를 빼앗았는데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중흥하여 한실(漢室)을 바로잡아 회복시켰습니다. 효원황제(孝元皇帝)는 세대가 제8대에 있고 광무황제는 세대가 제9대에 있으므로 원제(元帝)를 고묘(考廟)로 삼고 4친(親)의 사당을 낙양에 따로 세워 아버지 남돈군(南頓君) 이상에서 윗대 할아버지 용릉절후(?陵節侯)까지를 제사지냈습니다. 송(宋) 나라의 영종(英宗)은 인종(仁宗)의 종형(從兄) 복왕(?王)의 아들로서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복왕을 높이는 전례(典禮)를 의논하게 하였더니, 사마광(司馬光) 등이 의논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생부 복왕은 고관 대작으로 높여 황백(皇伯)이라 일컫고 이름을 일컫지 않는다' 하였으며, 여씨[呂海]는 정자(程子)의 의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자기를 후사로 삼은 이를 부모라 하고, 그 생부모를 백숙부모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천지의 커다란 법이요, 생민의 큰 윤리이므로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나를 낳은 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크니, 정통(正統)에 뜻을 전일해야 되겠지마는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모두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사체를 헤아려 별다른 칭호를 따로 세워야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한 것이 광무황제와 같아서,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여 조종의 제사를 받들었으니, 서원군(西原君) 이하의 조상을 마땅히 한 나라와 송 나라의 고사에 의거하여 고관대작으로 높이고, 원(園)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어 다른 아들로 제사를 받들게 하고, 자손들에게 작(爵)을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 예(禮)에 있어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을 높여 삼한국대공(三韓國大公)으로, 순화후(淳化侯)는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비(妃)는 마한국비(馬韓國妃)로, 익양후(益陽侯)를 진한국공으로, 비(妃)는 진한국비로, 서원후(西原侯)는 변한국공으로, 비(妃)는 변한국비로 삼을 것이며, 원을 세워 '적경원(積慶園)'이라 하고 사관을 두어 적경서(積慶署)라 하며, 제향은 삭망과 사맹월(四孟月)에 하기로 제도를 삼으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부인과 중들에게는 작을 봉하지 말기를 청하니, 그 청을 따랐다.
○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위조(僞朝)의 첨설 직첩을 회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경연관을 두어 심덕부와 우리 태조를 영경연사로 삼고, 정몽주와 정도전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왕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고자 하여 몽주에게 그 서문을 강하도록 명하니, 강독관(講讀官) 윤소종(尹紹宗)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중흥하였사오니, 이제(二帝 요순)와 삼왕(三王 하ㆍ상ㆍ주)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오며, 당의 태종은 취할 것이 못 됩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어서 제왕의 다스림을 천명하소서"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이때 큰 범을 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으니, 도전이 말하기를, “여러 도에서 정식 공물 외에 바치는 것은 물리치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으면 유사에게 맡겨서 나라의 재용으로 마련하소서. 큰 범 같은 것은 길에서 수십 명이 이를 메고 왔으니 번거로운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더구나 그 고기는 제사에도 쓰지 못하니 장차 어디에 이를 쓰겠습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겨 공물과 헌납을 모두 유사에게 맡겼다.
○ 우리 태조에게 8도의 군마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두고 번을 나누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군수물자로 늠료(?料)를 주었다.
○ 왕의 어머니 복녕궁주(福寧宮主)의 부(府)를 세우고 칭호를 숭녕부(崇寧府)라 하였다.
○ 사헌부에서 대간으로 하여금 임금의 명전에서 시정의 잘잘못을 아뢰게 하도록 청하니, 이를 따랐다.
○ 농사가 흉작이어서 전조의 6분의 1을 감면하였다.
○ 대사헌 성석린과 좌상시 윤소종 등이 변안열을 베기를 청하였다. 이때 강도가 동대문 밖에서 사람을 겁탈하니, 소종 등이 아뢰기를, “당 나라의 헌종(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를 점령하고 배반하니, 승상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裴度)가 이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사도(李師道)가 번진(藩鎭)으로서 명성과 위세를 믿고 도적을 보내어 무원형을 죽이고 배도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가버렸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원제를 용서하여 번진을 달래기를 의논하였는데, 헌종이 듣지 않고 배도를 승상으로 삼아 마침내 원제를 평정하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적이 서울 가까이 있고 또 한양(漢陽)에도 있으니, 강도의 발생은 실상 이 무리들에게서 연유된 것이므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가서 소를 올리기를, “전에 안열의 대역에 대해 다섯 번이나 소를 올려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관대히 용서하여 한양(漢陽)에 안치하기만 하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신우를 강릉으로 옮기니, 탄식하기를, '안열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더구나 안열은 조종에게 죄를 지었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사로 하여금 그 죄를 밝게 다스려 난적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소를 헌부에 내리며 말하기를, “귀향간 곳에 가서 다시 국문하지 말고 목 베라." 하였다. 헌부에서 즉시 한양 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통첩하여 안열을 목베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아뢰기를, “대신을 어찌 이유도 묻지 않고 곧바로 극형에 처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좌사의 오사충(吳思忠)과 집의 남재(南在)를 보내어 가서 국문하게 하였는데, 사충 등이 길을 떠나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니 안열이 죽은 뒤였다. 안열이 형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신우를 맞아 오려고 의논한 것이 어찌 나 혼자일 뿐이랴." 하면서 말을 하고자 하였으나, 백흥이 묻지 않았다.
○ 문하평리 윤호(尹虎)ㆍ유만수(柳曼殊), 첨서밀직 우홍수(禹洪壽), 동지밀직 유광우(兪光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최윤지(崔允沚), 밀직 부사 유용생(柳龍生),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와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과 밀직 부사 김인찬(金仁贊), 지신사 이행(李行), 밀직사 강회백(姜淮伯), 지밀직 윤사덕(尹師德)을 공신(功臣)으로 삼았는데, 창(昌)을 폐하고 왕을 세울 때에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행은 굳이 사양하였다. 윤소종 등이 아뢰기를, “상벌은 나라의 큰 권병이니, 남용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태조 때에 김낙(金樂)과 김철(金哲)도 오히려 6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화령백(和寧伯 이성계(李成桂)) 이하 9명을 종묘에 고하고 상을 시행하였는데, 윤호 등의 공은 사람들이 듣지 못한 바이오니, 이를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급전도감(給田都監)에서 비로소 전적(田籍)을 반포하였다.
○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왕강(王康)을 경상도 수군도체찰사 겸 방어염철사로 삼았다.
○ 왕이 경연에 나가서 시강관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이미 많으니 비록 성인의 경서를 읽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 같다." 하니, 밀직 박의중(朴宜中)이 아뢰기를 "옛날에 진(晉) 나라의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77세이니 배우고자 하나 너무 늙은 듯하다.' 하니, 사광이 아뢰기를, '어찌 촛불을 밝히지 않습니까.' 하였습니다. 평공이 이르기를, '어찌 신하가 되어 임금을 희롱하는가.' 하니, 사광이 아뢰기를, '눈먼 자가 어찌 감히 그 임금을 희롱하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소년 시절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처음 돋는 것과 같고, 장년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빛나는 것과 같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촛불을 밝힌 빛과 같다 하였으니 촛불을 밝힌 밝음이 어두운 길을 가는 것과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평공이 옳게 여겼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춘추가 아직 젊으시니 배움이 늦지 않았습니다." 하니, 왕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 어느 사람이 익명서를 조준(趙浚)의 집에 보냈는데, 그 글에, “고영수(高永壽)가 우인열과 더불어 난리를 일으키려 한다." 하였다. 조준이 그 사람을 찾아 잡아 보니, 곧 영수의 형 영손(令孫)이 한 짓이었다. 영수와 영손을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니, 영손이 재물을 다투어 틈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함한 죄를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 낭사 윤소종 등이 글을 올리기를, “예로부터 난신적자가 당(黨)이 없이 감히 악한 짓을 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등이 적이 듣건대, 역신 안열이 형에 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신이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지만 함께 모의한 자가 많은데 나만 죽는 것인가.' 하였으나, 김백흥이 묻지도 않고 목베었습니다. 안열의 심복 이을진(李乙珍)이 반드시 그 모의에 참여하였을 것이오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백흥(伯興)이 역적에 편당하여 죄상을 가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민수는 적신 이인임에게 편당하여 멋대로 탐욕하고 포악함을 부려 풍속을 크게 문란하게 하였으며, 또 주장(主將)으로서 왕씨(王氏)를 세우려는 의논을 가로막고, 창을 세워 종묘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권근(權近)은 성지를 사사로이 열어보고는 신씨(辛氏 우 창)에게 편당ㆍ아부하여 이임(李琳)에게 먼저 알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이오며, 조종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맡은 관사에 내려 법대로 처형하소서." 하였다.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 “민수는 대의(大義)를 주장하여 회군한 공이 있으므로 거듭 논죄할 수 없으니, 마땅히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이며, 백흥은 파면하라." 하였다.
○ 제강(提控) 박위생(朴爲生)과 규정(糾正) 신효창(申孝昌)을 청주(淸州)로 보내어 을진을 국문하니, 진술한 말이 소윤 원상(元庠),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경도(李庚道), 정지(鄭地)ㆍ이임(李琳)ㆍ이귀생(李貴生)과 관련되었다. 대간과 순군부에서 백흥을 국문하고, 또 원상에게 안열ㆍ을진과 더불어 모의한 정상을 국문하니, 원상이 말하기를, “사전 개혁을 원망하여 신우를 맞아 세워 그 일을 저지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하였는데, 원상은 안열의 처족이다. 또 사의(司議) 오사충과 장령 권담(權湛)을 안주(安州)로 보내어 경도를 국문하게 하고, 집의(執義) 남재(南在)와 헌납 함부림(咸傅霖)을 전주로 보내어 이임을 국문하게 하고, 정지와 귀생을 계림(鷄林)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백흥이 얼마 뒤에 옥 안에서 죽으니, 왕은 옥관의 엄한 형벌 때문에 죽었는가 의심하여 정몽주에게 말하기를, “무릇 죄수를 국문할 때에는 마땅히 그 정상을 천천히 살펴야 할 것인데, 지금 순군부에서는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갑자지 참혹한 형벌을 가하니, 죄 없는 사람이 더러 죽게 되어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데, 하물며 재상은 비록 무거운 죄가 있더라도 사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원상을 석방하였다.
○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를 설치하였다. 왕이 정도전에게 말하기를, “위조(僞朝)의 첨설직(添設職)을 폐지하고자 하는데,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쓰는 법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문학(文學)ㆍ무과(武科)ㆍ이과(吏科)ㆍ문음(門蔭)이었습니다. 이 4과로 사람을 뽑되 해당되면 이를 쓰고 해당되지 않으면 버렸으니, 그 누가 원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관질이 높은 자는 어떻게 처우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송(宋) 나라에서는 대단관(大丹館)과 복원궁(福源宮)을 두어 제조에 임명하기도 하고 제거(提擧)에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를 본받아 별도로 궁성 숙위(宮城宿衛)를 두고, 관직이 밀직ㆍ봉익(奉翊)인 자를 제조로 삼고, 3ㆍ4품의 관직은 제거로 삼는다면, 정사가 그 마땅함을 얻어 체통이 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지방에 있는 자는 어떻게 처우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서울에 있는 자를 이와 같이 처우하면 밖에 있는 자도 다투어 와서 왕실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관질의 높고 낮은 것으로서 제조나 제거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이색ㆍ조민수가 의논하여 신창을 세우고, 또 신우를 맞아 돌아오고자 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 2월에 간관이 또 소를 올려 이색ㆍ조민수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이에 이색의 관직을 삭탈하고 조민수와 함께 모두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간관이 또 소를 올리기를, “현릉(玄陵 공민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니, 이인임이 신우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대신들 중에 감히 의논을 달리하는 자가 없었는데, 죽은 판삼사사 이수산(李壽山)이 홀로 종친을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우가 왕이 된 뒤에, 신돈의 비첩 반야가 스스로 말하기를, '임금의 어머니다.' 하였는데, 인임 등이 거짓으로, '우는 현릉이 사랑했던 죽은 궁인의 소생이다' 하여 그 명씨를 찾았으나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별하지 못한 자는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마는, 어찌 그 어머니를 분별하지 못한 자가 있겠는가.' 하니, 인임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구원에 힘입어 겨우 귀양하게 되었습니다. 수산 등의 몸은 비록 죽었지만 충의가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원컨대 포상과 시호를 추가하여 그 무덤에 조제(弔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사의(司議) 오사충(吳思忠), 집의 이고(李皐), 규정(糾正) 전시(田時)를 장단(長湍)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하게 하고, 명하기를, “이색을 놀라게 하지 말라. 만약 복죄하지 않거든 마땅히 다시 교지를 받아라." 하였다. 이색이 복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신창(辛昌)을 주장하여 세운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니, 조민수와 대질해라." 하였다. 사충이 전시를 보내어 아뢰니, 왕이 명하여 고문을 가하게 하였다. 전시가 돌아와서 교지를 선포하고 옥졸로 하여금 곤장을 잡고 곁에 서서 밤낮으로 핍박하고 또 민수가 창녕에게 자백한 진술을 보이니, 이색이 말하기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을 세우기를 의논할 때에 민수가 나에게 종친과 아들 창(昌) 중에 주가 적당하냐고 물었으나, 이때는 민수가 주장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으며, 더구나 창의 외조부 이임(李琳)과 친족간이라 마음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우가 왕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아들 창을 세워야 된다고 대답하였을 뿐이고, 마음대로 세우기를 맨 먼저 권하여 말한 적이 없다. 지난해 남경에 조회 가서 예부에 이르니, 상서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느냐. 왕과 최영이 모두 갇혔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최영이 왕으로 하여금 요양(遼陽)을 범하도록 하였으나, 장군 조민수와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주(義州)까지 왔으나, 감히 출발하지 못하니 최영이 자주 독촉하므로 마지못하여 군사를 돌이켜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장수들을 살해하고자 하므로, 태후가 왕을 폐하고 강화에 안치하였으니, 개경과의 거리가 20여 리이며, 구도의 경치 좋은 곳이므로 성정을 수양함이 이 땅과 같은 데가 없으며, 또 재상이 시위하고 의장ㆍ기물과 조석으로 받들어 모심이 모두 평일과 같았는데 어찌 내쫓았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돌아와서 이 시중(李侍中)에게 말하기를, '원명(原明)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흥(驪興)은 땅이 머니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습니까.' 하였는데, 다만 이 말뿐이었고 진실로 맞아 세우자는 의논은 없었다." 하였다. 사충 등이 진술을 받아 돌아왔다.
이색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진(晉) 나라의 원제(元帝)가 들어가서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치당(致堂) 호씨[胡寅]가 이를 논하기를, '원제는 성이 우씨(牛氏)인데도 사마씨(司馬氏)라고 거짓 일컫고 진(晉) 나라의 종사를 계승하였는데, 동진(東晉)의 군신(群臣)이 어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았을까. 호갈(胡鞨)이 번갈아 침범하여도 강좌(江左)가 미약하였으니, 만약 구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인심을 결속시킬 수 있었으랴. 이를 버리고 처음 창건하는 것은 어려움과 쉬움이 현절(懸絶)한 것이다. 이것도 형세를 이용하여 이를 성취시키는 데 있어 마지못하여 한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 내가 신씨(辛氏)를 세우는데 감히 이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이 뜻이다." 하였다.
○ 왕이 조계종(曹溪宗)의 중 찬영(粲英)을 맞이하여 스승을 삼고자 하니, 대사헌 성석린(成石璘)과 좌상시 윤소종(尹紹宗) 등이 대궐문에 엎드려 이를 간하고, 또 연장(聯章)하여 소를 올리기를, “삼대의 제왕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음양(陰陽)을 고르게 다스리는 자를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탕왕(湯王)도 이윤(伊尹)을 스승으로 삼아 하(夏) 나라를 치고 백성을 구제하여 6백 년의 상(商) 나라를 창건하였으며, 무왕(武王)도 태공(太公)을 스승으로 삼아 용맹스럽게 떨쳐 일어나 주(紂)를 목 베고 8백 년의 주(周) 나라를 창건하였습니다. 요진(姚秦)은 오랑캐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가서 망하였으며, 전의 원(元) 나라는 번승(番僧) 파라발제(婆羅跋蹄)를 스승으로 삼았다가, 말세에 가서 천자의 높은 몸으로서 중을 종처럼 섬겨 복과 수를 바랐으나, 마침내 응창(應昌)의 패(敗)함을 초래하였습니다. 불교는 아비도 무시하고 어미도 무시하는데, 요진과 전의 원(元) 나라는 오호(五胡)ㆍ북적(北狄)의 풍속으로 제왕(帝王)의 다스림을 본받지 않고 강상(綱常)을 문란 시켰으므로 하늘에 죄를 범하여 난망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중흥하셨으니, 바야흐로 법을 만들고 모범을 보여서, 성스럽고 신령한 자손들이 억만세토록 따르게 해야 할 것이온데, 이제 다시 오랑캐의 실패한 점을 물려받아 이에 불교를 스승으로 삼으려 합니다. 국가를 가진 자는 정사를 세울 때에 그 명분에 따라서 마땅히 실적을 구해야 합니다. 이른바 사(師)란 것은 그 도를 본받는 것이온데, 석씨(釋氏)는 신하와 자식으로서 임금과 아버지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산림으로 들어가서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만약 그 법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삼한의 백성들을 중으로 만들고, 반드시 구묘(九廟)의 제사를 끊어지게 해야만 그 명분에 맞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임금과 아버지를 무시하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말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의 도를 높여 삼한의 태평한 업을 여소서."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다. 찬영(粲英)은 숭인문(崇仁門)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 왕세자가 서연(書筵)을 개설하였다.
○ 대간이 왕의 면전에서 직접 아뢰는 법을 폐지하니, 윤소종 등이 소를 올리기를, “요순은 사악(司岳)에게 자문하여 사방의 문을 열어놓고, 사방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하여 유익한 말이 숨겨짐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한 말이라도 혹시 아래에서 막혀 위에 통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신하에게 명하기를, '나의 도리에 어긴 일을 네가 보필할 것이니, 너는 내가 보는 데서는 복종하고 안 보는 데서는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너도 또한 착한 말을 하라.' 하였습니다. 삼대의 성왕들도 모두 이 도를 따라서 꼴을 베는 천하고 무식한 자에게도 물었으며, 백공(百工)은 각각 자기의 기예에 관한 것을 간하였으며, 비방(誹謗)의 나무가 있고 진선(進善)의 정(旌)이 있었으며, 필부필부의 말도 모두 위에 들리게 하였으니, 상하가 서로 사귀는 것이 태괘(泰卦)가 되었습니다. 주(周) 나라가 쇠함에 미쳐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게 하여 이를 그치게 하다가, 드디어 문왕ㆍ무왕의 천하를 잃었습니다.
진(秦) 나라는 충성을 다하여 간하는 자를 요망하다고 하여 이를 금지시켰으니, 간신 조고(趙高)가 임금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여도 이를 말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천하를 얻은 지 2세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한(漢) 나라로부터 원(元) 나라에 이르기까지 언로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또 평안하였으며,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어지럽고 또 멸망하였습니다. 이성이 나라를 도둑질한 이후로 대간이 입을 다물어서, 무진년에 요동을 치는 일에 이르러서도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5일 만에 한 번씩 조회에 나와서 대간으로 하여금 시정의 잘잘못을 면전에서 아뢰게 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뛰면서 태평을 기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대간으로 하여금 다시 면전에서 아뢰지 못하게 하오니, 어찌 크게 중흥의 정치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말 한마디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은, 이를 이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다시 대간에서 그전대로 면전에서 아뢰게 하시고 여타의 여러 관사(官司)도 각기 그 맡은 일을 가지고 말을 올리게 하여 전하의 총명을 넓혀서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소서." 하였다.
○ 서울 안의 5부와 동북면의 부ㆍ주(府州)에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을 두었다.
○ 위조(僞朝)에서 가증(加贈)한 선왕ㆍ선비(先妃)의 시호를 삭제하였다.
○ 대간이 다시 이색ㆍ조민수의 죄를 논핵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 윤소종 등이 소를 올리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니 잠시라도 곁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신우 부자의 일은 대체에 관계된 것이므로, 전하께서 대간에게 명하여 가서 그 사실을 추궁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종사를 중히 여기는 한때의 임시 변통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대간을 밖으로 나누어 보내어 전하의 이목의 직임을 이지러지게 하였으니, 전혀 중흥의 좋은 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대간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며 임금에게 훌륭한 일을 하도록 권하는 임무를 맡기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교지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문교와 무비(武備)를 어느 한 쪽이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데, 근년 이후로 법제가 점점 해이하여 인재는 일어나지 않고 도적이 일어나 돌아다니니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한다. 벽옹(?雍 천자의 나라에 세운 태학)에 나가서 국로(國老)를 배알하고, 농한기에 무예를 연습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내가 문묘에 배알하여 유학을 권장하고, 전함(戰艦)을 시찰하여 군용(軍容)을 사열하고자 하니, 맡은 관사(官司)에서는 아뢰어 시행하라." 하였다.
○ 3월에 사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지난번 위조 때에 탐관오리의 무리들이 토전과 노비로 권세를 부려서, 나쁜 평판이 중국에 들리게 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 관직을 삭탈하고 전지를 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니, 답이 없었다.
○ 왕이 장단(長湍)에 행차하여 전함을 관람하려고 하니, 대간이 소를 올리기를, “주상께서 하는 일을 반드시 사관(史官)이 쓰게 되는데 쓴 것이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후사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지금 전함을 검열하여 무비에 유의하고자 하니, 이는 진실로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 않는 원대한 계책입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들은 무비를 정돈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모두 사냥한다고 여기는데, 하물며 지금 농사일이 막 시작되었으니, 전하의 행차가 이르는 곳의 길을 닦는 것과 접대의 비용이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급한 것을 말해보면 교제(郊祭) 참례와 능묘(陵墓) 배알과, 적전을 갈고 문묘에 배알하는 일이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당분간 이 일을 정지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풀고 농사를 방해하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중 심덕부에게 묻기를, “오늘 일을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행동거지는 대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뜻을 정하고 가려 하였으나, 대간이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성석린(成石璘)이 곧장 대궐 안에 들어와서 말하기를, “대간의 말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후에 또 장단에 행차하고자 하니, 간관 이서(李舒)가 이를 간하여 이를 그쳤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우홍수(禹洪壽) 등이 변안열(邊安烈)의 모의에 참여하였음을 극언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로,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로, 왕안덕을 강원군(江原君)으로, 우인열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삼고, 윤소종과 오사충은 모두 다른 관직으로 옮겼는데 그들이 탄핵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열을 불러서 관직에 나아가도록 재촉하니, 인열이 말하기를, “대간이 글을 번갈아 올려 신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신을 한 변방으로 폄출시켜 여생을 보전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만약 스스로 폄출되기를 원하면 이는 그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하였다.
○ 왕이 예성강(禮成江)에 행차하여 전함을 관람하고, 드디어 창릉(昌陵)ㆍ현릉(顯陵)ㆍ양릉(陽陵)ㆍ현릉(玄陵)의 4능에 배알하였다.
○ 헌납 함부림(咸傅霖)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대간과 형조에 명하여 왕안덕ㆍ우인열ㆍ우홍수 등을 논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너는 이를 아는가." 하니, 부림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를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이를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논하여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미 임금이 되었는데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상벌이 적당하지 않으면 대간이 논박하는 것은 진실로 그 직책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죄를 주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언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현릉(玄陵) 시대에도 죄를 얻은 간관이 많았다."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현릉을 본받을 것 있겠습니까.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있어서 조금 현군(賢君)이라고 일컬어졌으나, 그 후에는 자못 스스로 성인인 척하여 신하들을 멸시하였으므로, 비록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마음에 두지도 않으시고 시기함이 날로 심하여 대신과 대간이 모두 그 화를 받았으며, 언로가 막혀져서 점차로 갑인년의 변고를 초래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신의 추대를 받아 대업을 계승ㆍ회복하니, 온 나라 사람이 매우 기뻐하며 태조 때의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현릉(玄陵)을 본받고 마는 것이라면 어찌 신민의 기대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홍수는 지금 공신이 되었으며, 안덕은 회군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인열은 중국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에 우(禑)의 죄악을 아뢰었으니, 어찌 우를 맞아 세우고자 하였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무진년의 회군할 때에는 권한이 이 시중에게 있었으며, 안덕은 그 휘하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이의가 있었겠습니까. 인열이 중국에 들어가 조회한 것은 나라의 명에 몰려서 한 일인데, 또한 어찌 그렇지 아니할 수 있었겠습니까. 홍수가 공신이 된 것은 대간이 이미 분수에 넘는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왔다갔다하는 소인들은 권세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이를 따르니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소서." 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리기를, “삼가 선유한 성지를 보건대, '고려의 배신(陪臣)은 충신과 역적이 뒤섞어져 있어 비록 왕씨라고 속여서 이성으로써 왕을 삼고 있으나, 이는 삼한이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폐하는 강하고 분명하며 과감하게 결단하는 자질을 가지고 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 주고 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 줌으로써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외국의 일을 아는 것도 마치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으니, 천하 사람들이 만 리를 환히 내다본다고 일컫는 것이 참말이며, 그 제후를 회유하고 절사(絶嗣)된 나라를 잇게 하는 뜻도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시중(侍中) 이(李 태조의 옛 이름)도 평소에 충의를 품고 위조에 속을 썩였으나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신우의 광망함이 날로 심하여 드디어 요동을 공격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최영이 이를 주장하니,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힘써 이를 저지하였으나, 마지못하여 압록강에 이르러 의를 들어 군사를 돌이켜 우를 물러앉히고 최영을 내쫓고 종친을 왕으로 세우기를 의논하였습니다. 이는 황제의 선유하는 말을 보고 개연히 반정할 뜻을 품고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대의를 주창하고 대책(大策)을 결정하여, 전하를 받들어 정통을 회복하여 종묘가 그 때문에 제사를 받게 되었으니, 신등이 이르기를, '이것이 천자께서 이른바 충신이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인임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고 총애를 굳게 하고자 하여 우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며, 그 후에 민수와 이색이 함께 그 아들 창을 세웠고, 변안열ㆍ이림ㆍ이귀생ㆍ정지ㆍ우인열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 등이 또 이(李 태조의 옛 이름)를 해치고 우리 왕씨의 종사(宗祀)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다행히 조종의 영에 힘입어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안열의 계책이 행하여졌더라면 어찌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그치겠습니까. 종친들도 죽지 않고 남은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전하의 큰일도 실패되었을 것이오니, 신등은 이르기를, '이것이 천자께서 이른바 역적이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안열이 처형 당했으나 그 나머지의 무리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아서 신등이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포장(褒?)을 가하고, 글이 두 번이나 올라가도 또 도당에 내리지 않으니, 충신과 역적이 뒤섞어져서 크게 중흥의 누가 됩니다. 이임ㆍ이귀생ㆍ정지ㆍ우인열ㆍ왕인덕ㆍ우홍수ㆍ원상ㆍ을진ㆍ경도(庚道) 등의 죄를 밝게 다스리면 충신과 역적이 분별되어 조정이 깨끗하고 밝아져서 난신ㆍ적자(賊子)가 경계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하니 대답이 없었다.
○ 예조 판서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로 추방하였다. 이전에 소종이 상호군 송문중(宋文中)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시중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치지 못하니,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계략에 빠진다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심덕부(沈德符) 등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니, 왕이 노하여 소종에게 죄를 주고자 하였다. 우리 태조가 청하기를, “조정 신하로서 기탄 없이 바른말 하는 사람은 오직 소종 뿐이오니, 이 사람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사위(李士渭)도 말하기를, “소종이 여러 번 소를 올렸으나 전하께서 모두 듣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세상에서 평하기를 반드시, '전하께서 강직한 신하를 싫어한다.'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소종을 높은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 시중은 사직에 공을 세웠는데 소종 등이 감히 모욕하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드디어 추방한 것이다. 소종은 일찍이 처족 최을의(崔乙義)와 노비 문제로 다투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더니, 우(禑)의 폐신(嬖臣) 반복해(潘福海)에게 청탁하여 이를 얻었었다. 이때 조준(趙浚) 등에게 천거를 받아 낭사(郎舍)가 되자 일을 논하기 좋아하니, 왕이 매양 소종이 반복해에게 청탁한 것을 말하면서 매우 미워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환관을 우리 태조의 집에 보내어 병을 위문하고 억지로 나오게 하며, 9공신에게 교서를 내려 칭찬하고 내구의 말 1필, 백금 50냥, 백견(帛絹) 5단(端)을 각각 주고, 우리 태조와 심덕부에게는 금띠[金帶] 하나를 더 내려 주었으며, 내전에서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정유일에 금성(金星)이 달을 꿰뚫었는데, 왕이 삼사 우사 정도전에게, “금성이 달을 꿰뚫었으니 무슨 재앙이 있으려는가." 하니, 도전이 아뢰기를, “재앙이 중국에 있으니 우리 조정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조민수ㆍ이색ㆍ권근을 논핵하고, 또 이임ㆍ이귀생ㆍ이을진ㆍ정지ㆍ우인열ㆍ이경도ㆍ왕안덕ㆍ우홍수ㆍ원상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왕이 우리 태조와 심덕부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논핵한 민수ㆍ권근은 이미 죄를 주었으니, 경등은 마땅히 대간을 타일러서 다시는 논핵을 고집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마침내 이색은 함창(咸昌)으로, 정지는 횡천(橫川)으로, 이임은 철원(鐵原)으로, 귀생은 고성(固城)으로 옮기고, 인열을 청풍(淸風)으로 귀양보냈다. 을진과 경도는 곤장을 치게 하였으며, 안덕과 홍수는 공이 있고, 원상은 다만 변안열의 말만 들었다 하여 그들은 모두 용서하였다.
○ 선왕(先王)과 선비(先妃)의 존시(尊諡)를 더 올렸다.
○ 회군한 공신을 녹(錄)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신우가 무도한 일을 멋대로 행하더니, 마침내 최영과 함께 요양(遼陽)을 침범하고자 하여, 국가로 하여금 천자의 조정에 죄를 지어 사직의 존망을 대단히 급하게 하였는데, 수시중(守侍中) 이(李 태조의 옛 이름)가 조민수와 더불어 제일 먼저 대의를 주창하여 장수들을 타일러 계책을 정하고 회군하여 사직을 안전하게 하였다. 그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한 심덕부 등 45명에게 모두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려 준다. 고령삼사사(故領三司事) 변안열은 비록 몸은 이미 죽었으나 공을 잊을 수 없으며, 예조 판서 윤소종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남재(南在) 등은 사직의 큰 계책을 고사(故事)를 증거로 인용하여 계책을 도왔으니, 역시 칭찬할 만하다. 유사(有司)는 포상의 은전을 거행하라." 하였다.
○ 정비(定妃) 안씨(安氏)를 높여 왕대비로 삼고, 어머니 왕씨(王氏)를 높여 삼한국대비로 삼았다.
○ 헌부에서 경연검토관 신원필(申元弼)이 세자(世子)의 명령을 사칭했다고 탄핵하니, 왕이 그 관직을 파면하였는데, 조금 후에 이를 뉘우치고 말한 자에게 죄를 주려고 하자, 지신사 이행(李行)이 세자에게 몰래 아뢰어 왕에게 간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정도전이 아뢰기를, “원필은 곧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옛 친구이니, 만약 그 죄를 용서한다면 말한 자는 반드시 전하의 기뻐하고 노함이 사심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오니, 전하께서 처음 정사를 시작할 때 베풀어야 할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니, 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밀직 부사 유원정(柳爰廷)을 남경에 보내어 노왕(魯王)의 상(喪)을 위로하였다.
○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다시 변안열의 당(黨)을 논핵하니, 을진(乙珍)과 경도(庚道)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州)로, 우홍수는 인주(仁州)로, 원상(元庠)은 광주(光州)로 귀양보냈다.
○ 윤월에 지신사 이행과 우대언 조인옥(趙仁沃)을 파면시켰다. 과거에 대간이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핵하니, 왕이 재상과 이 일을 의논하려고 하는데, 이행이 아뢰기를, “대간의 논핵이 어찌 공신이 시킨 것이 아님을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손수 소의 끝에, “이색을 좌주(座主)로 삼았습니다."라고 쓰고는 인옥에게 대신 서명하게 하였다. 대간이, “이행은 멋대로 왕의 이목을 가리는 짓을 일삼는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인옥이, “월권하였다."고 탄핵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들을 모두 파면시켰다.
우리 태조와 공신(功臣) 7명이 글을 올리기를, “대간이 이색 등을 논핵한 것은 신등이 아는 바가 아니오나, 사람들이 이로써 신등에게 허물을 돌리고 우(禑)ㆍ창(昌)의 무리들이 신등을 미워하여 말을 조작하고 비방을 일으키니, 신등이 관직을 물러나 비방을 그치게 하고 생명을 보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드디어 모두 집안에 들어앉아 나오지 않으니, 대사헌 성석린(成石璘)도 이 소식을 듣고 역시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대간의 논핵을 고집함은 더욱 심하였다. 왕이 평소부터 이색이 난을 꾀하였다는 것은 믿지 않았으며, 더구나 우홍수(禹洪壽)는 부마(駙馬) 성범(成範)의 아버지인 까닭으로 대간이 탄핵을 그치지 않음을 노하여 어선(御膳)을 들지 않는데도, 대간은 대궐문에 엎드려 명령을 청하였다. 왕이 전지를 내리기를, “이임ㆍ이색 등은 모두 이미 귀양갔으니, 다시는 논핵하지 말라." 하였다. 9공신에게 명하여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곧 이행(李行)을 청주(淸州)로 귀양보냈다.
○ 대간이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아 모두 사직하므로 좌천시켜 수령으로 삼았다. 형조 판서 한상질(韓尙質) 등이 소를 올리기를, “지금 대성에서는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청하건대 모두 유임시켜 그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소서." 했으나, 듣지 않았다.
○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으로, 김사형(金士衡)을 밀직사로 삼아 대사헌을 겸무하게 하고, 우리 태종을 우부대언으로 삼았다.
○ 왕안덕(王安德)을 돌아오게 하였다.
○ 도당에서 무과를 설치하되 제가의 병서에 모두 통하고, 또 무예에 익숙한 자를 1등으로 삼고, 무예를 대강 익히고 병서에 통한 자를 2등으로 삼으며, 병서에 조금 통하거나 한 가지 무예를 익힌 자를 3등으로 삼아 33명을 뽑기를 청하니, 그 말을 따랐다.
○ 5월에 왕방(王昉)과 조반(趙?)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와 중랑장 이초(李初)란 자가 와서 제(帝)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요는 종실이 아니고 곧 그 인친입니다. 요가 이 시중과 함께 병마를 움직여 중국을 범하려고 하므로, 재상 이색 등이 옳지 않다고 하자, 즉시 이색ㆍ조민수ㆍ이임ㆍ변안열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ㆍ우인열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輔)ㆍ이인민(李仁敏) 등을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하고, 이내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면서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ㆍ조민수 등의 성명을 꺼내어 보이므로, 조반(趙?)이 윤이와 대변하기를, '본국이 대국을 성심으로 섬기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윤이에게 묻기를, '너는 지위가 봉군에 이르렀다니 나를 알겠느냐.' 하니, 윤이가 깜짝 놀라서 얼굴빛을 변하였습니다. 예부의 관원이, '성스럽고 밝은 천자께서는 그것이 무고인 것을 알고 있으니, 네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과 재상에게 말하여 윤이의 글 속에 있는 사람들을 힐문하고 와서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간이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그 글을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무술일 밤에 김종연이 도망하므로 경내를 크게 수색하였다. 국가에서 처음 조반의 말을 듣고 추국을 하고자 하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지용기(池湧奇)가 종연과 잘 지내므로 종연에게 비밀히, “공의 이름이 윤이와 이초의 글 속에 있으니 공이 위태할 것이다." 하니, 종연이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옥관이 먼저 매우 매섭고 급하게 유린을 국문하니 진술한 말이 최공철(崔公哲)ㆍ최칠석(崔七夕)ㆍ조언(曹彦)ㆍ조경(趙瓊)ㆍ공의(公義)ㆍ한성(韓成)ㆍ김충(金忠) 등이 관련되었으므로 모두 옥에 가두고, 이색ㆍ이임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청주옥(淸州獄)에 가두었다. 얼마 안 가서 윤유린ㆍ최공철ㆍ홍인계가 옥중에서 죽으니, 저자에 목을 매어 달았다. 윤유린의 종제 사강(思康)은 평소에 행실이 없었다. 일찍이 중이 되었으나 장오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가서 이름을 이(?)라고 고쳤다. 유린의 가신(家臣) 정부개(丁夫介)는 조반을 따라 남경에 들어가서 이를 알고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돌아와서 먼저 유린의 집에 가서 말하였다. 일이 발각되니 부개(夫介)를 가두었다.
을사일에 문하평리 윤호(尹虎), 밀직 부사 박경(朴經), 우사의(右司議) 이확(李擴), 형조 좌랑 신효창(申孝昌), 사헌 규정 전시(田時) 등을 보내어 양광도 도관찰사 유구(柳?)와 함께 이색 등을 청주(淸州)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한창 여러 죄수를 국문하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많이 내려 앞 냇물이 갑자기 범람하여 성의 남문을 부수고 바로 북문에 부딪쳤다. 성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어서 관사와 민가를 거의 모두 떠내려 보냈으며 옥관(獄官)은 허둥지둥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노인들이, “고을이 생긴 이후로 수재가 이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하였다.
○ 김종연(金宗衍)을 봉주(鳳州)의 산 속에서 잡아 순군옥에 가두었는데, 종연이 또 변소 구멍으로 도망하였다. 3일 동안 성안을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엄중하게 지키지 않았다 하여 당직한 영사(令史)를 목 베고 진무 이사영(李士穎)을 가두었다.
○ 왕강(王康)을 밀직부사 삼도도체찰사로 삼고, 한상질(韓尙質)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 황충의 해가 있었다.
○ 6월에 회양부(淮陽府)의 백성 권금(權金)이 밤에 범에게 물렸다. 집에 장정 7,8명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지 못하였는데, 그 아내가 남편의 허리를 안고 문턱에 버티어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힘을 다하여 구원하니, 범이 그제야 버리고 갔다. 다음날 권금이 죽었는데, 도당에서 그 아내를 정표하고 포상하였다.
○ 청주(淸州)에 큰 수재가 있었으므로 이조 판서 조온(趙溫)을 청주에 보내어 죄수를 석방하여 안치하고, 또 오래도록 비가 내리므로 서울의 죄수 1백 50명을 석방하였다.
○ 이조(李?)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정당문학 정도전(鄭道傳)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고, 예문관 제학 한상질(韓尙質)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이와 이초의 무망(誣忘)한 일은 신이 감히 먼저 그 허실을 분별할 수 없사오니, 황제께서 관원을 보내어 캐묻기를 원합니다. 또 신이 남경에 가서 배알하여 아뢰도록 하소서." 하였다.
○ 예성강(禮成江)의 물빛이 붉고 끓어오르기를 3일 동안 계속하니 왕이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신원필(申元弼)이, “어찌 그것이 상서가 아닌 줄 알겠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그의 아첨을 비난하였다.
○ 경진일(庚辰日)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동지밀직사사 안숙로(安叔老)를 보내어 연왕(燕王 명 태조의 작은 아들 체(?))에게 빙문하였다.
○ 왜적이 양광도를 침범하여 음죽(陰竹)ㆍ음성(陰城)ㆍ안성(安城)ㆍ죽주(竹州)ㆍ괴주(槐州)에 이르니, 우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과 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을 보내어 왜적을 잡게 하니,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밑에서 적을 만나 적의 머리 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힌 남녀를 빼앗아 돌아왔다.
○ 간관이 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안일(安逸)에 빠지지 않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대언(代言) 성석용(成石瑢)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바치게 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해가 사시, 오시가 되어서야 나오시며, 혹 밤중까지 연회를 하시니 신등이 실망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른 아침에 정사를 청단(聽斷)하시고 밤중의 연회를 하시지 마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문하성의 녹사ㆍ주서와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밀직사(密直司)의 당후(堂後)ㆍ내원영승(內院令丞)ㆍ선관영승(膳官令丞)은 모두 사재(私財)로 관비(官費)에 쓰고 명칭을 역관(役官)이라 하니, 관직을 설치한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음식과 지찰(紙札)을 모두 관에서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왕이 적경원(積慶園)에 가서 사친(四親)의 작과 시호를 추상하고, 동모제 우(瑀)를 시켜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 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좌사의 김진양(金震陽)이 일찍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윤이(尹?)와 이초(李初)의 일은 세 살난 어린아이라도 조반(趙?)의 무망(誣忘)인 줄을 알고 있다.' 하며 대역을 경솔히 의논하여 정론을 가로막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드디어 김진양을 파면시키고, 다른 간관들도 역시 모두 좌천시켰다.
○ 가을 7월에 크게 사면을 베풀었다. 찬성사 정몽주가, 대간이 윤이와 이초의 무리를 논핵함이 매우 심하므로 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4대를 추봉(追封)하는 기회에 이색ㆍ권근 등을 사(赦)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 하니, 그 말을 따른 것이다.
○ 유원정(柳爰廷)이 남경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황제가 윤이와 이초의 무망을 알고 율수현(?水縣)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하였다.
○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공이 있는 이가 아니면 봉하지 않는 것이 옛날의 제도인데, 근래에는 공덕의 유무와 관직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하지도 않고 봉군된 자가 너무 많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큰 공을 세워서 봉군된 자와 찬성사 이상으로서 봉군된 자가 아니면 녹(祿)을 주지 마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서운관(書雲觀)에서 소를 올리기를,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리 쇠왕(地理衰旺)의 설(說)이 있으니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기어 송도(松都)의 지덕을 쉬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박의중(朴宜中)에게 이르기를, “경은 도읍 옮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아뢰기를, “옛날에 군왕이 참위 술수(讖緯術數)로써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을 움직이면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폐해와 공급되는 비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경》에, '필부ㆍ필부가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면 임금이 더불어 그 공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그 폐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음양의 설이 또한 어찌 거짓이겠느냐." 하면서, 평리 배극렴(裵克廉)을 보내어 가서 궁궐을 수리하게 하였다.
좌헌납 이실(李室)이 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참위설을 믿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는 일 자체가 이미 옳지 못하옵니다. 하물며, 지금 추수를 다하지 않았는데, 사람과 말이 곡식을 짓밟으면 반드시 백성의 원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꾸짖기를, “《비록(?錄)》에,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네가 어찌 홀로 옳지 않다고 고집하느냐." 하였다.
○ 왕이 연복사(演福寺)를 중수하려고 절 옆의 민가 30여 호를 철거하였다
○ 사헌부와 형조에서 소를 올려 윤이ㆍ이초 무리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대간이 다시 청하였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 8월에 사대부 집의 제의(祭儀)를 반포하였다.
○ 사헌부와 형조에서 다시 윤이ㆍ이초 무리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가 아뢰기를, “윤이ㆍ이초의 무리는 죄가 명백하지 않으며 또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오히려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마침내 우현보(禹玄寶)ㆍ권중화(權仲和)ㆍ경보(慶補)ㆍ장하(張夏) 등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 형조 총랑 윤회종(尹會宗)이 소를 올리기를, “국운의 장구함은 왕이 덕을 많이 쌓고 인을 베풀어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는데 달렸을 뿐이온데, 어찌 도성 지세의 왕기(旺氣)만 믿겠습니까. 옛날에 은(殷) 나라 임금 반경(般庚)이 경(耿 지명(地名))을 버린 것은 황하(黃河)가 범람한 재난이 있었기 때문이오며,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빈(? 지명)을 버린 것은 적인(狄人)의 침범이 있기 때문이오며, 주 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은 견융(犬戎)의 난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러한 몇 가지 일도 없으면서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니 세상이 몹시 놀라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강물의 빛이 붉고 끓어오르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하여 참위의 말을 믿고 천도하여 이를 피하고자 하시며, 또 중 법예(法猊)의 설(說)에 혹하여 연복사를 수리하면서 사방에 있는 민가를 모두 허물어 집을 잃은 자가 많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잘하신다 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도읍 옮기는 일을 중지하시고 법예를 내쫓으시며, 조심하시고 반성하시어 천심에 보답하고 사설에 미혹됨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 우성범(禹成範)을 단양군(丹陽君)으로 삼고, 강회계(姜淮季)를 진원군(晉原君)으로 삼았다.
○ 밀직(密直) 이두란(李豆蘭)과 장사길(張思吉)을 서해도(西海道)로 보내어 왜적을 쳤다.
○ 왕이 문묘에 배알하였다.
○ 왕이 친히 적경원(積慶園)에 제사를 지냈다.
○ 왜적이 전라도에 침범하니 절제사 이무(李茂)가 쳐서 물리치고 적의 머리 27급을 베었다.
○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빙문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사로잡혀 간 백성 37명을 돌려보냈다.
○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도읍 옮기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 9월 1일 경인에 개기식(皆旣蝕)이 있었으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에 뻗쳤다.
○ 사헌 규정 이감(李敢) 등 9명을 폄직하여 모두 현의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왕이 궁중의 부녀와 환관에게 상을 내려 주는 것이 제한이 없어 창고에 묵은 저축이 없어지니, 이감(李敢)이 풍저창(?儲倉)에 분대(分臺)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도 반드시 먼저 재용을 절약하는데, 하물며 나라의 왕이 사사로운 사람에게 함부로 상을 주어 창고를 텅 비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더니, 환관이 고했으므로 왕이 노하여 이감의 가노(家奴)를 가두었으니, 동료 박기(朴起) 등 8명이 모두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감의 폄직(貶職)이 있게 된 것이다.
○ 내시(內侍)를 보내어 연복사(演福寺)ㆍ낙산사(洛山寺)ㆍ왕륜사(王輪寺) 등의 절에 재(齋)를 베풀었다.
사신 진자성(陳子誠) 이 말하기를, “왕이 즉위한 이후로 신령과 부처에 아첨하여 섬기기를 거의 거르는 달이 없으므로, 대신과 대간이 매양 시비를 늘어놓고 논하였으나, 왕의 마음이 이미 미혹되어 이를 풀 수 없게 되었다. 아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강물의 빛이 붉고 끓어오르며, 일식ㆍ월식이 있고, 천둥과 번개가 때 아닌 데 쳤으니, 하늘의 견고(譴告)가 지극하였으며 사람의 근심과 의심도 심하였다. 진실로 마땅히 삼가고 덕을 닦아서 정사를 고쳐 다스려야 될 것인데, 이 일은 버려두고 하지 않으면서 한갓 신령과 부처의 힘만 빌려서 그 나라를 보전하고 그 지위를 편히 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심하지 않는 것이랴." 하였다
공전과 사전의 문서를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며칠 동안이나 꺼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종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개혁되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 병오일에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경술일에 어가(御駕)가 한양에 이르니 양광도 관찰사 유구(柳?)가 화려한 가설무대를 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맞이하므로,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이를 그만두게 한 후에야 들어갔다. 간관이 유구가 백성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징수하여 왕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구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 밀직 부사 강은(姜隱)을 남경에 보내어 종마 50필을 바치고, 문하평리 김남득(金南得)과 밀직 제학 이지(李至)는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 도당에서 아뢰기를, “의주(義州)ㆍ이성(泥城)ㆍ강계(江界)는 나라의 울타리가 되므로 더욱 어루만지고 구휼해 주어야 될 것이니, 요역(?役)을 면제해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겨울 10월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내시다방(內侍茶房)은 대궐 안에 드나들므로 그 직임이 가볍지 않은데도 정원이 없어 군역을 피하려는 자가 서로 다투어 들어왔다가 겨우 몇 개월이 되면 곧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요역을 하지 않으며, 걸핏하면 수백 명에 이르게 됩니다. 몸가짐이 단정한 젊은이 백 명을 뽑아 여기에 충당하고 이번(二番)으로 나누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각 도(道)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를 나누어 보냈다.
○ 11월에 우리 태조가 글을 올려 사직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태조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사(謝)했다.
○ 우현보(禹玄寶)ㆍ이색(李穡)ㆍ권중화(權仲和)ㆍ경보(慶補)의 죄를 사면하고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 이전에, 서경 천호(西京千戶) 윤귀택(尹龜澤)이 천호(千戶) 양백지(楊百之)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취하자 말하기를, “너는 재상을 할 뜻이 없느냐." 하니, 백지가, “누가 그런 마음이 없으랴마는 다만 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하였다. 귀택이 말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판사(判事) 조유(趙裕)와 함께 모의하여 이 시중(李侍中)을 해치고자 하니, 네가 만약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들과 마음을 같이한다면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 시중(沈侍中 심덕부(沈德符))도 이 모의를 알고 있다." 하니, 백지가 거짓으로 응답하였다.
귀택은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먼저 서울에 이르러 우리 태조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종연이 도망하여 서경(西京)에 이르러 나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시중(侍中)을 해치자고 약속하였는데, 종연은 이미 몰래 본경(本京 송경(松京))에 들어와서 시중 심덕부, 판삼사 지용기(池湧奇), 전 판자혜부사(前判慈惠府事) 정희계(鄭熙啓), 문하평리 박위(朴?), 동지밀직 윤사덕(尹師德), 한양 부윤 이빈(李彬), 나주도 절제사 이무(李茂), 전주도 절제사 진을서(陳乙瑞), 강릉도 절제사 이옥(李沃) 및 진원서(陳原瑞)ㆍ이중화(李仲和) 등과 난을 일으키기를 모의하였습니다. 조유(趙裕)도 나에게 말하기를, '심 시중(沈侍中)이 그 부하인 진무(鎭撫) 조언(曹彦), 김조부(金兆府)ㆍ곽선(郭璇)ㆍ위충(魏?)ㆍ장익(張翼)ㆍ유(裕) 등과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시중을 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리 태조가 그 말을 비밀히 덕부에 알리니, 덕부가 조유(趙裕)를 옥에 가두고 천호 정을방(鄭乙邦)을 본경에 보내어 종연의 아내와 종과 그 족인 박천상(朴天祥)ㆍ박가흥(朴可興)을 잡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종이 말하기를, “주인 종연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가흥의 집에 들어와서 저에게, '윤귀택(尹龜澤)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른다면 일은 성취된다.' 하였습니다." 하자, 가흥이 마침내 죄를 자백하였다.
우리 태조가 아뢰기를, “신은 덕부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나라를 받들었으며 본래 시기와 의심이 없었습니다. 조유를 신문하지 말아서 우리 두 신하로 하여금 시종토록 정의를 보전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조유를 석방하려고 하였다. 덕부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아뢰기를, “조유가 진술한 말이 신에게 관련되었으니, 지금 만약 신문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하면서 스스로 순군옥에 나아갔다. 왕이 두 번이나 명하여 불러오게 하니, 덕부가 그제서야 대궐에 나아와서 사례하였고, 왕은 조유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로, 정몽주(鄭夢周)를 수문하시중으로, 지용기(池湧奇)를 판삼사사로, 배극렴(裵克廉)ㆍ설장수(?長壽)ㆍ조준(趙浚)을 문하 찬성사로 삼았다.
○ 헌부에서 소를 올리기를, “본조(本朝)의 고사(故事)에, 후비부(后妃府)를 설립하여 관속을 두었는데 좌사윤(左司尹)ㆍ우사윤ㆍ승(丞)ㆍ주부(注簿)ㆍ사인(舍人)이 있을 뿐입니다. 공민왕이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높여 부(府)를 세워 '숭경부(崇敬府)'라 하고, 관료는 판사ㆍ윤ㆍ소윤ㆍ판관이라 하였는데, 지극히 높인 것입니다. 지금 숭녕부(崇寧府)는 예전 제도에 의하여 좌사윤ㆍ우사윤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의덕부(懿德府)ㆍ자혜부(慈惠府)의 두 부는 아직도 숭경부(崇敬府)의 예(例)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옛 제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모두 숭녕부의 예를 따르게 하소서, 또 종친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옛 제도이온데, 근래에는 성중애마(成衆愛馬)ㆍ창고ㆍ궁사(宮司)의 제조를 많이 맡고 있으니, 모두 중지하고 파직하여 왕친을 높이며, 원윤(元尹)ㆍ정윤(正尹)은 나이 15세가 차야만 제수하고, 차지 않은 경우에는 임명되었더라도 녹을 받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헌부에서 소를 올려 조유(趙裕)와 윤귀택(尹龜澤)을 대질시키기를 청하니, 평리 박위(朴?)에게 명하여 대간과 함께 국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박위가 윤귀택을 먼저 고문하려고 하니, 집의 유정현(柳廷顯)이 말하기를, “고발한 자를 먼저 국문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니, 박위가 얼굴빛을 변하고 잠잠히 말이 없었다. 이에 조유를 신문하니 조유가 그 사실을 자백하였다. 헌부에서 심덕부를 탄핵하고 드디어 진무 조언(曹彦) 등 5명을 옥에 가두었다. 조유를 목매어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조언 등은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이에 대간이 날마다 대궐문에 엎드려 종연(宗衍)의 당을 논핵하여 지용기(池湧奇)는 삼척으로, 박위(朴?)는 풍주(?州)로, 정희계(鄭熙啓)는 안변(安邊)으로, 윤사덕(尹師德)은 회양(淮陽)으로, 이빈(李彬)는 안협(安峽)으로 귀양보냈다. 또 심덕부를 탄핵하여 토산(兎山)으로 귀양보내고, 진원서(陳原瑞)를 흥덕(興德)으로 귀양보냈다.
○ 헌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서울과 지방의 군사(軍事)는 이미 영삼사(領三司) 이(李 태조의 옛 이름)로 하여금 모두 통솔하게 하였으니, 여러 원수(元帥)의 인장(印章)을 모두 회수하소서."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안숙로(安叔老)가 연(燕)에서 돌아왔는데 연왕(燕王)의 답서(答書)에, “네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으나 어찌 감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신하는 외국과 교제하는 도리가 없다.' 하였다. 이를 물리치면 반드시 남의 뜻을 곤란하게 할 것이므로 물품은 남겨두고 사신은 돌려보낸다. 삼가 글로 부황(父皇 명 태조(明太祖))에게 삼한의 뜻을 아뢰고 반드시 명이 있어야 회보하겠다." 하였다.
정당문학 정도전(鄭道傳) 등이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윤이ㆍ이초가 일찍이 너희 나라에서 난을 일으킬 음모를 하였다는 일은, 짐이 이미 믿지 않으며 벌써 죄를 처단하였으니, 너희 나라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고 의심하는가." 하였다.
○ 다시 우리 태조를 문하시중으로 삼으니, 태조가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12월에 임순례(任純禮)를 곡주(谷州)로 보내어 산 속에서 김종연을 잡아 왔는데, 이튿날 옥중에서 죽었다. 순례(純禮)가 길에서 밥을 주지 않고 하룻밤 하루낮에 3백 리를 달려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서 죽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하였다. 종연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이방춘(李方春) 등을 목 베고, 박가흥(朴可興)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종연이 두 번째 도망할 때에 방춘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은 성품이 본래 인자한데 다만 정몽주ㆍ설장수ㆍ조준ㆍ정도전 등에게 꾀임을 당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내가 서울에 들어가서 박가흥에게 의탁하려고 하니, 정양군(定陽君) 우(瑀)와 지용기(池湧奇)ㆍ윤귀택(尹龜澤) 등에게 알려서 함께 모의하여 이 시중과 정몽주만 해친다면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체포하여 국문하니, 방춘 등이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처형되었다.
○ 백관을 시켜서 각기 현량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 조민수(曹敏修)가 창녕(昌寧)에서 졸(卒)하였다.
○ 형조 판서 안원(安瑗)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술사가 재이(災異)로써 도읍을 옮겨 화를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 도읍으로 옮긴 지 오래 되었는데도 사나운 범이 사람을 해치고 변괴가 그치지 않으니 술사의 말은 증험이 없습니다. 빨리 본래의 서울로 돌아가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기대를 위로하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주D-001]대학연의(大學衍義) : 송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을 해설한 책인데, 치국(治國)하는 도리(道理)로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주D-002]강좌(江左) : 진(晉) 나라가 외족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양자강 남쪽[江左]으로 가서 동진(東晉)을 세웠다.
[주D-003]비방(誹謗)의 나무 : 요 임금 때에 표목(表木)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정치의 잘못된 점을 써 달라고 하였다.
[주D-004]진선(進善)의 정(旌) : 요 임금이 기를 세워 두고 착한 말을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 아래에 서게 하였다.
[주D-005]태괘(泰卦) : 《주역》에 상곤(上坤)·하건(下乾)이 태괘(泰卦)가 되는데, 이것은 낮은 땅이 위로 가고 높은 하늘이 아래로 내려와 상하가 서로 교통한다는 격이다.
[주D-006]비방하는……하여 : 주(周) 나라 여왕(?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백성 중에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위무(衛巫)를 시켜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였다.
[주D-007]말……한다 : 《논어》에 정공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께서 "말은 이와 같이 기필할 수는 없거니와 사람들 말에 '나는 임금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 합니다." 하였다.
[주D-008]만 리를……내다본다 :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하서(河西)의 竇融(竇融)에게 친서(親書)를 보냈는데, 두융의 실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이 하였으므로 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자는 밝게 만 리를 보는구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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