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전조선신문기자대회 개최, 조선신문기자회 결성

천하한량 2007. 1. 29. 18:41
제목
전조선신문기자대회 개최, 조선신문기자회 결성
게재지명
자유신문
게재일자
1945년 10월 25일
날짜
1945년 10월 23일
내용

언론인들의 첫 회합인 全朝鮮新聞記者大會는 10月 23日 오후 4時부터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대강당에서 全朝鮮 24社를 대표하여 참집한 150여명 현역기자와 백여명 전임기자들과 회동으로 개막하였다.
이 대회를 축하하기 위하여 내빈석에는 미군정장관을 위시하여 뉴욕타임즈, AP, UP 등의 통신기자와 각 문화단체 대표들의 얼굴이 보였다.
2층 방청석에는 입추할 여지도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朝鮮通信社 李鍾模의 사회로 일동 애국가 합창에 뒤이어 新朝鮮報社 梁在廈의 개회사가 있고 임시집행부를 선거한 다음 解放通信社 金鎭基의 조선신문기자대회준비까지의 경과보고에 뒤이어 의장으로부터 朝鮮新聞記者會의 결성을 선언하니 만장은 박수로 이를 환영하였다.
이어 自由新聞社 鄭鎭石으로부터 강령 규약을 발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朝鮮人民報 金正道로부터 별항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하여 朝鮮新聞記者會는 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하기를 중외에 선명하였다.
이어 군정장관 아놀드소장 代 뿌스대령, 뉴욕타임즈기자 찐스톤 인민공화국중앙인민위원회 許憲, 조선공산당 金三龍의 축사가 있었는데 이때에 만장의 우뢰같은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李承晩이 입장하여 즉시 등단 약 15분간에 걸쳐 언론의 진정한 자유에 관하여 사자후를 토하니 일동 감명깊게 경청하고 그의 강연은 서울방송국의 손으로 전조선에 중계방송이 되었다.
계속하여 建國同盟 呂運亨代 呂運弘, 朝鮮學術院 尹行重, 朝鮮文化建設中央協會 李源朝 諸氏의 축사가 있은 다음 오후 6時 15分 제1일의 의사를 종료하고 일동은 국일관에서 만찬을 하게 되었다.
◊ 宣言
반세기동안이나 우리 동포를 야만적으로 강압하고 착취하던 일본제국주의의 철쇄는 마침내 절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으로 우리 동포의 살과 배속에는 아직도 그 악독한 鎖片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며 지방으로 일본제국주의자의 조선사정에 대한 기만적 선전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조선의 현하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곤난케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로서 남아있는 흔적은 우리의 힘찬 건설로서만 퇴치될 것이요 이에 대한 모든 지장이 완전히 배제되고서야만 씩씩한 건국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붓을 든자 진실로 우리의 국가건설에 대한 제 장애물을 정당히 비판하여 대중 앞에 그 정체를 밝힘으로써 민족진로에 등화가 될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단순한 춘추의 필법만으로서는 우리는 만족치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에게 필봉의 무장을 요구한다. 모든 민족적 건설에 한 개의 추진이 되고 다시 민중의 지향을 밝게 하는 炬火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붓(筆)은 꺾어진 붓이며 연약한 붓이며 무능력한 붓이다.
민중이 갈망하는 바는 우리의 힘있고 바르고 용감한 필봉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중적 요망에 저버림이 없도록 진력한다. 민중의 진로에 대한 찬란한 炬火를 이루어 조선사정을 국제적으로 정확히 보도하는 針路가 되기를 기도한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이러한 목표를 수행함에는 먼저 우리들의 결속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우리는 철석같은 단결된 힘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참된 민족해방을 위한 역사적 정의를 발양하는 강력한 필봉을 가지기를 기도한다. 진정한 언론의 자주를 확보함으로서만 민족의 완전한 독립에의 길이 열릴 것이다.
신문이 흔히 불편부당을 말하나 이것은 흑백을 흑백으로써 가리어 추호도 왜곡치 않는 것만이 진정한 불편부당인 것을 확신한다.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적어도 이러한 전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우리는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함을 선언한다.
◊ 綱領
一. 우리는 민족의 완전 독립을 기한다.
一. 우리는 언론 자주의 확보를 기한다.
全朝鮮新聞記者大會 석상에서 李承晩은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사를 하여 참집한 일동에게 감명을 주었다.
“회장까지 오는 도중에 길에 늘어선 순검을 보고 어느 나라 순검이냐고 물어 보니 우리 조선순검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도 말하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순검청에서 오너라 가거라 하지 않을 터이니 반갑고 기쁜 일이다. 이 회관에 들어서니 1901년 전후 이곳에서 함께 일하던 옛 친구의 생각이 간절한 중 더욱 月南 李商在氏를 잊을 수 없다.
신문의 사명은 開明發展에 있으며 신문기자의 책임도 또한 크다고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얻은 바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한 자유는 아닐 것이다. 자유를 善히 활용하여 조선사람 전체의 복리가 되도록 하는데 자유에 가치가 있을 것이니 그러함에는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정확 공정하게 보도하여 여론을 반영하는 한편 조선신문의 성가을 세계에 알리도록 해주기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내가 培材學校에 있을 때 協成會報를 발행하여 당시의 부패한 관리와 무능력하고 완고한 정부를 탄핵하고 다시 每日新聞으로 이름을 고쳐 정부의 압박을 물리치니 민중의 절대한 支持아래 신문발행을 계속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곤난을 겪지 않아도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이 신문의 자유를 공명정대하게 활용하여 사회의 진보발달에 공헌하여 주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