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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웅덩이 속 금동대향로는 백제멸망 순간의 증거였다

천하한량 2021. 3. 2. 19:56

물웅덩이 속 금동대향로는 백제멸망 순간의 증거였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2021. 03. 02. 06:03 수정 2021. 03. 02. 16:20 댓글 133news.v.daum.net/v/20210302060303284

 

[경향신문]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물구덩이에서 확인된 금동대향로. 백제멸망의 순간을 증언해주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북아의 운명을 건 이 국제전쟁은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이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게 된 거죠. 이 전투를 끝으로 백제왕·귀족들 중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합니다.(<일본서기>) 그리고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의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가왕 일가가 바로 규슈 남쪽 산골지방인 난고손 마을에 정착한 거죠.

이 마을 주민들이 망명한 백제왕자인 정가왕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을 찾은 겁니다. 난가손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 등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답니다.

1993년 10월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의 서자 중 한 사람인 정가왕이 정착한 일본 규슈 마야자키 현 난고손 주민들이 정가왕의 신위를 모시고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아와 고유제를 올렸다. 능산리는 정가왕의 선조인 백제 왕가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정가왕으로서는 1300년여 만의 귀향인 셈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구유형 물웅덩이 속에 무언가 있었다

그 무렵 옆에서 또 다른 의미의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능산리 절터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였던 겁니다. 이 발굴은 처음부터 악전고투 그 자체였답니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이고, 습기가 질척질척거렸으며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답니다. 물웅덩이였다는 겁니다.

악전고투 속에 맞이한 12월12일 오후 4시30분, 한국 발굴사에 길이 남을 대어를 낚습니다.

진흙이 잔뜩 묻어나는 물웅덩이에서 심상치않은 물건이 노출되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의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뚜껑이 보였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었습니다. 조사단은 야간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전등을 밝혀놓고 끝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펀지로 걷어내면서 120㎝ 가량의 타원형 물웅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답니다.

마침내 “아!”하는 탄성이 터졌습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너무나도 정교한 문양의 물체가 현현한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물체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있던 곳임을 알게 됐습니다.

사비기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을 지키려고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능사. 이곳의 공방지(원 안) 땅 밑 물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자태를 드러낸 금동대향로

미지근한 물에 담든 ‘귀이개’로 물체의 이물질을 닦아내자 비로소 그 자태가 드러냈습니다. 신선이 보이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승이 존재하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던 이 물체는 아무리 봐도 향로였습니다. 뚜껑 꼭지에는 봉황인 듯 같은 새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었습니다.

뚜껑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꽹과리), 종적(縱笛·관악기), 소(簫·피리의 일종)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뚜껑 전체는 삼신산 형태의 4∼5단이었는데요. 첩첩산중의 자연세계를 표현한 거죠.

세어 보니 74곳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현실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턱밑에 안고 있는 봉황이 보이고 5가지 악기로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표현되어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처음엔 이구동성으로 ‘이거 박산로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박산로(博山爐)’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봉래·방장·영주 등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중국 향로입니다. 이 정도로 잘 만들었다면 중국 것임이 분명하다는 일종의 문화패배주의였던 겁니다.

‘백제라면 저렇게 만들 수는 없어…’. 뭐 이렇게 깎아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오히려 중국제가 ‘물건’처럼 섬세하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중국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높이 62.5㎝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중국에서 발견된 예는 없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무왕 35년(634년)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물 가운데는 섬을 축조하여 방장선산(方丈仙山)이라 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는 당대 백제에서 신선사상의 영향이 왕실에 미쳤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문양을 봐도 그렇습니다. 무령왕릉에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 그리고 부여 외리에서 나온 백제 문양 전(塼·전돌) 등은 이 금동대향로와 거의 일치하는 박산표현이 있습니다. 대향로가 중국의 영향도 받았을 수 있지만 결국 계승은 한반도에서 계승되었다는 거죠. 5~6세기 신라시대 토기와 금속기, 부안 죽막동 출토 백제토기 등에서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는 겁니다. 결국 이 향로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과 독창성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화생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걸작품이라는 거죠.

향로의 뚜껑과 몸체에는 첩첩산중과 산길, 시냇물 등 자연을 표현했고, 현실 속 다양한 동물과 인물, 상상 속 동물과 신선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스님들은 왜 향로를 숨겨놓았을까

여기서 슬슬 피어나오는 궁금증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대향로는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은 구유형의 나무물통에 은닉된 모습으로 발견됐을까요.

이제부터 백제 멸망의 현장으로 달려가 상상의 나래를 펴봅시다. 발굴을 담당한 신광섭 전 국립부여박물관장의 언급을 토대로 펼친 상상이니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겠죠.

660년(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백제의 도읍지 부여가 함락되면서 약탈과 유린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백제 왕릉을 지키던 이 절의 스님들은 임금이 제사 때마다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던 대향로를 감추려 했을 겁니다. 스님들은 백제가 끝내 멸망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쳤을 겁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생각과 달리 백제의 사직은 끝내 종막을 고하게 되죠. 나당연합군에 의해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은 철저히 유린 소실되고,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겠죠. 금동대향로도 그로부터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거죠.

백제 예술의 투톱이라는 금동대향로와 부여 외리 출토 산수인물무늬 전돌. 문양이 비슷하다. 한국 산수화의 원형이라 할만 하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도끼로 찍은 목탑중심기둥

해도해도 너무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냐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향로가 발견된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발견되는데요.

‘백제 창왕(위덕왕·재위 554~568) 13년인 정해년(567년),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문 석조사리감의 발견도 중요했습니다만, 출토 양상도 의미심장했답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명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요.

절을 유린한 나당연합군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고 마구 파헤친 것이 아니었을까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위 사진) 밑 사진은 백제 제사유적인 전북 부안 죽막동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금동대향로와 일관된 표현양식이다. |국립부여박물관·조원교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까맣게 몰랐던 나당 동맹과 연합군 결성

그게 맞는 상상이라 해도 의문점이 꼬리를 뭅니다. 그렇게 멸망의 지경에 빠졌는데, 그 조짐이라도 있었을 거 아니냐. 스님들은 왜 까맣게 몰랐을까 하는 거죠. 그러나 그랬을 수 있답니다.

왜냐면 의자왕 시대(641~660) 백제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642년(의자왕 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오죽하면 651년(의자왕 11년)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라고 협박하는 국서를 보냈을까요.

이 대목이 중요하죠. 신라와 당나라는 648년(백제 의자왕 8년·진덕여왕 2년) 나당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거든요. 당시 당나라 태종은 신라의 사신(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를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대향로가 발견된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백제 창왕의 누이동생이 567년 사리를 공양한다’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 발견됐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의자왕은 어떠했을까요. 의자왕은 652년 당나라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겁니다. 의자왕이 누구입니까. 처음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통할만큼 지극한 효자였고,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친 분이죠.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충신들을 쫓아냈죠. 성충(?~656)이 옥사하고 흥수(생몰년 미상)가 귀양 갔으며, 그 빈 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생몰년 미상) 같은 인물로 채웠죠.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답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겁니다.

그런데 ‘창왕’명 사리감은 비스듬히 누워있었고, 목탑의 중심기둥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다. 나당 연합군이 절을 유린하면서 목탑의 사리장치를 파헤친 것은 아닐까.|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운명의 660년 알리는 다양한 유구 유물들

2011년 공주 공산성의 백제 왕궁 관련 유적 저수시설에서 ‘정관 19년(645)명 옻칠갑’ 유물이 나왔고요.

최근에는 부여 부소산성에서 ‘을사년’명 토기가 출토됐는데요. ‘을사년’은 바로 645년이거든요. 이런 유물이 확인된 집수시설에 수백점의 토기가 시기차 없이 동시에 매몰됐는데요. 발굴자들은 ‘정관’명 옻칠갑이나 ‘을사년’명 토기 등도 백제 멸망기에 누군가 한꺼번에 묻어놓은 자료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소산성 주변 조사에서 통일신라 극초기(7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토기들이 여러 점 보였다는데요. 이것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이곳을 진입해서 어떤 시설을 설치하는 어수선한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더라구요. 그럴 듯한 추론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떨까요. 1993년 발견된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무엇을 웅변해주고 있을까요. 백제의 초절정기 예술품인 금동대향로가 한편으로는 백제 멸망을 극적으로 웅변해주는 상징 유물인 셈이죠. 정말 아이러니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