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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까지..이베리코 흑돼지 뭐기에? [뉴스 깊이읽기]

천하한량 2019. 2. 4. 02:04

[경향신문]

소비자시민모임 관계자들이 1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베리코 흑돼지 판별 검사 및 표시 광고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고깃집 문앞에 ‘이베리코 흑돼지 판매 중’이라고 써붙인 걸 보는 일도 낯설지 않습니다. ‘스페인 청정 지역에서 도토리만 먹고 자란 돼지’ ‘상위 1% 프리미엄 돼지’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베리코 흑돼지는 1kg당 3만원 안팎으로 1만6000원 남짓인 국내산 삼겸살 평균 가격보다 2배 가까운 가격으로 팔립니다. 어떤 고기이길래 비싸도 저렇게 잘 팔려나갈까. 설날에 이베리코 흑돼지 다 같이 구워먹을까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비자시민모임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되는 이베리코 흑돼지의 10%는 가짜라고 합니다. 소시모는 대형마트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스페인산 이베리코 흑돼지가 국내산 돼지고기보다 가격이 1.3배 높고, 음식점 24곳의 평균 이베리코 흑돼지 목살 판매 가격은 8360원으로 국내산 돼지고기(한돈) 인증 음식점 목살 평균 가격인 7680원보다 비쌌다고 전했습니다.

대체 어떤 돼지고기길래 상품 원산지를 속인 가짜까지 나도는 걸까요? 스페인에서 상륙한 이 돼지고기는 국내 축산업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프리미엄 돼지고기’의 탄생과정과 국내 농가의 현실을 알아봤습니다.

■소농이 만든 이베리코 돼지

이베리코 돼지 방목장인 데헤사. 위키백과 공용이미지

이베리코 돼지는 스페인 햄 하몽을 생산하기 위해 사육되는 순종 혹은 교잡종 흑돼지 품종입니다. 머리와 코가 길고 가죽이 검은색입니다. 하몽은 흑돼지 뒷다리살로 만듭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생산된 돼지라는 뜻으로 ‘이베리코’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베리코 돼지는 목초지에 풀어놓고 풀과 도토리를 먹여 키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통은 배합사료도 함께 먹입니다. 비율은 등급별로 다릅니다. 최상등품인 ‘이베리코 베요타’는 100% 스페인산 순종 흑돼지로 17개월 이상 사육하며 3개월 이상 도토리를 먹이면서 방목한 돼지입니다. ‘이베리코 세보 데 캄포’는 교잡종도 허용하며 12개월 사육하며 2개월 간 축사와 방목을 병행하며 도토리와 사료를 반반씩 섞여 먹입니다. 하등품인 ‘이베리코 세보’는 교배종으로 10개월까지 방목 없이 축사에서 고급 곡물사료를 먹여 사육합니다. 이베리코 돼지고기라고 하더라도 ‘100% 도토리 방목’은 아닙니다.

사육기간이 10개월 ~17개월로 국내산보다 깁니다. 이베리코 돼지의 독특한 맛과 풍미는 긴 생육기간과 방목기간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국내산 돼지고기는 6개월이면 출하합니다. 오래 키울수록 사료가격이 많이 들고 농가 입장에선 가격경쟁력 면에서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축산농가가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키울 수 있는 이유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베리코 돼지로 인정받으려면 ‘데헤사’라 불리는 숲에서 자라야 합니다. 데헤사는 참나무, 허브 등으로 이뤄진 지중해 지역의 인공 목초지인데요, 지역 농민들의 축산업과 임업이 복합적으로 이뤄지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돼지 뿐 아니라 소, 양, 염소 등도 풀어놓는데 숲이 파괴되지 않도록 방목시점과 밀도를 엄격히 규제합니다. 돼지는 1헥타르(ha)당 0.4~0.6마리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무작정 사육두수를 늘릴 수 없어 돼지의 공급량이 일정하게 조절됩니다. 지역 축산조합이 수백년 동안 만들어온 전통으로 스페인 정부는 이를 법제화해 스페인산 돼지고기의 신뢰도를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이를테면 스페인 전통햄인 하몽은 오직 스페인산 돼지로만 만들게 돼 있습니다. 전통음식 보존을 통해 지역 축산업도 함께 보호하는 셈입니다. 소비자들도 데헤사에서 풀어 키운 방목 흑돼지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 문정훈 교수는 “데헤사는 제대로 조성하는데 70~80년 가까이 걸린다. 대기업이 강점을 보일 때는 ‘규모의 경제’를 내세울 때인데 데헤사 조성과 여기 맞춰 돼지를 기르는 일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할 수 없다. 지역경제가 소농 중심으로 유지되도록 하는데 기여한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스페인에도 공장식 축산은 있지만 ‘대형화된 축산’ 외 소농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지역 생태계나 농업·음식문화의 다양화에 기여하는 셈입니다. 1990년대 수입개방을 앞두고 일률적으로 ‘대형화가 경쟁력’이라며 몸집을 불리도록 한 국내 축산농정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입니다.

스페인에서도 축산업이 환경파괴를 부추긴다는 따가운 시선은 있습니다. 스페인 당국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스페인 전역의 돼지 사육두수가 5000만 마리로, 인구 수(4650만)보다 많습니다. 돼지 1마리당 하루에 물 15리터를 쓰다보니 가뭄이 빈번한 스페인에서 돼지 사육 밀집지역의 물 부족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베리코 돼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데헤사 규정을 어기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베리코 돼지는 국내에서는 2015년을 기점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산 돼지고기 수입 물량은 2013년 1만8000t에서 204년 3만80000t으로, 또 지난해 7만2000t으로 4년 만에 4배로 뛰었습니다. 국내 유통량의 1%도 지나치 않습니다. 국내 축산업계는 이베리코 돼지가 가격면에서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형 이베리코 돼지의 장벽

제주 토종 흑돼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베리코 돼지를 마냥 부러워만 해야 할까요. 제주 흑돼지 등 국내에서도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생산하고 브랜드화하려는 노력은 있어 왔고, 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이베리코 돼지가 인기를 끌기 전만 해도 하지만 돼지고기를 둘러싼 각종 제도들은 이런 실험에 우호적이지는 않습니다. 현행 돼지고기 품질등급체계에서 1등급이 되려면 무게는 115㎏ 안팎이어야 하고 등의 지방 두께가 얇아야 합니다. 백색돼지를 기준으로 한 등급체계로, 등의 지방질이 두꺼운 편인 흑돼지는 좋은 등급을 받기 불리합니다. ‘대형화’, ‘시설화’ 중심의 판정등급 체계와 규체체계가 여전히 강한 반면, 지역 농민의 실험이 법제도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베리코의 돼지가 국내 소비문화를 바꿔서 축산농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정훈 교수는 “이베리코의 가장 큰 영향은 한국 소비자들이 돼지고기에도 품종이 있고 사육방식이 다르면 맛도 다르단 점을 점을 인식하게 해준 것”이라며 “이베리코 인기 이후 SNS 등에서의 언급량을 보면 듀록, 버크셔K 등 돼지 품종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겹살 위주로 천편일률적인 국내 돼지고기 시장에 ‘프리미엄 돼지고기’가 들어서면서 소비자들이 차별화된 돼지고기를 생산하는 농가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지갑을 여는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주 흑돼지 등 독특한 돼지를 생산하는 농가에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돼지를 키우는 축산농가의 형편은 밝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가격하락이 최근 돼지농가의 가장 큰 근심거리입니다. 통계청 물가동향에 따르면 설 성수기를 앞두고도 지난달 돼지고기 가격은 1년 전보다 6.7% 감소했습니다. 지난해 7월 이후 돼지고기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세입니다. 통계청은 원인으로 사육두수가 늘었다고 설명하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미중 무역분쟁의 여파를 지목합니다. 지난해 미국산 돼지고기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한 이후 미국 측이 중국으로 들어갈 예정이던 물량을 한국·일본 등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중국의 미국산 돼지고기에 부과하는 관세는 62%까지 올라갔습니다.

지난해 기준 국내 돼지고기 생산량은 92만40000t, 수입산은 46만t이었습니다. 2017년 국내 생산량은 국내산 90만1000t, 수입산 36만9000t으로 국내산이 2만3000t, 수입산 9만1000t이 증가했습니다. 국내 수입점유율의 39%를 차지하는 미국산이 3만t 넘게 증가했습니다. 농가들이 ‘이베리코 돼지’ 열풍의 기회를 살려 무엇인가를 하기도 전에 글로벌 무역분쟁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셈입니다.

대다수 농가들에게는 기존의 방식대로 사육두수를 늘리고 빨리 키워 많이 파는 방식이 최선이 됩니다. 늘어나는 돼지 사육 두수는 돼지고기 가격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대량 사육으로 축산농가가 혐오시설로 인식되는 것도 ‘한국형 프리미엄 돼지’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다 구제역까지 발생해 축산농가들은 힘겨운 설을 보내고 있습니다.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당장은 업계를 뿌리째 흔드는 위기가 더 커 보입니다. 농정의 빈 자리가 커 보입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