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고 아픈 50대, 처방과 위로를 주고받는 시간
[오마이뉴스 글:문하연, 편집: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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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고기, 술, 건배사... 연말 하면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기름과 숙취에 찌들지 않고 한 해를 마무리할 순 없을까요? 좀 더 색다르고 재밌게 연말을 나는 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또 연말이다. 가족 모임, 동창회, 직장 회식, 친구들 모임 등 회식 천지다. 평소에는 만나는 사람이 한정적이다가 연말이 되면 모두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들처럼 외롭지 않을 구실을 찾아 모임 날짜를 잡는다.
12월, '회식천국, 혼밥지옥'의 시즌이 도래하면 친구가 별로 없는 나도 대세에 잠시 합류한다. 먹고 떠들고 웃는 사이 나도 이 사회에 속해 같이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소외감을 잠시 잠재운다.
▲ 12월, '회식천국, 혼밥지옥'의 시즌이 도래하면 친구가 별로 없는 나도 대세에 잠시 합류한다. |
ⓒ Pixabay |
남편은 자영업에 친구가 별로 없다. 사실은 날마다 대학 동창이나 각종 모임에서 참석을 요구하는 연락을 받긴 한다. 근데 집돌이 남편은 엄청 바쁜 척 하며 스케줄이 겹쳐서 못 간다는 변명만 하고 집에서 노트북과 노트를 끼고 있다(feat, 형광펜 3종 세트).
아인슈타인, 박문호 박사(<뇌과학의 모든 것> 저자), 요즘은 이 둘이 유일한 친구다. 책과 인터넷으로만 만날 수 있는 친구들. 끼리끼리 논다고 이 두 친구들 역시 연말모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 셋이 연중무휴 365일 연구 중인데, 대체 뭘 연구하는지는 모르겠다. 두 아들들도 이제 20살이 넘어 다들 뭔가로 바쁘다. 나도 그렇다. 근데 이 문제적 인간만이 집에 남아 어두운 거실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밥을 해 놓고 나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그는 연말 동안 내내 삐쳐 있는 신세가 된다. 아니 자기가 원해서 집에 있으면서 대체 왜 삐치는 걸까.
"내가 나가서 맨날 술을 마시길 해, 흥청망청 돈을 쓰길 해"라는 말 좀 그만하시고, 제발 좀 나가서 술도 드시고 돈도 쓰세요. 이런 소박한 바람을 보내본다. 참고로 나도 그래보고 싶은 1인이다. 그래도 혼자 덜 쓸쓸하라고 반짝반짝하는 트리를 만들어 거실에 놓았다. 나의 이 세심함.
초점 안 맞는 사진에 웃는 친구들
지난주 동창회 연말 모임에 갔다. 어디 모임이든 단체 사진 하나는 필수인데 어찌된 일인지 다들 사진 찍기에 시큰둥하다. 나이 50, 늙은 얼굴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단다. 다들 자기는 '사진 빨'이 안 받는다고 말하지만 슬프게도 사진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리고는 초점이 안 맞아 흐릿하게 나온 사진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여린 영혼들. 이십년은 젊게 나온다는 어플로 단체 사진을 찍었더니 더 가관이다. 눈은 이상하게 크고 피부는 지나치게 하얗고 얼굴이 엉망진창이다. 사진속의 주름진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해봐야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일. 2019년, 나의 목표다.
삼십여 명 모이다보니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끼리 소그룹 얘기가 진행된다. 마주앉은 친구A의 얼굴이 지난번과 달리 핼쑥해 보인다. 요즘엔 느닷없이 무슨 병에 걸렸다는 소릴 자주 듣기에 조심스러워서 묻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 B가 A에게 물었다.
"너 뭔 일 있냐?"
그 옆 친구, C가 대신 대답했다.
"쟤 안 좋은 일 있대, 술 주지 마."
친구 B "너 용종 뗐냐?"
친구 A "헐, 어찌 알았냐?"
친구 B "나도 몇 달 전 뗐어, (소주를 따라주며) 소독해야 하니까 얼른 한잔 마셔."
귀신이다. 선문답도 아니고 한방에 맞추다니. 이 대화를 필두로 송년회 주제가 어느 병원은 절대 가지 마라, 무조건 수술하라고 한다. 어디 병원이 잘 하더라. 온통 이런 얘기다.
코흘리개 시절 친구들이 어느 새 머리가 희끗해지더니 이제 서로서로 건강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제 같이 늙어가는 걸 보는 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먼저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쩌나. 잘 모르고 지냈다면 안타깝더라도 그렇게 잊고 지나갈 테지만 이렇게 가끔이나마 얼굴을 보고 말을 섞던 친구가 가버리면 그 마음이 어떨지 두렵다. 이제 동창 모임은 그만 나가야 하려나. 이별이 두려워 또 다른 이별을 선택해야하다니.
▲ <응답하라 1994>에서 갱년기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연기한 나정이 엄마(이일화) |
ⓒ TvN |
지난달에는 코앞에 사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파트 분양을 받아 이사를 갔다. 15년 동안 우린 밤마다 공원을 산책하며 어제 한 얘기 또 하고, 그 얘길 새롭게 또 듣고, 그렇게 일일드라마를 찍었던 사이다.
이제는 차로 가야 만날 수 있는 물리적 거리가 생기다보니 (그래봐야 차로 10분 거리) 엄청 허전했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그렇게 불러댔건만 낙엽이 다 진 가을 끝자락에 끝내 가버려서 나는 서러움이 더 했다.
어제, 그 친구가 집들이 겸, 송년회 겸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는 최신형 밥통을 준비해서 갔다. "왜 이런 걸 사왔어?" 함박웃음으로 반기는 친구에게 "니가 밥통 같아서 밥통을 사왔지. 나 버리고 가니깐 좋냐?"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애정의 화살을 쏘아댔다. 브런치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김치찌개다. 하여간 촌스러워요. 근데 맛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유독 말이 없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 요새 갱년기야. 심각해. 처음엔 얼굴에 열이 나더니 잠도 안 오고, 짜증만 나고,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서 요즘엔 내가 미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문자를 보내도 답도 없고 전화해도 시큰둥한 게 벌써 몇 달째이다. 홈쇼핑에서 파는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좋아졌다는 친구, 석류가 좋다는 친구 등 각자 처방과 위로를 늘어놓았다.
일을 갑자기 놓아버려서일까.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해온 친군데 아이들도 크고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에 작년에 퇴직했다. 그런데 막상은 뭘 하며 보낼지 모르겠단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 뭔가를 배우는 것도 스트레스, 직장동료가 친구였기에 만날 사람도 별로 없다.
남편과 아이들은 바쁘다고 늦게 들어오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더 심해졌다. 재미있는 거리들을 추천해 줬지만 이미 마음이 바닥에 쫙 깔려 있어 그 바닥의 넓이만큼 우울이 가득했다. 이 시기에 해 오던 일을 갑자기 멈추는 건 위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을 얼마를 버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20대에는 어떤 사람이 이상형인지, 어느 직장이 좋은지가 주제더니 30대엔 아이들 얘기와 배우자 얘기, 40대엔 서로 그 인간이랑 사네 못사네 하더니 50이 되니 몸과 마음이 관심 거리다. 세월은 느끼는 것보다 어찌나 빠른지.
어린이와 청년 사이에 사춘기가 있듯이 청춘과 노년 사이에 갱년기가 있다. 모든 과도기는 혼란스럽다. 이 혼란의 시기를 맞은 우리는 그래서 흔들리고 아프다.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일상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우리는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근처 갈대습지 공원에 차를 주차하고 밖을 보았다. 색 바랜 가느다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이렇게 저무는 구나' 싶으니 어쩐지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청춘 한 자락도, 2018년도.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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